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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遼陽府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周 武王이 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고,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여기서의 朝鮮은 箕子朝鮮입니다. 作八條之教, 尚禮義, 富農桑, 外户不閉, 人不為盜.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傳四十餘世, 燕 屬 真番 朝鮮, 始 置吏 築障. 40여세를 전하여 연(燕)나라가 眞番(진반) 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箕子는 商나라의 왕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무왕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상나라의 왕족인 백이와 숙제 그리고 기자는 고대의 고죽국이 있던 곳으로 떠나지요. 그러자 주무왕은 기자를 기자가 떠나간 곳(箕子東來說)의 領主로 봉한다는 것이지요. 기자는 기원전 1126년부터 기원전 1082년까지 재위에 있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도 기자조선이 존속한 기간을 紀元前1122년 부터 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주무왕이 기자를 1122년에 기자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후에 봉햇다는 말이며 기자가가 실질적으로 조산의 왕으로 등극한 때가 1126년 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주무왕의 주나라는 1046년 부터 나라가 시작 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기자와 주무왕의 역사적 시차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기자가 주무왕 보다 80~84년 이나 앞선 세대이지요. 그렇다면 80여녕이나 뒤진 세대의 주뭉왕이 80여년이 앞선기자를 조선후에 봉햇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요? 분명한 것은 고죽국이 잇던 곳에 기자가 나라를 세웠고 먼 훗날 고구리가 고죽국과 기자가 나라를 세웠던 곳에 고구리가 존재 햇다는 것이지요. 1세대를 약 30년으로 본다면 40여세란 약 1,200년 정도이지요. 즉 1200여년이 흐른 후에는 기자 조선의 이름이 眞番朝鮮이라는 것이지요. "眞"이라는 漢字는 "단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글자" 입니다. "番"이라는 한자는 땅이름으로 쓸때는 "반"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眞番朝鮮은 "진번 조선"이 아니라 "진반조선"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箕子 이후 약 1,200여년이 흐른 후 燕나라가 진반조선을 복속하고 처음으로 요새를 쌓고 관리를 두었다는 기록 입니다. 연나라의 위치를 지금의 랴오닝 반도로 비정하는 것은 동아시아 고대사가 모두 거짓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나라는 지금의 山西省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지금의 陝西省의 일부와 동쪽으로는 遼東과 朝鮮이라고 하지요. 이 기록 대로라면 기자가 새운 나라는 40여세가 흐른 후에는 진반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즉, 箕子朝鮮=眞番朝鮮인 것이지요, 진반이라는 지명은 山西省에 존재 했던 나라 이며 기자가 나라를 세운 곳도 산서성입니다. 기자조선의 행적은 나타나지 않다가 연나라왕의 갈등으로 빈번히 역사에 등장하다가 221년 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장성을 쌓으면서 秦나라에 복속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진시황이 장성을 샇기 위해 진잔 조선으로 들어 갔고 이때 진반조선은 진나라에 복속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시황의 진나라는 불과 15년을 존속하고 멸망을 합니다. 진나라 때에 만리장성이 모두 건축되엇다는 것은 동아시아 고대사를 모두 허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위 지도의 1번(노란색)구간에 불과 합니다. 실제로 진시황때의 근신은 섬서성과 산서성 북쪽의 흉노 엿지요. 이때 두만선우는 진나라 북쪽 변경을 호시 탐탐 노리던 때 엿습니다. 진시황때의 만리 장성이 지금의 요하의 서쪽인 가공의 산해관이라는 것은 역사공정의 부산물에 불과 합니다. "山海關"은 長城이 끝나는 동쪽 끝에 있으며 고구리 영양왕 때 강이식 장군의 "臨渝關(임유관)" 전투의 배경지로 지목 받는 곳이지요. 임유관이라는 곳은 수양제가 고구리를 치려 한다는 정보에 따라 고구리 강이식 장군이 말갈병 1만명으로 遼西 라는지역을 선 제 공격한 곳에 존재하는 이름입니다. 즉, 임유관은 遼西內에 존재 하는 것을 다음 기록에서 알수 있지요. 。《隋书·文帝纪》:“开皇十八年春二月,高丽王元帅靺鞨众万余寇辽西。 <수서 문제기> 개황 18년 춘 삼월 고려왕 원수(강이식)로 하여 말갈병 1만으로 요서를 공격 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수나라와 고구리는 요수를 경계로 국경을 마주한 것으로 보이며 수나라가 고구리를 침공할 정보에 따라 고구리가 말갈병 1만으로 요서를 선제 공격한 기록 입니다. 臨渝關이라는 말 자체가 渝水의 계곡 통로를 막으려고 만든 요새를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즉, 임유관은 요서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北周; 557년-581년 관리의 神道碑(신도비) 에도 유관(渝關)이 在遼西臨渝 라고 하며 유관은 요서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遼西의 진짜 위치를 알 수 잇다면 동아시아 고대사의 모든 비밀의 진짜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遼西가 어디에 존재 했는지 그 역사의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고죽국의 진짜 위치를 알수 있다면 요서의 진짜 위치를 알수 있는 것이지요. 고구리 영양왕 시절에 隋나라가 고구리를 침공하려 하자 배구(裴矩)가 수양제에게 올린 글에서 “고리(고구리)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箕子를 봉한 곳이었다.” 라고 隋書 권67의 기록이 있지요. 이 기록으로도 고죽국의 위치는 箕子朝鮮이 있던 곳이며 箕子가 잇던 곳은 현재 고구리의 땅이라는 것이지요. 고죽국에는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엇다는 首陽山이 있다고 하지요. 이제 부터 수양산이 어디에 존재 했는지에 관한 문헌 기록을 보도록 하지요. 後漢의 중기 때 학자인 마륭(馬融 (79년 ~ 166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수양산(首陽山)은 위(魏)나라 하동(河東) 蒲坂(포판) 땅으로 華山(화산)의 북녘 河曲(하곡) 가운데 있다.”
華山은 서안의 동쪽 120km지점에 있다. 즉, 포판은 산사성 서남족이며 화산의 북쪽이지요. 明나라 때 王直이 지은 『夷齊十辨 』이란 글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습니다, “수양산은 대개 옛 진(晉)나라 땅이니 하동 포판에 있다" 즉, 요서가 지금의 산서성 서쪽이라면 요동의 위치는 요서의 동쪽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대 요동의 위치는 燕나라의 범위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성이 끝나는 임유관은 낙랑 수성현인가요? 이 모든 기록들을 분석해 보면 장성이 끝나는 지점은 산서성 서남부인 요서 지역이 분명하지요. 우리는 장성의 끝이 海岸(해안)과 맞닿아 있을 거라는 역사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나라는 "부여와 같은 부류"라고 하지요. 春秋戰國時代의 나라들을 모두 중국 역사의 나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 아마추어들 입니다. 연나라가 부여와 같은 부류라면 장성을 쌓을 이유가 있었을 까요? 秦 屬 遼東 外徼. 진나라 때의 요동은 경계 밖에 속하였다. 이 기록은 요동은 진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治外 지역이라는 의미 입니다. 즉 진시황은 연나라를 멸망 시키는데는 성공 햇지만 지금의 산서성 일대는 진나라의 치외 지역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漢初 燕人 滿 王 故空地.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식민사관적으로는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의 왕권을 강탈한 것으로 설명하지요. 그러나 위만은 빈땅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엇다는 기록입니다.이 시기의 중국 대륙은 인구가 적은 관계로 空地, 즉 빈땅이 넘쳐나던 때 입니다. 또한 이때의 나라라는 개념은 큰 마을 지나지 않은 나라들이 즐비 햇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기록은 위만이 세운 나라는 진반조선과 관계 없는 빈땅에 나라를 세웟음을 알 수 있지요. 武帝元封三年, 定 朝鮮 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반(真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을 설치하였다. 漢初에 劉邦이 40만군대를 휘몰아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가 오히려 白登山에서 포위되어 몰살될뻔하다가 형"제의 맹약"이라는 조공의 약속하고 살아 돌아노는 사건이후 漢武帝 까지 漢나라는 흉노에게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받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흉노는 분열하여 유목민들의 부족들이 각자 도생의 길로 접어 들면서 선우의 힘이 약화 되자 한무제는 흉노 정벌을 단행하지요. 또한 한무제는 흉노의 각 부족들을 서로 이간질 하여 싸우도록하는 "以夷制夷"로 흉노를 더욱 분열 시킵니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는 樂浪朝鮮을 정벌하고 그 땅에 낙랑군을 설치하지요. 더불어 한무제는 진반 임둔 현동등을 정벌하고 그 땅에도 漢郡縣을 설치 하지요. 진반의 위치는 지금의 산서성 동남쪽 이며 임둔은 지금의 산서성 분부인 大洞市 일대 입니다. 또란 현도의 위치는 지금의 산서성 平城 일대 입니다. 後漢 出入 青幽二州, 遼東 玄菟 二郡 沿革 不常. 後漢 때에 靑州와 幽州에 출입하였으며,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다. 후한 때의 청주는 산동반도 일대 이며 그 치소는 臨淄(임치)라는 것은 동양 역사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유주는 산서성 일대를 말합니다. 그런데 청주와 유주를 후한 때에나 되어서야 출입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한무제가 요동과 조선 정벌에는 성공 했지만 그 땅인 한사군을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기록 입니다. 요동군과 현도군의 연혁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그 역사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기록 입니다. 漢末 為 公孫度 所據, 傳子 康 孫 淵 自稱 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한나라 말기에 公孫度가 점거하여 아들 公孫康을 거쳐 손자 公孫淵은 스스로 燕王을 자칭하고 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曹魏가 멸망시켰다. 결국 요동(산서성과 산동반도)은 공손도가 차지하고 공손도의 손자인 공손연때 조위의 사마의에게 멸망을 당하는 기록이지요. 현재 동아시아 역사가 어떻게 거짓 역사를 말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晉 陷 髙麗, 後歸 慕容垂, (西)晉이 고려를 무너 트렸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이 기록은 서진의 관구검에 의해 동천왕의 고구리를 괴멸 상태로 만들었었지요. 이때 고구리는 옥저를 지나 肅愼의 경계에 까지 도망 하였다는 기록으로 그 숙신의 경계를 식민서관은 지금의 길림 정도로 비정을 하지만 이 때의 숙신의 위치는 하북성임을 막힐부의 위치를 통해서 증명을 햇지요. 鄚頡府(막힐부)의 위치 <隋書>는 "新羅는 肅愼의 경계인 鷄林에서 建國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肅愼은 黑龍江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이며 肅愼->夫餘->三韓->挹婁->勿吉->靺鞨->女眞-文殊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 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대사의 진실은 우리 스스로 역사를 쓰지 못한 책임을 우리 스스로가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숙신이라는 실체는 堯舜時代에 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 가야 합니다. 司馬遷의『史記』의 자료로 알려져 있는『國語』에 "공자가 晉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싸리나무 화살이 꽂힌 매 한 마리가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肅愼(숙신)의 것’이라고 했다지요." 중국의 모든 백과 사전은 숙신과 관련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위키백과는 숙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합니다. 숙신(肅愼 영어: Sushen, 중국어: 肃慎, 병음: Sùshèn)은 주대(周代)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살던 동이인 퉁구스계 민족을 일컫던 말이다. 식신(息慎, Xīshèn), 직신(稷慎, Jìshèn), 주신(朱申, Su-shin)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愼"을 땅이름으로 쓸 때는 "진"으로 읽어야 합니다. 공자가 머물렀던 곳은 지금의 카이펑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자는 紀元前 551년~紀元前 479년 사람입니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개봉(카이펑)은 황하와 맞닫아 있으며 황하를 건너면 河北 입니다.. 공자가 화살을 맞은 매를 보고 이 화살은 肅愼의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晉을 구성하고 잇던 종족 중에 숙진이라는 종족이 있는 것인지 晉이 숙신이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숙진의 위치가 카이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추정 할 수 있습니다. 『新唐書』<渤海傳>에 숙신은 막힐부에 있으며 막힐부는 扶餘之故地(부여의 옛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韓州…高(句).麗置 鄚頡府 都督鄚․高二州 渤海因之 : 遼史「地理志 『遼史』에 따르면 이 막힐부라는 행정구역은 고구리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鄚(막)"이라는 글자를 옥편에서 찿아 보면 "趙나라 때 설치된 고을 이름" 이라는 이외에는 쓸데가 없는 글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막힐부의 위치는 趙나라 범위 안에 존재 해야 하는 것이지요. 위 지도에서 보듯이 趙나라는 山西省을 중심으로 하북성 서부와 하남과 산동반도 북쪽 일대를 영토로 존재 하던 나라 입니다. 또한 遼史에서 "막힐부라는 행정구역이 고구리에 의해 설치 되엇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마도 313년 고구리가 현도와 임둔 지번을 복속 시키고 그 땅위에 설치한 흔치 않은 고구리식 이름의 행정구역인 것이지요.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백과 사전은 막힐부의 위치가 지금의 하북성 任丘市 라고 합니다만 어림 없는 허위 주장 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키 백과는 임치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位于河北省中部,沧州市西北部,华北平原核心地带,地处京、津、保三角地带
중화인인공화국이 막힐부의 위치를 지금의 하북 임치시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요사지리지의 해석에 바탕을 둔 것이지요. 지금의 랴오닝 반도를 고대 요동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황하의 북쪽인 하북은 숙진과 부여 말갈과 발해의 오래된 고토인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며 동아시아 고대사는 또 한번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연의 모용수는 고구리를 공격하여 요양을 빼앗고 요양을 도읍지로 하였다라는 것과 모용수는 후연의 초대 군주이기 때문에 모용수 전에 일어 난 일이라면 前燕때 이며 고구리 영토는 전연의 영토 위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하북과 요동반도 일대 까지 전연과 후연의 영토로 그려 지는 것이지만 이 역사 지도는 거짓입니다. 위의 두 지도의 특징은 전연과 후연의 영토가 한결 같이 지금의 요동 반도를 포함 하고 있는 이유는 고구리가 만주에 존재 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子寳 以勾麗王安 為 平州牧 居之.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태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평주목이란 평주를 다스리는 지역 맹주이며 평주란 지금의 산서성 남부를 말하는 것이며 후한의 헌제는 공손도를 다독 거리기 위해 평주목으로 임명 햇더랬지요. 식민사관으로는 광개토태왕 때의 도읍지는 지금의 집안 인데 이 기록을 식민사관으로 해석을 한다면 지금의 만주 집안이 광개토 태왕 시절의 도읍지 아닌가요? 그렇다면 공손도의 治所는 집안이라는 말이며 지금의 백두산 일대가 평주라는 말입니까? 平州란 晉平이 바뀐 地名이며 진평이란 진나라가 다스리던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식민사관은 가당치 않은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 이지요.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元魏 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遼나라 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원위란 북위를 말하는 것이며 그들이란 고구리 건흥제가 거주 하는 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그곳이 거란의 동경 요양부라는 것입니다. 이것 참 황당 하군요. 건흥제 시절의 평양성이 동경요양부라니요? 원위 태무제(재위 408年-452年3月11日)는 建興帝(장수왕)와 같은 시기의 북위 군주 입니다. 따라서 북위가 고구리에 사신을 보낸 평양성은 遼東城이지요. 遼東城의 歷史 한중일 삼국의 어떤 백과 사전에도 遼東城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아마도 요동성을 기록에 따라서 정확하게 설명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주장 하는 역사와 부합되기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요한 遼東城에 관한 기록은 비공식적으로 공손도가 다스리던 성이라고만 설명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동성의 조건은 고조선의 王儉城이라야 하며 공손씨가 치소로 사용하던 성이며 고구리 건흥제가 요동을 정벌한 후 천도를 하는 성이라야 하며 반드시 고대 요동땅에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요. 평원왕 때에 고구리는 평양성을 長安城으로 遷都를 하면서 요동성은 都邑地로서의 지위를 잃는 것이지요. 건흥제는 아버지 永樂帝(광개토 태왕)의 뒤를 이어 고구리 故土를 회복하고 平壤城을 遼東城으로 천도를 하면서 소위 고구리 三京을 완성 했던 군주 입니다. 식민사관에 의하며 건흥제 때의 도읍지는 지금의 북한 평양 입니다. 이 기록 대로라면 동경요양부는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는 것이지요? 논리의 모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당치 않은 식민 사관이 동아시아 역사를 모두 거짓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唐 高宗이 고구리를 평정하고 여기에 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渤海의 大氏(대조영)가 차지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리를 멸망 시킨 이후의 발해 말갈의 영토를 그린 지도 입니다. 동경요양부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든 요녕성의 요양이든 기록 대로라면 발해의 영토 안에 존재해서는 안되는것 아닙니까? 대조영이 고구리의 평양성을 차지하엿다면 요녕성의 요양이든 지금의 북한 양양이 안동도호부든 발해의 영토라야 하는 것 아니가요? 遼東이라는 지역은 山西省과 山東半島 일대라는 것이 분명하지요? 遼東城은 절대로 요동의 범위 안에 존재 해야 하며 대조영의 영토는 고대 요동인 산서성과 산동반도를 포함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정기의 濟나라는 발해 말갈에서 분리 되는 것으로 봐야 하는 이유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