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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벌에 들어 갈 것인가, 영생에 들어 갈 것인가
마25: 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르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떼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4/-------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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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제가 앞에서 게시글로 살펴 보앗듯 마24-25장에 나오는 마지막 천국 비유로 먼 훗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모아 놓고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를 갈라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전 세계 모든 민족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신다는 그 유명한 세 번째 비유입니다
어쨌든 천국 비유중 양과 염소가 마지막 결론적인 비유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겉 내용만 보면 믿지 않는 남녀노소 누구나 알기 쉬운 간단한 비유 같으면서도 막상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의 영벌과 영생이 달린 죽고 사는 말씀 같아 두렵고 무서운 비유라는 것을 봅니다
때문에 이 천국 비유를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셔서 최종 심판 때 있게 되는 일명 그리스도 심판이나 계20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인 백보좌 불못 심판이라고 곡해하고 왜곡되게 믿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대부분 본문 말씀을 문자로 읽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선행을 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 불에 심판을 받는다고 평소에 조금이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여야 내 자신이 양에 속하여 천국에 간다고 여기며 나름대로 양이 될려고 실천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비유 말씀을 읽으며 한번 깊이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예수께서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난힌 자에게 구제를 하지 않으면 염소가 되어 지옥에 가고 선행을 하면 양이 되어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하여 선행을 하라는 비유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서 상급을 받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아니면 예수께서 우리들을 피 값으로 구원해 주셨으니 그 은혜에 보답으로 선행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칫 문자대로 읽으면 어려서부터 말슴을 지키며 살았다고 예수께 말했던 어떤 부자 청년의 행위 구원을 말한 것 같아 당황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렇게 성경에서 행위 구원을 말한다면 구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타 종교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믿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는 단체나 일반 사람들이 많으며 세상에 모든 종교인들도 윤리 도덕을 말하며 자비와 박애 정신을 가르치고 행합니다
때문에 어떤 이상한 신학 교수나 목사들이 아직도 양과 염소의 비유의 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마25장 비유로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며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고 말하는 것을 보았고 이 비유를 가지고 절에 중들이 목사 보다도 더 설득력있게 설파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 종교인이든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착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물질로 헌신 봉사하면 천국에 간다고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어떤 행위를 하여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 구원을 말씀하지 않고 예수를 믿어 마음에 피 뿌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 그 마음이 청결하고 의로운 사람만 영생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의인”을 강조하여 말씀하시는데 양과 염소 비유 마지막 46절에서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말씀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염소로써 의롭지 못한 불의한 죄인을 말하고 양들을 의인으로 말을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죄인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으로 이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을 갖는데 있어 믿음을 두 부류 왼편(율법)과 오른편(복음)으로 나눠서 일관성 있게 초지 일관 말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 가라지와 알곡 =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 = 악한 종과 착한 종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 염소와 양 =율법의 종과 복음의 종= 왼편 강도와 오른편 강도 =거듭나지 않는 사람과 거듭난 사람 = 성령 받지 않는 사람과 성령 받는 사람 =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 = 죄인과 의인= 에서와 야곱 ==> 영벌과 영생
따라서 여기 마25장 비유도 4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천국 비유중 같은 비유 연장선에서 하나로 일관되게 보고 동일하게 해석 되어야지 결코 양과 염소의 비유만 가지고 마지막 심판의 비유라고 따로 놓고 해석하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모든 비유 말씀을 종합적으로 가름하여 모든 비유에서 말씀을 하시고자 하셨던 최종적 의미를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성경은 인류 역사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내면을 새롭게 고치고 영생의 삶인 예수의 삶을 살도록 보여주는 구속의 역사이야기로 기록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단순히 창세기를 지나간 과거 역사나 계시록을 우리가 죽고 난후 미래의 가상 세계에 일어날 이야기로 읽지 말고 지금 내 현실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할 나의 내면을 고쳐 영생을 얻기 위한 말씀으로 손으로 만진바 되도록 읽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많은 천국 비유들은 우리가 죽고 나서 우리들로 알지 못하는 먼 훗날 예수님의 재림 때 발생할 일들을 말한 비유가 아니고 현재에 내가 숨이 붙어 있을 때 일어나야 할 현재적 재림을 말씀하는 것임을 반드시 명심하여 염두하고 읽고 보아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현재 나에게 임하여할 현재적 재림으로 읽지 않고 먼 훗날 막연한 미래 재림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현재 자신의 죄 된 삶을 고칠려고 하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를 받지 않겠다는 것으로 봅니다
성경은 현재 내가 살아 있을 때 성령으로 거듭나 옛 사람이 죽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 사람이 되어라고 합니다 때문에 그렇게 되기 위하여 예수께서 현재 내 마음 안에 성령으로 지금 재림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경은 지금 구원을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니 은혜를 받아라고 현재형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현재 구원을 받고 살라고 , 오늘 구원을 받고 , 지금을 살라고 쓰여졌습니다
고후6;3 >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로다
무엇보다도 제가 기가 막힌 것은 삼층천을 경험하고 갔다 온 바울도 무익하다고 잠잠하였는데 자신들은 가보지도 않고 또 잘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천상 세계를 놓고 뭔가 비밀을 발견한 냥 뭐가 어떻네 저쪗네 추론으로 열을 내며 논쟁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최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되어 그 사람 말이 99% 맞고 1% 틀리거나 반대로 99% 틀리고 1% 맞아도 어차피 틀린 것은 도토리 키재기로 매 한가지 아니겟습니까
왜냐면 죽고 난 다음에는 자연히 100 % 알게 될 것인데 아직 육체가 죽지 않아 자기들도100% 완전하게 알지도 못한 천상의 세계를 놓고 서로 옳다고 하나님이 되어 눈에 쌍심지 켜고 핏대를 세워 콩팔 짓팔하며 여기에 헛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런 모습들을 보며 그럴 것 같아요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들은 오늘 현재의 일도 한치 앞도 못 보면서 미래의 일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느냐고 내가 언제 너희들의 죽고 난 다음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성경에 써 놓았냐고 말입니다
너희들은 왜 구원과 영생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너희들의 죽고 나서의 일에 신경을 쓰며 세월을 낭비하느냐고 차라리 그런 시간 있으면 밖에 나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과거도 미래도 생각 말고 단지 현재로 살라고 혀를 차실 것 같습니다
때문에 사도 요한과 베드로 사도가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도 말고 모르면 모르는데로 그냥 넘어가라고 괜히 성경을 추측으로 사사로히 풀다가 자기도 모르게 멸망 길로 간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카폐에서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제가 마10장은 전도의 장으로 인자가 이스라엘 모든 땅을 다 돌아 다니지 않아서 온다는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제자들이 죽고 난 다음 먼 훗날 미래에 비밀 정부를 만들겠다는 말씀이라고 우김질 하여서 참으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인 것 같지만 어딘가 성경과 모순된다는 것을 아예 찾을려고 생각하질 않고 무조건 그 사람들이 한 말을 옳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자기가 깨달은 양 다른 사람에게 지식 자랑으로 그냥 써 먹으며 대책없이 우김질 한 모습을 봅니다
때문에 주님은 말씀합니다 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가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넓은 길로도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씁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가고 있는 길이 사실은 영생의 길이 아니고 멸망의 길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잠16:25 >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한번 생각을 곰곰이 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여기 마10장 말씀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너희들이 죽은 다음 2000년이 지나고 먼 훗날에 너희를 위하여 비밀 정부를 만들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인자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들은 4 복음서 마다 말씀하고 있으며 계시록에서도 나오는데 이 모든 말씀들이 인자되신 예수님의 먼 훗날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형으로 속히 오신다고 현재의 재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속히 오신다는 예수께서 2000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으니 먼훗날 미래적으로 계시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변명하지 말고 현재에 과녁을 맞춰 재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우리 죄인들의 현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하여 나의 내면을 고쳐 지금 구원을 , 생명을 얻도록 현재형으로 기록된 책이지 우리가 죽고 난 다음 일에 대하여 미래형으로 구원을 얻도록 기록된 책이 결코 아님을 다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노파심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렇게 생명을 얻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금 ”생명을 얻게 하려함“ 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20:31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들도 아다시피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하여 생명을 얻지 않는 사람은 현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지 자기가 죽으면 분명하게 알게 될 일을 가지고 죽고 난 미래 천상 세계에서의 구원에 관심을 두면 어쩌자는 것이겠습니까
왜냐면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이 계신 그 문 지방 너머의 세계에 당연히 들어가서 보게 되고 알게 되기 때문에 구지 자신도 잘 모르는 천상 세계를 두고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함부로 단정을 지어 이러쿵 저러쿵 경솔하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들었던 지식들을 자기 추론으로 짜깁기 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계시록을 들먹거리며 현재 논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 말 필요 없이 결국 자기를 알아 달라고 허튼 지식 자랑 할려는 것밖에 없다고 저는 봅니다
따라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기 생전에 지금 일어날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자기 상상과 추측으로 이럴 것이다 하며 백번을 말하여도 그 지식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 지식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생은 자기가 들었던 지식으로 지식 구원이나 자기 신념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보다 앞서 가신 믿음의 선진들이 임종을 할 때에 유언은 모두 하나 같이 먼 미래의 장래 일을 두고 말하지 않고 현재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를 믿고 예수 생명을 얻어 하나님 뜻대로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유언하며 돌아 가셨습니다
때문에 여기 양과 염소의 비유도 천국 비유로 즉 하나님 나라가 자신에게 속히 빠른 시간에 어떻게 임하여 이루어지는지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야할 영생에 일들에 대하여 기록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만큼 할 말이 많은 중요한 비유라는 것이겟지요
어쨌든 본론의 영생은 세상에 살면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주므로 의인이 되고 자기 공로를 쌓아 영생을 얻는 행위 구원을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본문 말씀을 다분히 문자적으로 인본주의로만 읽지 말고 영적으로 병행하여 읽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약에 본문을 문자대로만 읽고 본다면 이 세상에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어 지극히 작은 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 자인지 분명한 기준이 없이 막연하기에 영생을 얻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하여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3:36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5;12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 혹 어떤 사람은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위에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이나 배고프다고 밥 달라는 거지를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냐고 항변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말씀 드립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콩 한쪽이라도 나누며 사는 것은 인지상정으로써 그것은 영생의 문제보다는 윤리 도덕적 문제로 인간으로써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주위에 그런 분들이 당신의 눈에 뜨인다면 도울 수 있는 만큼 범사에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받을 기회의 자리를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잊지 않고 갑절로 되갚아주실 것입니다
잠19:17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 때문에 자기 부모를 돌보지 않고 핑계되는 바리새인들에게 고르반하지 말라고 하였고 자기 형제들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나쁘다고 말씀합니다
어쨋든 본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내가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너희들이 나를 영접하고 돌아 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는 양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우리들이 어느 때에 주님에게 그랬다고 합니까 자기들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놀라며 솔직하게 말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영생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오른편 양들이 하였던 것처럼 주님인 자신에게 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들은 어느 때에 주님에게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까 섭섭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며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되려 억울하다고 따지며 항의하는 억울해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영벌에 들어가라고 하며 예수 자신을 두고 여러 호칭으로 예수님 = 인자 = 목자 = 임금 = 주= 지극히 작은 자“로 말씀 합니다
본문 말씀을 게시글로 올리며 제가 오래전 신앙 초기에 감리교 신자였던 원종수 권사가 간증으로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된 “”너는 내것이라“”책에서 제가 감동 받았던 그 일부 내용을 발췌 합니다
원종수 박사는 1951년 생으로 6살 때 아버지 죽음으로 찢어진 가난 속에서 어머니의 장돌배기 품팔이 도움으로 마침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전국 의사고시에도 수석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암 전문 병원을 운영하며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로 해외 의료선교사로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너는 내 것이라” 간증 책(87페이지 주께서 응답하셨도다)에 나온 원문 그대로 올려 봅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새벽기도에 다녀 오시면서 어떤 장님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셨다 1968년 1월의 매우 추운 어느 날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교회 가는 길목에 떨고 앉아 계시던 분이었는데 어머니가 매일 그 앞을 지나시면서 망설이시다가 그 날은 너무 추우니까 얼어 죽으실 것 같아서 지팡이를 잡고 무조건 데려오셨던 것이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어머니께 처음으로 화를 냈다 “ 지금 우리 처지에 그 거지 할아버지를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사실 너무 불만스러웠다
어머니는 나에게 할아버지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라고 하셨다 그 추운 겨울 아침 이불 속에서 얼굴만 내밀고 말을 해도 방안 공기가 너무 추워서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판에 목욕탕은 물론 없었다
사람 혼자 앉을만한 조그만 아랫목마저 할아버지에게 뺏기게 되었다 물 데워 줄 떼니 할아버지를 씻기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종했다 어머니는 엄숙하게 이 할아버지를 잘 섬기라고 하셨다
내가 입으려던 한 벌밖에 없는 속옷을 드리고 그 더러운 몸을 씻겨 드리면서 솔직히 내 마음에 기쁨은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그 더러운 옷과 몸에 손대기 싫어서 나뭇가지를 가지고 옷을 벗기기도 하고 막 구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주일이 지났다
나는 내 삶 속에서 영원히 그 할아버지의 모습은 잊혀진 줄 알았다. 1986년 어느날 미시간 대학에서 나를 초청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으로서 한국 유학생 집회에 설교를 부탁해 왔다 간증 집회는 아니었다 학생들이 모여 있는 큰 홀에서 나는 우측 뒤에 앉아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 학생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 그때 문득 스쳐가는 장면들과 너는 이것을 애기하라 하셨다
필림처럼 다섯 장면을 보여 주실 때 거지 할아버지는 그 중에 제일 첫 장면이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더럽고 이가 끊는 옷을 억지로 벗기면서 구박하던 모습이 보이면서......
“ 종수야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 필림의 할아버지 장면에서 나뭇가지로 거칠게 옷을 벗길 때 할아버지의 찡그리고 괴로워하시던 모습이 보였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또 음성이 들렸다
“ 종수야 내가 배고프고 춥고 떨고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모습으로 성경 찬 송을 들고 새벽 기도하러 교회로 내 옆을 지나서 가더구나 그중에서 dkaneg 나를 아는 척도 안 했고 가끔 어떤 이들은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 주고 갔었지
그들 마음속에 누구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 어떤 기쁨이 있었는지 알 수 없구나 그들의 손에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으나 내가 춥고 배고플 때 나를 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구나
그렇지만 네 어미 과부댁이 어제 저녁도 죽이 모자라서 자식들에게 한 숟가락 더 먹이고 , 금식이 아닌 굶식을 밥 먹듯 했던 네 어머니가 내 지팡이를 잡고 너희들의 방으로 나를 인도하였구나 그때 나는 너의 집이 궁궐 같았고 가나안 같았다
푸른 초장이고 봄날 같았다 그때 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 너의 가정에 배고픔이 없게 해주마 “
예수님 감사합니다 부족했던 이 죄인 용서해 주세요 그 할아버지를 모른척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에도 원종수 권사님의 여러 놀라운 간증은 계속됩니다
관심 잇는 분들은 한번 간증 테이프나 책을 찾으셔서 읽어 보시면 유익하리라 봅니다 (아싑게도 30년전 간증집이라 절판되었을 것입니다 )
제가 원 권사님의 간증 글을 올리면서 자칫 행위 구원으로 비칠까 한편 염려도 되지만 한편으론 예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않는 자가 되지 말고 사랑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앗음 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믿음에는 당연히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하며 만약에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에는 믿는 행함이 바늘과 실처럼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까 아니면 믿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가 마땅히 따라야 합니까
만약에 믿기 때문에 당연히 행위를 해야 한다면 각 사람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행위가 나올 것이므로 만약에 믿음이 약하거나 믿지 않으면 행위를 하지 않아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요상한 말도 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 시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행위와 행함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행위와 행함은 문자적 , 영적 이중계시로 말씀하고 잇습니다
행위와 행함은 비슷한 단어 같아도 성경적으로 보면 행위 주체가 완전히 바뀐 상태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위“는 헬라어 ” 에르곤“ 단수로 < 내가 하는 것>으로 나오며 행함”은 “에르가” 복수로 <주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지 먼저 구절을 보겠습니다
갈2: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르곤”)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암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약2:17-18 > 이와 같이 행함(“에르가”) 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에르가)이 있으니 행함(”에르곤)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에르곤)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이렇게 놓고 볼 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인 “ 에르곤”은 예수님의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멍에를 메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힘으로 믿고 자기가 만들어 낸 믿음의 힘으로 행하는 단순히 자기 스스로의 율법의 행위를 말하며 이것을 두고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마음의 변화됨이 없이 타고난 생명 그 자체로 율법의 행위로 일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 그 행위 자체로 구원을 얻을려는 육의 행위 구원을 뜻한다고 보면 될 것 입니다 ( 내가 했다고 자랑이 나오며 거기에 따른 댓가를 바랍니다)
반면에 “에르가”는 율법의 반대 개념인 복음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일하는 것으로 이것은 주님의 생명으로 마음이 새롭게 바뀐 영의 몸이 되어 그 몸 자체로 자연스럽게 성령의 감동으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열매가 맺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댓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의 행위란 믿는다고 하지만 거듭나기 전 예수 생명 없이 자신의 본능적 타고난 겉 사람인 육의 생명으로 율법의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의 마음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은 됐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목적을 두고 사적인 생각과 감정과 뜻에 따라 수시로 외식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뜻 합니다
갈6:3 >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반면에 믿음의 행함이란 믿고 거듭난 후 예수 생명으로 바뀌어 속 사람인 영의 생명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되어진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 속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행동을 말 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한다는 행함이 있는 믿음 입니다 그래서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야고보서는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약2:15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뒤에 양과 염소의 이야기 속에 나올 것입니다
어쨌든 이 비유 말씀을 대부분 지금까지 왜곡되게 가르쳐 왔고 왜곡 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6섯 부류 사람들 중에 누구에다 기준을 두어야 할지 모르고 그리고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평생을 하여야 하나 아니면 1-2년 햇다가 안하게 된다거나 쉬엇다 다시 한다던가 과연 얼마만큼 언제까지 하여야 하나 그 행위에 대한 범위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 정하여야 하는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만약에 마음의 변화 없이 본문 말씀과 같이 행위를 하게 된다면 사람에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에 여섯 부류 사람들 전부를 돌봐 주라는 말씀인지 아니면 한 사람이든지 두세 사람이든지 모르기에 난처합니다
때문에 이것은 이중 계시로 문자적으로도 당연히 보아야 하지만 영적으로도 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는 분이시며 구원의 문제는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가면을 쓰고 겉으로 웃으며 한두 번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개떡같이 믿고 개떡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어쩌다 성령의 감동으로 교회 일로 좋은 말 좋은 일을 하면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너희가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책망한 것을 봅니다
마12:34 >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어쨌든 본문에 나온 지극히 작은 자 부류의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만 보면 하나같이 먹을 것 마실 것이 없는 거지, 자기 집이 없는 떠돌이 집시 나그네, 옷이 없어 헐벗은 노숙자, 병이 들엇는데 돈이 없어 고치지 못한 행려병 자,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두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영생에 들어간 양들은 이런 작은 자들을 도와주고 돌보아 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영적으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10:42 >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원어에 보면 냉수라는 말은 없고 그릇은 <잔>으로 나옵니다 예수께서 마20장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겠느냐 물엇던 < 잔 >으로 냉수처럼 차가운 십자가의 고난의 잔입니다
누구든지 이 작은 자 하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고난의 냉수 잔을 마시게 하고 예수와 함께 죽음에 넘겨지도록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준 그 한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중에 신학 박사든 , 목회자든 ,장로든 , 권사든 집사든 , 저 포함 모든 분들에게 한번 물어 봅니다
내가 길거리에 먹을 것 마실 것이 없는 거지나 집도 없이 나그네처럼 떠도는 부랑자들 입을 옷도 없이 추위에 떨고 잇는 헐벗은 노숙자나, 병들어 병원에 있거나 길 거리에 누워있는 자를 찾아 보거나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찾아 사식을 넣어 주며 구제를 한번이라도 해 본적이 있었나
여러분들 중에 과연 몇 분이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인 여섯 부류 사람들을 예수 믿은 후 도와 주엇습니까 그리고 현재도 그런 자들을 찾아 다니며 선행을 하고 계십니까
자기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무심코 지나가거나 바빠서 지나가거나 돈이 아까워서 지나가거나 어쨌든 모두 다 그물코에 걸리게 되있습니다
과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영생의 기준이 된다면 이 말씀에 미치지 못하고 자기 생전에 몇 번이라도 작은 자를 찾아 돌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만약에 거지나 노숙자는 돌봤는데 병든 자를 찾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어떻고 반면에 병든 자를 돌봤는데 감옥에 가서 죄수들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에 자기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혀 내 코도 석자여서 남을 도와줄 능력이 없어 돌봐주기는 커녕 오히려 내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게 한 번 진지하게 물어 봐야 합니다 과연 내가 말씀과 같이 현재 이 조건에 부합된 인물이 되어 양으로 오른편에 있는 자인가
예수께서 말씀에 나온대로 모두 다 지킨 사람만이 양이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염소라고 심판한다면 과연 이런 심판의 기준에 부합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으며 이것이 과연 주님의 올바른 심판의 기준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참 진리는 내가 부할 때나 가난 할 때나 병 들었을 때나 병이 들지 않았을 때나 언제 어느 때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서 누구에게나 항상 동일하여야 그것이 진리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결론적으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를 연상케 합니다
따라서 여기 본문의 천국비유도 예수의 십자가를 염두하면서 해석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에 대하여는 제가 게시글로 일찌기 미흡하나마 가상칠언으로 올린바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어쨌든 본문에 나오는 배고픔, 목마름, 나그네됨, 헐벗음, 병듬, 옥에 갇힘, 이것들은 이중 계시로 영적 ,육적 증상들 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로 자신을 배고픈 자로 , 자신을 목 마른자로 , 자신을 나그네로, 자신을 옷이 없는 헐벗은 자로 , 병든 자로, 옥에 갇힌 자로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헬라어 (엘라키스토스=제일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것이 없는 최하의)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 )라 했으며 모든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15:9 )라 고백하였던 것을 봅니다
어쨋든 저는 육적인 면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니 나두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까 합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떠나온 인생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자기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외적 현상을 비유로 삼아 예수님은 영생에 관하여 여섯 가지 영적 상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본문에 입각하여 왜 예수께서 자신을 작은 자라고 하시는지 시간이 가도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하여 (1)-(13)으로 구분하여 하나 하나 살펴 보겠으니 들을 분만 들으십시요................이어서
첫댓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에 대하여 기억하는 무리와 기억하지 못하는 무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선한 행위와 믿음의 관계는?
이것을 잘 이해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자가 예수님인것을 공감하며
오늘,지금,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주님과 행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