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26일 수요일 오후 6시 25분.
봄이라지만 저녁 어스름의 바람은 아직 차다. 해는 서편 하늘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서울에서 해는 서산(西山)으로 지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 사이를 뚫고 아파트 그늘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퇴근하고 오늘은 부담없이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 하월곡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 샹그레빌이라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상향(理想鄕) "샹그릴라"에 고급주택을 뜻하는 "빌라"를 조합해서 붙인 이름쯤으로 생각된다. 이면도로를 사이로 하여 서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담벼락에 개나리가 노랗게 꽃을 드리우고 있다. 봄이 맞구나! 배가 너무 고프면 걷기가 싫어질 수 있으므로 가방에 넣어 두었던 계란 하나를 꺼내 까먹는다. 어저께 직장 신우회에서 점심시간에 부활절 계란을 나누어 준 것인데 가지고 있다가 요긴하게 잘 먹는다. 이틀동안 가방에 넣고만 다녔는데, 푹 잘 삶아졌겠다.
또 아파트다. 이번에는 월곡 래미안(來美安)이다. 역시 최근에 재개발해서 새로 지은 아파트인데 제법 고급스럽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키가 크고 곧게 자란 소나무를 아파트 건물 사이에 심어 놓았다. 한 쪽 편에 심겨진 또 다른 나무 하나에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나무이름 참회나무. 자라는 곳 안면도. 수령 300년(추정)". 둥치도 비교적 크고 제법 수형이 잡혔는데 정말 참회나무가 맞을까 생각한다. 참회나무가 저렇게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닐텐데. 그나 저나 너는 자라던 땅에서 뽑혀서 이곳 까지 오게 되었구나. 그러면 예전에 이곳에 터를 잡고 나지막하게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월곡지하철역을 지난다. 18시 50분. 머리 위쪽으로 내부 순환도로가 어지럽게 달리고 있다. 처음에 저렇게 공중에 길을 매달기로 생각한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아직도 월곡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골목길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월곡곱창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 옆으로 라도곱창, 홍남곱창, 장군네곱창, 광주곱창집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모두가 “원조집”이라는 것을 강조해 놓았다. 그 한편에는 할머니순대집도 있고 또 무슨 사철탕집도 있다. 미아삼거리에 7시 15분에 도착한다.
이 곳은 매우 북적거린다.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백화점,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마을버스, 꽃을 파는 가판대, 친구를 만나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튀김집. 그리고 바야흐로 저녁이다. 여기 큰 길인 도봉로는 버스전용차선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에 승용차로 이 구간을 지나가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은 그저 한가롭다. 방관자의 자세로 인파속을 헤치고 나간다. 그저 지나가기로만 마음먹어서일까, 소란스러움과 부대낌과 분주함 가운데 있어야 할 삶의 치열함과 향기가 느껴지지 않음이 아쉽다.
삼양동입구 사거리에서 도봉로를 피해 주택가 사잇길로 들어선다. 일단은 요란함이 잦아들고, 차량 불빛이 눈을 부시게 아니해서 다소 안정을 찾는다. 지난 겨울에 이곳을 지날 때는 흙을 파헤치고, 보도 블럭을 새로 깔고 하면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리가 끝난 모양이다. 그런데 뭔가 색다른 것이 눈에 띈다. 보도블럭 사이에 동판을 묻고 무슨 글인가를 새겨놓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전구 불빛을 도움 받아 한 글자씩 읽어보는데 약간은 익숙한 글이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는 지게 위에 덮여 꽁꽁 졸라 묶여 무덤으로 실려 가거나. 곱게 꾸민 상여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 가거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에 한 번 가기만 하면 누런 해와 흰 달이 뜨고, 가랑비와 함박눈이 내리며, 회오리 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하겠는가? 하물며..... ” 정철의 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인데 이걸 누가 왜 여기다가 새겨 놓았을꼬. 더구나 여기가 주막거리 입구도 아니고, 그저 어둑신한 뒷길 인도일 따름인데. 머리를 들고 보니 가까이에 한탄강추어탕 메기매운탕 간판을 붙인 음식점이 아무런 감흥 없이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다.
쭈욱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다시 수유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머리고기 국밥집에는 허옇게 김이 피어오르는 국밥을 앞에 두고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도 배가 고프다. 아까 계란 하나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빵이라도 사먹을까 하다가 혹시 내가 산 빵에서 생쥐머리나 못 조각, 지렁이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참는다. 마라톤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요? 나는 대답한다.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달립니다요. 나는 빨리 집에 가서 안해에게 저녁을 달래서 먹고 쉬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더 부지런히 걷는다. 수유시장을 빠져 나올 무렵 어린 토끼와 애완 쥐를 파는 가게가 보여서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토끼는 주먹만 하다. 큰 아이 이레가 어렸을 때 토끼를 키우겠다고 졸라서 사 준적이 있는데 집에 데려다 놓은지 하루 만에 죽고 말았다. 그 생각이 문득 걸음을 멈추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레는, 이제는 뱀을 키워보겠다고 으르렁거린다.
수유사거리에 도착했다. 저녁 7시 55분이다. 인근 SK주유소를 지나면서 기름값을 흘낏 본다. 휘발유 1672원, 경유 1584원. 히유, 저절로 한숨이 난다. 변화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힘을 제대로 받아서 그런 것인지 대한민국은 너무 잘 변화한다. 너무 잘 바뀐다. 자고 나면 바뀌어져 있는 것이 물가이고 거리 모습이다. 없던 건물이 금새 생겨나고, 한 두 해 전에 다니던 골목길은 어느 차원으로 흡수 되었는지 나중에 가 보면 없다.
수유동을 지날 때면 봄에 피는 꽃 산수유가 생각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정비석씨의 수필 “산정무한”이 생각난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이 “수유”와 그 “수유”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따져서 관계가 있으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떨까. 다만 나는 수유리를 지날 때면 가끔 인생 수유가 생각난다는 것, 그 뿐.
광산사거리를 지나고 곧 우이천을 만난다. 여기에서 넘어가는 다리는 쌍문교이고 이 다리를 건너면 쌍문동이다. 날이 밝다면 다리 위에서 도봉산을 잘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어두운 하늘에 저기쯤 도봉산이 있겠거니 짐작을 하며 지난다. 이제 집까지는 1.5km 남짓 남았다. 집에는 몇 시에 도착할까 속셈을 해본다. 출발하면서 집에는 8시반에서 아홉시 사이에 도착할 거라고 했는데 거의 맞출 것 같다. 가끔 달리기를 하러 이 길로 오는데, 집에서 한일병원앞까지 달려서 오면 대략 14분. 지금 걷는 속도는 1km에 10분쯤 되니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흐흐흐, 고도의 산수이다. 선덕중학교에서 아파트로 향해 가는 약간 경사진 도로에서 낯 모르는 어떤 이가 춘천마라톤 대회에서 나누어 준 듯한 상의를 입고 달리기를 하고 있다. 저녁 8시 33분 드디어 집에 도착한다.
다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으면 조금 걸어가보는 것이 좋다.
첫댓글 한번쯤은 지나가본곳을 네가 걷고 이글을 써놓으니 내가 걸어간것같은 느낌이...
나도 언제쯤인가 모르지만 걸었던길이다.......
예전 통금(통행금지)있을때 을지로부터 파출소 피해가며 간적있다,,, 덕분에 파출소 위치는 눈감고도ㅎㅎ,,,^^*
설살때 항상 다니던 길인데,,,어떻게 변했을까 싶었는데.......수유리,,국립재활원쪽에 친구들도 많이살고있는데......월곡동에 이제 아파트 단지가 됐구나/// ,삼양동,광산사거리 미아삼거리,,한일병원 모두다 낯익은 이름들.....설떠난지 5년정도인데...많이 변햇나보네....갑자기 친구들이 넘 보고 싶다~~~~~~~~~~~~~~~~~
총각때 수유리 개미골목에서 살던때 생각난다.광산슈퍼,감자국집,장미원,미장원다니던 쥔집 딸내미...한번쯤 가보고 싶다.
미장원 딸내미 만나러????
레옹 오랫만이네~
레옹, '집으로' 잘봤다. 자주 들려 '밖으로'도 올리고, '안으로'도 올리고 해라....
자주 들리시게나....글로 ,달림으로 .....때론 얼굴로...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