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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17년 12월 28일 오후 8시 까지는 樂浪의 위치가 山東半島와 강소성 사이의 南四湖 일대로만 비정을 하고 역사를 해석해 왔더랬습니다. 필자는 그동안 역사 기록속의 위치를 어느 정도는 정확하게 지목할 수 있었지만 낙랑의 위치만은 100%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지요. 왜냐하면 낙랑을 남사호로 고정 시키면 자꾸만 다른 地名들을 설명하는데 낙랑의 위치가 온 사방에 등장 하기 때문이였지요. 그런데 오늘 낙랑의 거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낙랑의 거대한 진실을 따라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예의 북쪽은 고구리와 옥저이고 남쪽은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 끝은 대해이며 서쪽은 낙랑이다. <後漢書>를 해석하는 동아시아 역사학에 의한 예의 위치는 위의 지도와 같습니다. 즉 지금의 원산 일대가 예라는 것이지요. 濊와 貊을 합하여 濊貊이라고도 합니다. 예맥이란 우리 고대사의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는데 後漢書의 기록에 따라서 예와 맥을 추적해 보면 맥의 위치는 지금의 산서성에 존재 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며 예의 위치는 고구리와 옥저와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옥저의 서쪽은 낙랑이며 동쪽은 대해의 끝이라면 지금의 강소성과 산동성 남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후한서가 밝히는 시기는 25년 부터 220년 까지의 기록 입니다. 필자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항상 갖는 의문 하나가 기원전의 중국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이 변방중의 변방인 한반도의 역사와 지형을 어떻게 그토록 세세하게 알고 기록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후한서의 내용은 중국 내륙의 역사가 분명해 보이는 곳도 옥저나 예등 처럼 세세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라가 있었는지 없엇는지도 모를 미지의 한반도를 무슨 수로 그렇게 잘 알고 기록 햇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후한서의 기록을 검토해 보지요.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는 '옥저'와 '구리'에 미치니,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 예가 필자가 비정하는 것처럼 강소성과 산동반도 남쪽이라며 위만조선과 고구리의 영토와 교집합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실제로 산해경등은 동쪽은 모두 조선의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만약 우리 국사가 말하는 것처럼 산해경의 조선을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한반도 동쪽은 모두 조선의 땅이였으며 신라가 잇엇다는 진한 역시 조선의 땅이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어느 기록에도 진한이 조선의 땅이엿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한초에 큰 난이 있었는데 '연','제','조',나라 사람 수만호가 피하여 이 땅에 왔다. 한나라 초기의 대란이라면 아마도 유방이 흉노를 공격하다가 백등산에서 죽을 뻔한 사건을 말하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는 요동땅인 산서성과 산동반도 북쪽에 존재하던 나라이며 한나라 초기에 대란을 피하여 이들 나라 사람들 수만호가 예로 들어 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초에는 秦韓 사람들도 난리를 피하여 마한의 동쪽인 진한으로 들어 왓다고 하지요. 도데체 한초에 무슨일이 잇엇던 것일까요? 平城의 위치 한초에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유방이 묵돌 선우를 공격하는 백등산의 위치인데 이때의 흉노 최고 통치자의 위치가 산서성 북쪽인 代의 땅인 평성 근처 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흉노의 일파인 고구리와 선비 일족들의 위치와 겹치기 때문이며 이것은 고구리=묵돌 선우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더해 주는 기록이기 때문 입니다. 즉 묵돌 선우와 한고조 유방과의 백등산 전투는 기원전 200년에 일어 났는데 기원전 200년대의 산서성 북쪽과 오도로스 평원과 그 북쪽은 모두 흉노의 영역이였으며 흉노는 부여와 영역과 나타나는 시기가 거의 정확하게 일치 합니다. 따라서 흉노=부여 이며 부여는 232년 부터 존재 하는 것이며 부여는 고구리 초기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 입니다. 232년이라는 시기 역사 흉노가 나타나는 묵돌 선우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의 재위 시기와도 거의 겹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두만 선우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약 220~209로 추정 하지요. 고구리 역사를 900년 이라는 舊唐書의 기록을 증명해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유력한 사건은 한왕 한신의 유방에 대한 반란 입니다, 그러나 한신의 반란이 연, 제, 조 나라 라는 거대한 영역이 혼란에 빠질 정도 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마 한초의 츤 혼란은 이 두사건 이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초에 연, 제, 조나라 사람 수만호가 이 란을 피하여 濊로 이주 한 것은 이 시기의 인구 밀도로 볼 때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후한서의 기록은 흉노가 아니라 고구리와 옥저 입니다. 즉 예는 고구리와 옥저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지요. 이때 고구리의 영역은 어디이며 고구리의 크기는 얼마만 햇을까요? 옥저는 한수 유역에 존재 했던 것 만은 분명하며 한수는 오도로스 평원에서 발원하여 대륙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장강으로 흘러 드는 장강의 최대 지류 입니다. 한수는 오도로스에서 부터 농사가 잘되는 기후와 토양을 제공하는 하천 입니다. 濊의 남쪽은 振韓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진한의 위치는 한수의 남쪽으로 보여 집니다. 濊 역시 한수의 유역에 존재 했다는 해석이 맞다면 예의 동쪽 끝이 대해라면 이 기록의 대해는 중국 동해안 이라야 하지요. 더 혼란스러운 것은 예의 서쪽이 낙랑이라는 것이지요. 필자는 낙랑의 위치는 지금의 남사호 일대라고 확신을 합니다. 다만, 후한서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분명한 것이라고 확신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후한서는 전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필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 입니다.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연'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왕에 올라, 나라를 전하니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우리 국사는 연나라를 중국 역사로 비정하지만 조선과 연은 교집합적인 관계이며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 하여 마치 위만이 중국 사람 처럼 비정 하지만 필자는 연=조선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증명하는 글을 앞 글에서 수차 밝힌바 있습니다. <元朔>元年,{<武帝>年也.}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원삭' 원년['무제'년이다.] '예'의 군주 '남여'가 '우거'를 배반하고, 이십팔만호를 거느리고 '요동'내에 이르러 속하자 '무제'가 이땅을 '창해군'이라하였다. 이십팔만호라면 적어도 100~120만명의 인구가 이동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인구 기준으로 볼 때 민족 대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만약 예가 함경도 함흥 일대라면 함흥의 濊에 100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왜냐하면 이정도의 인구는 지금의 함경도 인구 밀도 보다 높으니 말입니다. 즉 이 시기 이 정도의 인구가 밀집해서 예의 땅에서 살앗다면 예라는 땅을 너무 작게 설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창해의 위치는 정확하게 고증은 할 수 없지만 한수의 중상류로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 오던 조조가 갈석에서 바라 보고 지었다는 관창해라는 詩의 내용에 滄海가 한수의 상류 어디를 말하는 근거가 존재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창해를 한수의 중상류로 본다면 요동의 범위가 너무 넓어 지지요. 數年乃罷. 오랫동안 방치 하였다. 즉, 한무제는 창해군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말이며 통치하지 못햇다는 말인 것으로 보입니다.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 >· <眞番>四(部)[郡].據殿本改.{番音潘.} '원봉' 삼년에 이르러 '조선'을 멸하고, 나누어 낙랑, 임둔, 현도, '진번' 사군을 두었다. ['番'음은 '潘'이다.] 원봉은 한무제의 여섯번째 연호 입니다. 무제는 방치해 두엇던 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엇다는 것입니다.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 >. '소제' '시원' 오년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에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소제는 武帝의 아들이며 한의 8대 임금 입니다. 임둔과 진번 그리고 현도는 모두 산서성의 고대 지명이며 낙랑은 산동반도 패현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합하여 요동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임둔과 진번을 없애고 그 땅을 낙랑과 현도로 합병을 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랑의 범위는 지금의 산서성 까지 이르는 것이지요. < 玄 >復昭帝<句驪>. '현도'는 소제(기원전 87~기원전 74) 때 다시 '구리'가 회복 햇다. 〔後漢書東夷傳〕「昭帝始元五年。玄菟徙句驪。 구려가 회복했다는 것은 본래 현도는 구려의 영역이엇다는 말이며 현도의 위치는 팽성의 서쪽 즉, 현 산서성 북서쪽 입니다. 평성은 북위의 전신인 代 즉, 탁발선비족의 영토 입니다. 구리가 현도(평성)을 회복했다는 사건은 기원전 82년인 것이며 고구리는 이미 오래전에 평성에 존재해 있었다는 말이며 이 평성을 구리가 회복을 했다는 기록 입니다. 평성은 현도의 중심 지역이지요. 따라서 현도가 고구리가 다시 회복하는 시기는 무제의 이들 소제 때이며 고구리가 현도를 다시 회복하는 시기는 기원전 87년~기원전 74년 사이라는 말입니다. 소제의 아버지인 한무제에 의해 괴멸되다시피 했던 흉노가 서서히 고구리라는 이름으로 흉노의 옛 고토인 산서성 일대가 구리에 의해 회복된다는 것은 흉노=고구리라는 것을 의미 합니다.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단단대령의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단단대령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貃이라는 것으로 지금의 태행 산맥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또한 낙랑의 위치가 지금의 남사호 일대라면 옥저와 예 역시 河南땅이 유력해 보입니다. 옥저와 예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라는 것은 樂浪의 범위는 서쪽으로는 한수 유역 까지라는 의미 이며 河南의 남쪽과 湖北 그리고 江蘇와 山東半島 남부와 安徽의 거대한 영역으로 구성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때에도 여전히 낙랑은 멀기 때문에 직접 통치가 안되었던 것으로 보여 지구요. 필자가 그동안 생각했던 낙랑의 범위는 남사호 일대라는 생각을 완전히 허무는 기록입니다.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후에 그 (낙랑의)지경이 넓고 멀어 다시 동쪽 칠현으로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都尉라는 직책은 秦나라와 漢나라가 직접 파견하는 군사 조직의 책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漢나라는 낙랑이 너무 멀고 널은 관계로 동쪽을 다시 七縣으로 나누고 낙랑의 동부를 관장하는 도위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無大君長, 其官有侯·邑君·三老. 큰 군장은 없고 관에 후와 읍장과 삼노가 있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어른이 스스로 이르기를 '구리'와 한 무리이다 예의 종족적 구성은 구리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북 또는 호북의 예가 고구리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은 구리라는 종족의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기록이며 이에 따르는 구리의 여역 또한 어느 특정한 지역만을 지목해서 해석해서는 안됨을 의미 하는 것이지요. 言語法俗大抵相類. . 언어와 법과 풍습이 비슷하다 즉, 예의 언어와 풍습이 고구리와 같고 종족이 같다는 것을 同種同類(동종동류)라고 합니다. <樂浪>檀弓出其地. 又多文豹, 有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낙랑은 단궁이 나오고 또 표범이 많으며 과하마가 나오는데 높이가 삼척으로서 과하마를 타고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가 있다.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바다에서 반어 나오고, 사자가 오면 이를 모두 받쳤다. 班魚는 민물고기로서 한반도에는 없는 물고기 입니다. 필자는 2017년 12월 28일에서야 낙랑의 정확한 위치를 알았습니다. 그동안 다른 지명의 위치는 어느 정도 정확하게 지목을 할 수 잇었는데 낙랑만은 온 사방에 등장하는 관계로 필자는 낙랑 딜레마가 있었던 것이 사실 이었습니다. 오늘 하늘이 열리고 찬란한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면서 낙랑이라는 실체를 알게 된 날입니다. 이제 역사 해석이 조금 더 구체적이며 분명해 질 것 같습니다. |
첫댓글 그냥 남북 아메리카가 우리 땅이었다고 합시다. 너무 쪼잔하네
논리비약이 보이네요
어느부분이 논리의 비약이라는 건지요?
어차피 님의 눈에는 제 글전체가 논리비약 아닙니끼?
새삼 스럽게 이글이 논리비약이라함은 다른 글은 인정을 한다는 것인가요?
자신으 지식과 다른 글아라면 조모조목 어떤 부분이 비약인지 짚어 가면서 지적을 해야 하는 것아닙니까?
지적할수 있는 기보존지식이 없이 빈정거리는 투의 댓글을 다는 행위는 혹시 있을 논리의 비약보다다 더 무식한 행위 아니던가요?
혹시 낙랑이라는 실체에 대하여 괴민한번 해 보신적은 있으신가요?
그런 고민한번 없이 오랫동안 고민끝에 내린 결론의 글에 일언치하로 쪼잔하다는 둥, 논리의 비약이라는 등의 댓글은
남의 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도 갖추지 못한 묻지마식 댓글이라는 것은 알고는
니까?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어떻게 왜 아난가로 답글을 써 주시는 예의는 갖추고 댓글쓰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이런 댓글은 무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