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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3: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23: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3:29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23:30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
◈ 주해
1.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는 요시야는 전무후무한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1) 심판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옷을 찢고 겸비하여 통곡한 그는 하나님이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갱신한다.
2) 요시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을 갱신하고, 마음을 다하여 언약의 말씀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한다.
2. 그 후에 예루살렘 성전 개혁을 시작으로 해서 지방 산당들 제거, 모든 우상 제거, 북이스라엘의 우상과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까지 제거한다.
1) 요시야는 솔로몬부터 므낫세까지 만든 남 유다의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여로보암부터 형성된 북이스라엘의 모든 우상과 유사신앙을 제거한다.
2)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여로보암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 요시야가 이 제단을 허물 것, 곧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3)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 안에서 요시야가 마음을 다하여 우상을 허문 것이다.
3.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생명의 교제”다.
1) 언약관계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우상숭배다. 언약관계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인데, 우상숭배는 우상과 연합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우상제거는 언약관계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제거한 요시야는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게 한다.
왕하 23: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3: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3) 요시야의 증조부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켰다(대하 30:1-27). 요시야는 사사시대 이후 가장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키게 한 것이다(대하 35:18)
4. 요시야가 행하는 개혁은 모두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이다.
1) 그는 사사기 이후로 가장 온전한 유월절을 지켜,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게 한다.
2)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한다.
5.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그 모든 이유의 중심에 “여호와를 위하여”가 있다.
1) 언약을 갱신하고, 우상을 척결하고, 유월절을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를 위하여,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가 중심이 되면 그 신앙은 또 하나의 우상이 된다.
2) 신앙의 중심은 “여호와를 위하여”여야 한다.
3)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이것을 “소요리 문답 1문”으로 채택하였다.
-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4) 여호와를 위한 신앙,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안에 “우리를 위한 은혜”가 있다.
6. 개혁주의 자들은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 온전한 종교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계속해서 추가적인 개혁을 한다.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7.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의 삶에 대하여 최고 최대의 칭찬을 한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1) 요시야는 이스라엘 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한 왕으로 평가된다.
2)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쉐마에 나타난 구절로(신 6:4-5), 이러한 평가를 받은 사람은 모세뿐이었다(신 34:10).
8.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심판은 돌이켜지지 않는다.
1) 여호와는 유다에게 쏟으시려던 그 불타는 진노를 거두어들이시지는 않으신다. 이는 므낫세가 주님을 너무나도 격노하시게 하였기 때문이다(26절).
2) 그가 선택한 도성 예루살렘과 그의 이름을 두겠다고 말한 성전조차도 버리신다(27절).
9. 모세처럼 전무후무하게 말씀을 순종했던 요시야는 애굽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 애굽의 바로 느고 왕이 앗수르 왕을 치려고 므깃도를 지나려고 하자, 요시야는 그를 맞아 싸웠고, 느고에게 죽고 만다(29절).
2)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이 때부터 급격하게 예루살렘은 멸망의 길로 간다.
10. 모세처럼 말씀에 순종하고, 다윗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던 요시야가 “어디를 가든지 이기거나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그의 온전한 헌신이 헛된 것처럼 보인다.
1) 믿음으로 행하였으나, 헛된 죽음으로 보였던 첫 인물은 ‘아벨’이다.
2) 아벨은 ‘허무, 헛됨’이라는 뜻이 있다. 외적으로 보면 그는 헛된 인생을 살았다.
3) 그러나 그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고, 영원하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4) 보혈이 아벨의 피보다 낫다. 감히 하나님의 피에 비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아벨의 순교는 영원에 참여한 가장 존귀한 일이다.
11. 사도들의 순교와 모든 위대한 순교자들은 ‘요시야’와 같은 길을 갔다.
1) 그들의 믿음과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역사는 너무나 존귀한데, 그들은 비참하거나, 무력하거나, 헛되이 죽임을 당하는 것 같다.
2) 사도행전의 대표적인 순교자는 야고보와 스데반이다.
3) 정작 스데반은 자신의 순교를 헛되게 여기지 않고, 보좌에 서신 주님을 보고 천사와 같은 얼굴로 순교하였다.
12. 어디에서 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요시야와 순교자의 삶은 참으로 헛되다.
- 저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했는데, 그 헌신의 결과가 모두 무위로 돌아간 것 같고,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것 같다.
2) 그러나 영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요시야와 순교자의 삶은 참으로 존귀하다.
3) 그는 결코 헛되지 않은 영원한 일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칭찬을 받는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13. 예수님의 십자가를 ‘순교’라고 할 수는 없다.
1) 그렇지만 부활이 있기 전,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만 보면 마치 순교자의 길, 요시야의 길을 가는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2) 제자들이 보기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자, 메시야가 헛되이 죽는 것으로만 보였다.
3) 그러나 영원에서 하늘 아버지가 보는 십자가는 가장 영광스러우며, 가장 존귀하며, 영원한 사건이며, 승리의 역사다.
14.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악하였으나 최전성기를 누리면서 번성하고 형통하였고, 남유다의 요시야는 전무후무하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으나 전쟁터에서 죽는다.
1)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대하 35:24).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의 전사를 애도하는 애가를 지어 백성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대하 35:25).
2) 육신으로는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존귀한 삶이다.
3) 영화 쿼바디스도 이런 내용이 있다. 교회 지도자 베드로는 도망하여 살아서 교회를 돌보는 길보다는 주님을 만난 후 도리어 로마로 돌아가서 순교한다.
◈ 나의 묵상
사실을 기록하지만, 나는 왜 요시야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영원한 일, 주의 일임을 강조하고 싶은지를 돌아본다. 성경을 읽자마자 “왜”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은 왜 므낫세같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원흉에게는 55년간 장수하며 왕노릇하게 하시고, 전무후무하게 말씀에 순종한 요시야는 전쟁터에서 헛되게 죽게 하실까? 그가 모든 재앙을 보지 않고 죽는다는 것이 요시야에게 무슨 위로가 된단 말인가?라는 불만이 있다.
스데반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보좌의 주님을 보면서 영원에 있다가 영원에 들어갔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스데반을 지켜주지 않은 하나님께 불만이 있는 형국이다. 하나님도 스데반도 괜찮은데, 구경하는 내가 왜 불만인가? 그것은 내가 스데반처럼 요시야처럼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도록 헌신하고 팽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영원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한시적인 이 땅의 관점과 육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보란듯한 결과와 그 열매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최고다. 그러나 영원에서 보면 순교자들이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럽다.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그리고 후스와 같이 순교한 개혁자들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참된 개혁은 영원을 살고, 영원에서 보아야만 가능하다. 영원을 살지 못하고 외적인 것만 바꾼다면 참된 개혁이 되지 못한다. 내 안에 내 신앙을 개혁할 힘이 없고, 교회를 개혁할 믿음이 없음이 탄로 난다. 영원에서 보지 못하고, 헛된 것을 주목하니 참된 개혁을 하지 못한다. 바른 신학, 바른 목회를 추구하고 실행하나, 중심은 우상이 가득하다. 의지적으로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를 선택하고 실행할지라도 내 마음의 중심, 마음의 우상, 자아사랑과 보호를 어찌하지 못한다. 마음의 우상을 먼저 깨뜨려야 외적인 우상을 깨뜨릴 수 있는데 말이다.
내 마음의 우상, 지극한 자아사랑과 보호, 자기합리화와 핑계, 자기 주장을 가지고 십자가로 나아간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기에 예수님은 나를 품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하여 나의 옛사람과 육신에 속한 자기주장의지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부활의 주님이 사신다. 성령으로 이 진리, 변함없는 영원한 진리를 밝히 보길 원한다. 마음의 우상이 모두 깨뜨려지고 부활의 주만이 통치하길 원한다.
내 마음이 어떠할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와 하나님이며, 내 삶의 주권자요 은혜의 하나님이요, 나를 이끌어가시는 목자이시다. 내 영혼과 마음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린다. 토기장이처럼 나를 빚으시는 주권자 주님이시다. 육신에 속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 영생을 얻고, 영원한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신 그 은혜를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진리가 제 마음의 생각과 가치관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순교자의 신앙, 요시야의 신앙이 영원하고 가장 존귀하며 행복한 것을 진리로는 아나, 육신은 이를 거부하고 보란듯하고 당장 편함과 행복감을 추구합니다. 부활신앙과 마라나타 신앙으로 영원을 살며, 영원에서 보며, 영원한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옵소서. 전도자가 말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일, 창조주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십자가로 저의 영을 구원하시고, 저의 혼에 평안을 주시고, 저의 몸의 치유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음을 믿음으로, 저의 영과 혼과 몸이 주의 사랑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자족하며 평안하게 하옵소서. 요시야의 믿음, 순교자의 믿음으로 저를 이끄소서. 하나님이 보는 그것을 저도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성령으로만 주와 제가 연합됨을 아오니, 성령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여 주십시오. 한 주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마음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