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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적명스님이 하신 말씀을 받아 적어 보았습니다.
제가 초학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선수행의 기본에 대해서 얘기 하는지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간화선은 비롯된지가 천여 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중국대륙을 섭렵했고
또 일본과 우리나라에 까지 거의 수행의 중추역활을 했습니다.
육조이전까지 수행법은 소위 관법이라는 것이었고요. 그것은 오조 홍인대사의 최상승론에서도 일몰관을 권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스님 당시에도 관법수행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기존의 관법과는 좀 다른바가 있지만은 그 당시에 성행했던 묵조선도 묵조관이라고 해서 하나의 관법수행입니다. 이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스님도 묵조선을 수행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묵조선을 버리고 간화선을 택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는 묵조선의 폐단을 열심히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그 당시에 벌써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과 매한가지로, 그 당시에 많은 수행자들이 묵조선 체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짧은 시간에 그렇게 묵조선에서 간화선으로 선택이 크게 뒤바뀐 이유, 많은 수행자들이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은 체험적으로 그 우월함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이 우월했느냐?
그것은 간화선의 구조상의 특별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법이라는 것은 우리 일상적인 의식형태를 기반으로 해서 수행 안에 해나가는 방법입니다.
즉 보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보는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화두 수행법은 그와 같은 상대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의심한다고 하는, 이 간화선의 핵심은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 화두의 문제를 의심해 들어간다는데 있는데요. 그 의심하다는 것 자체가 상대성을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대상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때, 예컨대 꽃을 본다고 칩시다. 그때 그것이 '꽃이다'하면은 거기에 의심이 없습니다. 그 대상이 꽃인지, 돌인지, 컵인지, 그 무엇인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 그럴 때 의심이라는 것이 있게 됩니다.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 의심입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에는 대상이 결정되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대상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은 대상을 결정짓는 우리의 인식하는 마음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상이 알수 없을때 그것은 꽃이 아니고, 돌이 아니고, 그 어떤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인식도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상과 마음이 결정되지 않는 것, 그것은 대상과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예를 조주 무자화두를 가지고 들어보면, 처음 시작할때는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했을까?' 이런데서 시작합니다. 부처님이 불성이 있다고 하는 말과 조주스님이 그것을 부정하는 없다고 하는 말이 상충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부처님 얘기를 상기하고, 또 그래서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리고 조주스님이 그것을 부정하는 개의 불성이 없다고 하는 말을 대비시키면서 의심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이럴 때 의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생각 속의 의심이기때문에, 생각 수준의 의심이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구를 한다던가, 오래 지속적으로 화두 의심을 지어나간다던가, 혹은 어떤 계기가 생겨서 그 문제에 집중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문득 그 의심에 마음이 사무쳐 들어감을 느끼고 그 의심이 크게 마음속에 자리잡게 됩니다. 그럴 때는 앞서 있었던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부처도 없고, 부처의 말도 없고,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중생의 불성이 있다는 사실도 없습니다.
그리고 조주도 없고 조주가 불성이 없다고 했다는 그 사실자체도 거기에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거기에는 일체가 끊어져서 한 덩어리 의심, 이것을 응연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런 응연한 한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상태를 체험하면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냥 이제 이해를 하시려면 이런 예를 상상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간다 칩시다. 그런데 숲속에서 숲길을 간다고 치고요.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우선 걸음을 멈춥니다. 육체적인 동작을 멈춘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도 멈추게 됩니다. 소리, 들리는 소리에 집중할 뿐입니다. 소리에 집중하면서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하거나,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큰 안테나를 활짝 열어놓고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려는 상황과 같습니다. 오직 확실히 열려있는 충분히 열려있는 의식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상을 파악하려고 알려고 하는 마음 뿐입니다.
이럴 때에 이런 저런 생각이 끊어지고 오직 한마음 한 덩어리뿐인 마음 그게 화두를 지어가는 공부하는 마음상태입니다. 이럴 때는 인식해야 될 대상으로서의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식하는 자기의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나타나고, 인식이 결정되기만 하면 우리는 인식해버립니다. 그것으 무엇이다. 예컨대 고양이다, 들쥐다, 혹은 꽃이다.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해버립니다. 거기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의심하는 꽃, 그 꽃은 생각이 다 떨어진 꽃이고 능소, 모든 상대성이 다 떨어진 꽃입니다.
이 상대성이 초월은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진리에 빨리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점이 간화선이 구조적으로 탁월함이 있다고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예컨대 간단히 대비시켜서 남방관법을 소개해 드리자면은요. 처음 수행해 나가는 삼매 닦는 과정에서 부터도 대상, 그러니까 예컨대 까시나(kasina)를 대상으로 해서 관법수행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해서 관상을 하지만, 그 다음에는 익숙해지면, 눈을 감고,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 그것을 까시나라고 합니다. 그것을 관하면서 수행을 시작합니다.
이 까시나가 상념의 상태에 있는 동안은 그것은 뚜렷하지도 않고 힘을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 관이 깊어져서 어느 순간에 생각을 뛰어넘게 되면 말하자면 선정을 이루게 되면, 그 까시나는 예전과 다른 특별한 모양으로 변합니다. 남방불교의 사상적 근거가 되고 있는 청정도론에서는 이와같은 상태를 '구름에서 달이 벗어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모든 수행단계에서 다 있는 일입니다. 남방관법에서 있는 것처럼 북방의 아까 말한 최상승론에 있는 일몰관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요. 화두 참구하는 데도 그와 같은 현상은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 의식상태가 통일이 되면 순수해지면, 거기서 나오는 희열감과 청정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방수행에서는 이와같이 까시나, 빛나는 까시나가 앞에 나왔을때 그것을 의지해서 초선에서부터 사선에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단계에만 거치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이 소위 증과라고 하는 열반 상태에서도 이것은 계속됩니다.
삼매수행상태에서 대상인 까시나, 빛나는 까시나,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을 관하는 내 마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열반에 이르러서도 열반이 존재하고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열반을 관하는 마음을 증과의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증과의 마음이 40심이나 된다고 합니다. 아라한이 되고서도 열반의, 무여열반에 들기 이전까지는 열반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몸과 마음이 다 멸해서 열반만이 남아있는 상태, 죽음 이후의 상태의 열반만을 완전한 열반이라고 이들은 말합니다.
아라한이 되고서 열반을 관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한 열반이라고 못하는 이유는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의지하고 있는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진리가 4가지 있다고 설하는데요.
색법과 심법과 심소법과 열반 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고유한 법이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과 마음은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이 마음이 있는 동안은 이 마음이 열반을 관하고 있는 동안은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끝까지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상체계입니다.
대승불교의 기본은 불이사상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관하는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젋은 스님들한테 얘기할때 남방위빠사나나 관법을 수행해도 좋지만은 남방수행을 통해서 그와같은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의미는 우리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얘기하고 그 다음 실제적인 수행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합니다.
질문 : 위빠사나를 하더라도 위빠사나를 하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돌리면 그 순간 그것이 간화선이 됩니까?
적명스님 : 그럴수 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써 참구염불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중국에서 송나라이후에 우리나라도 고려때부터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수행법입니다.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아미타불님이 계신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수행법인데요.
이걸 정토종이라 합니다.
정토정이 성했을때 선종도 성했기 때문에, 이 두가지 수행법이 하나로 된때가 있었습니다. 염불을 하면서 '염불하는 이 자가 누구인가?' 이럴경우에 이것은 자기 주인공을 찾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되고, 또한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더라도 사후에는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권장을 하는 것입니다.
남방불교 수행법을 행하면서 그 관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한다면 여기에도 역시 두가지 이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남방불교 수행의 장점은 우선 첫째가 편이하고 쉽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가지 겹치는 수행법 질문을 처음 들어보고, 저도 생각해보는 것도 처음 해보는 생각인데요. 만일 이런 두 가지 수행법을 접목시킨다고 하면, 쉽기 때문에 마음, 안정, 정신통일에 이르기가 쉬울 것 같고요. 그러면서도 구현이 대승적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법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 : 일반사람들이 화두참구할때 선방 밖에서도 가능한지 궁금하고요. 그리고 일반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인 선지식의 지도도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화두참구를 할 수 있습니까?
적명스님 : 당연히 일상 속에서 참구할 수 있고요.
이 간화선이 조사선에서 간화선으로의 변모가 이 조사선의 일반화에 있다고 그렇게 일컬어집니다.
조사선적 수행을 일반, 누구든지 할 수 있도록 그게 간화선법이기 때문에 어떻게, 어떤것이 화두이고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는지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알면 아무 선지식이 없이도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질문 : 스님말씀을 듣고 있으면 염불을 하든지, 위빠사나든지, 궁극적으로는 어떤 단계에 가면은 다 화두가 될 쉬 있다고 그렇게 이해를 했는데요. 그렇다면 간화선에 있어서 화두에 특별한 기능이, 역활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명스님 : 얘기를 좀 잘 못 들으신 것 같은데 어떤 수행이든지 나중에는 화두가 된다는 그런얘기는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모든 수행과정에서 체험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은 그 선명성, 청정하게 느껴지고 속이 확 트이는 느낌이고 매우 만족한 행복감,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하는 그런과정이 이것은 소위 '선정락' 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선정을 얘기할때 초선, 이선 및 선정을 얘기할때 몇가지 특색을 말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특색이 희와 락입니다. 기쁜것, 행복스러운 것, 네 그렇게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화두를 통해서든지 염불을 통해서든지, 관법을 통해서든지, 우리 의식이 순수한 통일된 의식, 선정상태에 들었을 때는 누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입니다.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지, '같은 수행법이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질문 :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러니까 환생하는 기간 같은 순간에 어떻게 전생의 간화선 수행들을 이어 갈수 있는지요?
적명스님 : 만일 죽음에 이른 분한테 도움을 주기 위한 얘기라면 간화선이 특별한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도움을 받으려면 간화선적 수행이 기반이 있어야 됩니다.
화두가 일념을 이루면 마치 관법을 해서 아까 까시나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화두의정이 일념을 이루면 그 자체로 빛이 난다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충만감과 희열감과 시원, 청정하고 시원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화두의 창시자인 대혜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화두일념을 이루면 설사 금생에서 깨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악업에 떨어지는 일은 결정코 없으며 내세에는 한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질문 : 화두를 드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것이 궁금한데요. 어떤 사람은 잠을 자는 동안에 꿈속에서 수행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하물여 잠을 자는 동안에도 티베트 사람들은 꿈속에서도 수행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생의 마지막과 잠에 빠진것이 비슷하기 때문에.....
적명스님 : 화두에는 특별한 왕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이렇게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골목길을 가고 오면서 많은 사람을 보지만 다 모르는 사람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마주쳐도 인사할 필요도, 눈여겨 볼 필요도 없게 됩니다. 아무 의식에 남는 것 없이 무심히 지나칠 뿐입니다.
그런데 한달, 두달, 세월이 지나면 차차 늘 마주치는 얼굴을 알아보게 됩니다. 얼굴이 충분히 익숙해지면 모르는 길에 서로 보면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일에 버스 정차장 같은데서 기다리는 시간을, 늘 같이 한다던가 이렇게 시간을 같이 하는 기회가 있으면 묻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사십니까?"
"무슨일을 하십니까?"
그렇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면 서로 친분이, 친구가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려는 한다는것, 상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먼저 상대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을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몰랐을 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히 알려고 하게 됩니다.
화두도 꼭 같습니다.
이 화두는 그 구조상 우리가 일찍이 경험한 그런 길이 아닙니다. 보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고, 듣는 것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보고 듣는 거이 끊어진 그런 곳을 통해서 이기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낯섭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해서 진정한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당한 익숙함이 있고서 가능한 일입니다.
화두를 처음 들 때 그 내용이나 의미가 우리한테는 생소하기 때문에 들어봐도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들어도 지나치고 들어도 지나치지만은 계속 지나치다보면 언젠가 익숙함이 생기고, 익숙함이 생기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 화두라는 것은 하나의 문제인 셈인데요. 이 문제, 충분히 친숙해져서 관심을 갖게 되면 저절로 알려고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그게 엷게, 가볍게 그런 의심이 일어나지만은 그것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 땐가는 문득 아주 짙은 의심이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짙은 의심이 문득 일어나면 그것을 진의가 일어났다고 말하는데요. 본격적인 공부의 시작입니다. 진의가 일어나면 스스로 '왜 여태까지, 이렇게까지 이와 같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안 가졌을까' 스스로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의정이라고 할 때, 의정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의정이라고 할 때 그 '정'자는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의심의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화두, 의심이 생각으로 하는 동안은 지속성이 없지만은 이게 감정으로 옮아오면 지속성이 생깁니다.
임시등록 입니다...
첫댓글 날샐뻔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녹취라는게 쉬운 일이 아닌데 정확히도 스님의 가르침을 녹취하셨군요. 고맙습니다.
날샐뻔님이 수고를 해 주셨으니 제가 또 가만 있을 수는 없겠군요. 몇 마디 또 허물을 짓겠습니다._()_
적명스님의 짤막한 말씀 속에는 간화선, 그리고 위빠사나의 모든 것이 아주 짧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핵심 요소입니다. 그래서 수행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 또 수행을 별로 실제 안 해보신 분은 스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갈 것입니다. 즉, 스님 말씀이 잘 이해가 안 가는 분은 수행을 잘 모르고 수행도 안 해 보신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절을 했던 화두를 들었던 염불을 했던 위빠나사 등 그 무엇을 얼마나 했던 제대로 하신 분은 스님 말씀을 그대로 알아들으실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너무 구름잡는 이야기로 들리실 겁니다. 동영상 보신 분들은 한번 스스로를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볼 때 간화선은 대단히 뛰어난 수행법입니다. 종파 중에서 거의 후반기에 출발한 선종이 다른 쟁쟁한 교학 위주의 종파를 제치고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종파가 된 건 다 이유가 있지요. 달마의 관심법(관법)이 우선 뛰어났고, 관법이 한계에 이르자 중반에 대혜라는 걸출한 스승님이 나타나시어 시절인연에 맞게 관법위주의 선종을 화두 위주의 선종으로 바꿈으로써 선종은 소멸의 위기를 넘기고 다시 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할 것입니다. 그만큼 간화선은 뛰어납니다. 해보시면 압니다!
동영상에 자막이 있어서 그대로 적었습니다...^^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서 아직 다 적지를 못했는데 글이 날라갈까봐 일단 임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간화선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 가르침이 변질되어 말장난 비슷하게 되어갑니다. 아마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중국선사들, 경허 이후의 우리나라 선사들도 제가 보기에 말장난 수준의 간화선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니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본래 대혜선사는 간화선을 대중을 위해 만드심) 선이란것이 그만 저멀리 남의일이 되어버리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어요. 하나라도 알아듣게 불법을 설명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설하는것이 자신의 도가 높은걸 증명하는것처럼 되어버린겁니다. 그래서 알아들게 설명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못알아듣게 법문 하시는 경향이 있지요. 본말전도지요
청정도론은 상좌부불교의 대스승 붓다고사가 지은 것으로, ‘선정’수련(사마타)를 통해 '통찰지(위빠사나)'를 얻게 한 후 청정의 세계로 이끄는 게 목표인 가르침입니다.그 방법으로 붓다고사는 ‘보이는 세계’의 분석, 관찰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궁극의 세계)’로 이끄는 형식을 취해요. 우선 계를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한 다음 명상으로 들어가는 데, 까시나라는 것이 그 첫번째로, 우선 땅의 까시나를 만듦으로써 근접삼매에 들어갑니다. 보이는 세계인 땅을 하나의 관찰 대상으로 삼고 관찰함으로써 보이는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땅의 까시나를 닦은 후 다시 다른 기타 까시나로 들어갑니다.
수행을 하면, 아니 이 세상 무슨 일을 하든 정말 내가 원하는 일, 그리고 온 심혈을 기울여 일을 하면 희열이 옵니다. 기쁨이 오는 것이지요. 이걸 불교에서는 법락이라고 하는데, 이 기쁨은 수행에서만 오는 게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일체 세상일에서 와요. 그걸 불교에서는 樂이라 하지만 일반 언어로는 <즐거움>입니다. 열반종요엔지 승만경인지 어디에선가에는 우리가 성불하는 건 결국 중생에게 본래로 존재하는 <즐거움에 대한 추구> 때문이라고 설명해요. 그만큼 즐거움은 중요한 겁니다.
<즐거움,진화가준최고의선물(조너선밸컴/노태복/도솔출판사/2008)>이란 책을 보면, 동물에겐 모두 즐거움이 있고 이 즐거움이야말로 진화의 원동력(因)이요 진화가 준 최고의 선물(果)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들면 모든 동물은 놀이를 즐기는데, 이런 놀면 즐겁고 이런 즐거움이 있기에 이를 추구하기에 진화가 일어나고 또 진화가 일어나면 보상으로 즐거움이 온다고 저자는 주장해요. 이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락에의 추구가 중생을 성불케 한다>는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지요. 언어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면 즐겁다, 수행맛을 알면 수행 안하곤 못 배긴다, 하며 수행만을 강조하는 일부 수행자의 가르침을 제가 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기독교나 이슬람인들이 신을 믿으면 즐겁다, 기쁨이 온다 등등으로 마치 그런 기쁨이 믿는 자의 전유물인줄 아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는 이유지요. 또 수행해서 오는 법열을 그것만이 전부이고 자기 수행만이 그런 법열을 가져오는 줄 아는 것도 우습게 보는 이유에요. 그리고 법열을 마치 수행의 끝인 줄 아는 분들도 마찬가지.
염불하는 이놈이 누군가?하고 참구하는 걸 <염불선>이라 합니다. 이런 염불선은 또 실상관, 또는 실상염불로서, <이 세상 천지만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라며 부처 아닌 것이 없는 그 자리를 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간화선자들은 염불선은 선이 아니라고도 말하지요. 그러나 간화선만이 선은 아닙니다. 요즘 간화선자들은 기독교인들을 닮아 가고 있어요. 입만 떼면 간화선만이 최고라 하고 간화선 아니면 깨닫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말도 서슴지 않지요. 우리가 흔히 기독교인들에게 보는 교만함, 배타적 사고가 간화선자들에게 팽배합니다. 다 우스운 일이지요. 대혜스님은 전혀 그러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간화선 창시자 대혜스님의 대표작, <서장>을 읽어보면 스님이 얼마나 중생을 사랑하고 얼마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시고자 했는지, 그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글 하나나하나에 스며 있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스님의 애틋한 마음이 실려 있습니다. 거기엔 교만, 배타적 태도, 이런 거 전혀 없어요. 보현행원 공부가 익은 분들은 대혜스님의 모습이 바로 보현행자요 스님의 가르침이 바로 보현행원적 가르침임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대혜스님도 보현행원은 인연이 없어셔서인지, 거기 대한 언급은 없어요. 저같은 사람이 행원 전법에 힘든 이유도 이런 이유가 큽니다. 한 말씀만 일러 놓으셔도 되는데 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니다. 댓글도 힘드네요. 어쨌든 간화선은 뛰어난 수행법이고,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 불교를 대중을 위한 보편불교, 일반불교로 바꿔 놓은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특별한 분들이 특별히 하는 가르침이 그만 되어 버렸지요. 간화선은 일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누구나 부처될 수 있고 누구나 깨칠 수 있게 하기 위해 나온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간화선 공부도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단, 깨칠려고 하지 말고 부처님 공양 중생 공양 잘하기 위해 하세요!
네에... 소중한 댓글 너무 고맙습니다 ^^ _()_
동영상을 볼때는 뭔가를 아는듯한 착각에 빠졌었는데요....
이렇게 글로 다시 써보니 아주 일부만 이해를 하고 있더군요 ^^
보현행원의 열번째 발원인 나의 공덕을 모두 회향하는 글을 읽을때는 사실 아직 마음이(?) 공허한 느낌이 듭니다.
특히 '중생들이 스스로 지은 악업 때문에 겪게되는 모든 고통을 제가 대신 받는다' 부분은 읽으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지은 업장의 참회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업장을 내가 받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물론, 그때 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속으로 계속 외치지만요...
계속해서 열심히 하면 벗어날수 있겠죠...^^
날쌜뻔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법문을 또 글로도 반복 읽고 , 보현선생님 법문 까지 들었습니다.
긴글 올리시는라 수고 많으셨어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녹취를 해본 분들은 이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인지 모두 공감하실 수 있을거에요. 날샐뻔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덕분에 한번더 복습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종교가 시간이 흐를수록 창시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가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로 제 생각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른 형태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오류가 불교라고 없을까요? 없다고 믿는 것이 오류의 시작일 듯도 합니다.
대혜 스님의 애틋한 방편이 화두선이라는 수승한 방법을 낳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또 하나의 대중과 괴리된 수행법이 되어버렸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