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blog.naver.com/chwndus1/221815711640
봉준호가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을 때 옆을 지켰던 최성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상식 시즌의 MVP가 돼있었다. 단정한 검정 옷을 입고 공책을 옆구리에 낀 차분한 영화감독 지망생은 할리우드의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봉 감독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최성재는 몇 백 개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후 Variety 잡지사에게 독점적으로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 이야기는 4월 한 전화 통화로 시작해, 2주 전 돌비 극장에서 베스트 촬영상으로 끝난 10달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침묵 속에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내 눈은 그 역사적인 밤 나눴던 눈물의 작별 인사 때문에 아직 부어있다.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고도 노래방은 가지 않았던 놀라운 그날 말이다. 이미 잠에 들기란 글렀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보러 해변에 나갔다― "기생충"의 이 어마어마한 수상이 해를 서쪽에서 뜨게 할 수도 있으니까. 수평선에 걸린 해 대신 전날 밤 내린 비가 남겨둔 회색 붓 자국으로 흐릿해진 달을 바라봤다. 비는 우리가 오스카 시상식으로 가는 길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긴장 속에서 진정하려 하고 있을 때 비는 버스를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결국 "기생충"은 비에 대한 영화니까.
지난 6개월간을 돌아보면 새로운 도시들, 마이크와 좋은 소식들, 그리고 목소리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문한 꿀 레몬 차 주문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특별한 영화를 봤다는 흥분에 눈이 빛나고 있는 관중들과 한 명 한 명 악수를 했다. 내가 대학 때 무비 나이트 행사 주제로 기획했던 감독과 지금 손 세정제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혼자 문득 돌이켜 볼 때면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내 이름으로 된 마이크로-단편 영화 하나만 가진 상태로 나는 할리우드의 심장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이 미친듯한 여정이 끝나고 올 멜랑꼴리함에 대비하기 위해 1월엔 바다 근처에 살려고 한다.
2019년 4월, 나는 봉준호 전화 인터뷰를 통역해달라는 긴급한 메일을 받았다. 난 밤새 쭈그려 파일럿 스크립트를 보느라고 다음날 인터뷰를 놓쳐버렸다. 난 전문가 기질을 이끌어 내 머리 속 느낌표들을 지웠고, "저는 추후 있을 통역 요청도 받을 수 있으니 알려주세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몇 일 후, 다른 전화 통역 요청이 왔고, 나는 내 책상에 내 가장 좋아하는 노트패드와 펜을 가지고 앉아서 내 과민성 방광이 가만히 있어주기를 빌었다. 이전까지 내 통역 경험은 합산해봤자 일주일 정도였고 대부분이 이창동 감독의 명작 "버닝" 작업이었다. 그래서 내가 봉 감독 전화 통역에서 되게 쉬운 레퍼런스 영화를 놓쳤을 때, 화장실 안에서 긴장할 이 기회는 다른 통역사에게 가겠구나 했다.
"통역은 신성하다", 봉 감독은 "옥자" 때 스티브 연 통역과 일하며 이렇게 선언한 적 있다. 그러니 내가 칸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땐 온 하늘이 도운 것 같았다. 마침 나는 휴가 차 프랑스 남부에 페스티벌을 보러 갈려던 참이었다. 내가 한국의 첫 황금종려상을 보고 오는 길에 비즈니스 용품들을 가득 담은 백팩을 끌고 다닐 줄 알았다면, 나는 기내수화물만 가능한 비행기편과 8명짜리 호스텔 방을 예약하지 않았을 텐데.
칸에서 영화가 초연됐던 뤼미에르 대극장에는 분명한 전율이 흘렀다. 내 고향에 대한 영화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감동스러웠다. 어린 시절 미국에 있었던 2년의 시간은 나를 이상한 하이브리드―미국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한국인이고 한국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국인이며 그렇다고 한국계 미국인도 아닌―로 만들었다. 이후에 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영어 실력을 유지했지만, 대학을 다니려 L.A에 왔을 땐 여전히 "뭐 하고 사냐?(What's Up?)"와 같은 캐주얼한 인사엔 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절반의 문화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과 타협했다. 마찬가지로 두 가지 문화를 한 영화에 담아내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큰 노력 없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은 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원래 내가 영미 언론 통역을 위해 필요한 기간은 이틀이었다. 그러나 정신 차려보니 나는 수상작 리스트에 "기생충" 남을 때까지 긴장에 땀을 흘리며 폐막식 백스테이지에 있었다.
올해의 나머지는 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사실, 통역할 때는 추억에 잠길 시간 같은 건 없다. 통역은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에 관한 것이고 다음 순간을 위해 현재는 지워버려야 한다. 통역하는 동안 불면증을 달래고 동양과 서양 문화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내 삶의 영화들, 그리고 봉 감독의 명확한 언어에 의지해야 했다. 그의 사려 깊음으로 내 역할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대학 때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영화감독이자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언어에 익숙해졌던 경험은 통역에 도움이 됐다. 아직도 난 내가 자라며 존경했던 인물의 말을 잘못 옮길까 불안한 마음에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무대 공포증에 유일한 치료책은 백스테이지에서의 10초 동안의 명상과, 내가 '그들이 보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뿐이었다. 내가 영화만큼 좋아하는 매체는 없지만, 나는 어디서 들은 프랑스 홍보담당자가 그의 스트레스 받은 동료들에게 소리친 말 "이건 영화일 뿐이야!"(It's just cinema!)을 내 자신에게 계속 반복해야 했다.
이 여행은 그저 영광이었다. 나는 코미디 듀오로 변모한 봉 감독과 송강호를 보고 엄청나게 웃는 관객들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고, 미국 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앙상블 상을 탄 "기생충" 배우진들에게 기립 박수가 쏟아지는 것, 봉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에게 헌사를 바쳤을 때 관객이 뿜어냈던 금빛 기운을 볼 수 있었다. 내 영웅들도 만났다. 피버 월러브리지(Phoebe Waller-Bridge)-[*플리백 각본/주연]에게 내가 섹시한 신부님을 크리스마스 소원으로 빌었는데 새해 첫날에 "The Wall"을 보고 울며 내 소원이 성취됐음을 말했줬다. 나는 셀린 시아마(Celine Sciamma)[*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와 새벽 4시까지 타코벨에 있었다. 사랑과 인간의 취약함을 찬양하며 말이다. 다양성과 스토리에 대해 루루 왕(Lulu Wang)[*페어웰 감독]과 레스토랑 클로징 타임 음악이 나올 때까지 떠들기도 했다. 존 카메론 미첼[*헤드윅 감독]에게 당신의 영화로 인해 영화를 하고 싶었음을 고백했고 봉 감독은 내가 그 순간 얼마나 그에게 반해있었는지 놀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짜 선물이 됐던 것은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매일 봤던 팀 멤버들, 아티스트들과 나눴던 사적인 대화들과 일대일 관계들이다.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은 이 사람들과 다시 일할 수 있게 노력하는 데 쓸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칸이 끝나고 텔루라이드(오스카)[*어워드 시즌을 여는 영화제]를 가기 전 나는 좋은 스텝진으로 구성됐다는 것 외엔 영화 현장에 존재하는 보통의 문제를 모두 가지고 있는 친구 졸업 영화 현장에서 절망에 빠져있었다. 우리가 촬영 장소로 점지어둔 화장실이 아침에 공사에 들어가자 결국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첫 번째 AD으로서 난 아픈 PA를 로케이션 헌팅을 하라고 보내야 했다. 촬영을 마치고 3일 후, 나는 오스카 캠페인을 시작하기 위해 텔루라이드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학생영화와 영화 산업의 기압 차가 너무 커 산소 탱크가 필요할 정도였다. 내가 일부가 돼서 누렸던 멋진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리가 아직 학생 세트장이라고 느낀다―작고 진심 어린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한 투쟁 한가운데에 있는 곳. 나는 아직 영화감독으로서 내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이틀이 있다: 봉 감독의 연출적 눈을 엿봤던 날이다. New York 매거진은 L.A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ld Wright)의 할리호크 하우스에서 인터뷰를 잡았다. 그 곳은 캘리포니아에 바치는 헌사 같은 공간이다. 봉 감독이 그 공간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마치 카메라, 공간, 캐릭터 삼위일체에 대한 마스터클래스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공유하는 데에 어려움을 들이지 않았고 그 스킬은 조여정이 나오는 W 매거진 커버사진을 연출할 때 더욱 두드러졌다. 그의 빨랐고 또 신중했다. 그리고 유머스러웠고 위트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내게 영감을 줬고 많은 걸 가르쳐줬다. 수많은 다른 멋있는 아티스트들이 기생충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일했다. 나는 그들이 현장에서 일하는 걸 구경하고 필기할 수만 있다면 내 경험 중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있다.
언어를 이리저리 바꿔가는 작업은 내 직업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유일하게 아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나는 20년 동안 내 자신의 통역가였다. 2개 국어를 하는 아이를 연구하는 한 심리학자는 내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뇌 용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준 적 있다. ―1개 국어가 10,000 단어를 안다면, 2개 국어 사용자는 각 언어에서 5,000 단어씩만 안다는 거다. 삶을 살아가며 나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에 좌절했다. 이것이 내가 영화의 시각적 언어와 사랑에 빠진 이유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면의 언어를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비슷했지만, 원어와 비슷한 대응어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 심리학자는 언어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작업이 뇌에서 언어를 관할하는 영역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유연성을 조절하는 영역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생각의 유연성을 조절하는 것은 쓰면 쓸수록 스킬이 생기는 근육이다. 이 유연함이 "기생충"을 현재 있는 위치에 올려줬다. 사고의 유연함은 이해력과 공감력을 훈련시킨다. 공감능력은 서로 영원히 다른 "타인들" 사이의 간격을 좁혀준다. 이 작품은 이해와 공감의 이야기다. 좀 덜 외로워지기에 나는 스토리 텔러가 되고 싶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건 시상식 특집 기사가 아니다. 이건 내가 아직 소화 중인, 언젠간 내 스토리들에 스며들 수 있는 깊은 내면의 경험이다. 나는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에 있는 조그마한 스토리 세트장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봉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의 진심 어린 말을 언급했듯,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니까.
내 얼굴이 소셜 미디어 피드에 올라와 있는 건 느낌이 너무 이상하다. 트윗들이 내 이름을 비아그라 광고 해시태그와 함께 묶어서 올라온 것을 보며 내 영광이 '15분 영광'에 그칠 것을 느낀다. 심지어 미용 광고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나에게도 돌려준 것은 감사하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2월 9일을 국정 기생충의 날로 지정해도 놀라지 않을 거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시간이 끝났을 때가 더 기대 된다. 내 이름이 달린 스팸 광고를 클릭했을 때 내 영화 이야기가 뜨는 순간 말이다.
이제 한동안은 나와 내 노트북 만의 시간이고, 나와 영화 언어 사이의 번역 작업 만이 내게 남아있다.
원문
https://variety.com/2020/film/news/parasite-bong-joon-ho-interpreter-oscars-sharon-choi-1203505571/
첫댓글 너무 좋음 ㅎ
이 분에겐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고 어쩌면 또 하나의 거장이 탄생할 자양분이 될 경험이었을수도
ㄷㄱ
샤론 최
오~ 글도 너무 잘쓴다. 대박
오호
샤론 최 버라이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