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것은 그 어떤 절대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특별한 권능을 지닌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하고 있다. “난다여, 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형상을 보지 말라. 사문(沙門)이 소유한 견해를 따르지도 말며, 사문에게 공경심을 내지도 말라.” 이와 같이 붓다는 자신조차도 맹신하거나 맹종하지 말고 각자 스스로 진리를 수행해 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자신은 예경의 대상도 아니며, 승단의 지도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붓다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팔리삼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定型句)이다. “비구들이여, 자기의 섬[自洲, attadīpa]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自歸依]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 dhammadīpa]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이 정형구는 불교의 특질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독일에서는 이 정형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무아론파(無我論派)와 초월적 유아론파(超越的 有我論派)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베를린의 정신과 의사였던 파울 달케(Paul Dalke,1865-1928)가 주장했고, 후자는 법관 출신이었던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1868-1945)이 주장했다. 파울 달케는 철저한 무아론자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이었고, 게오르그 그림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오온 이외에 초월적인 자아(自我)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팔리경전에서 발견되는 ‘attadīpa와 dhammadīpa’를 현재의 번역가들은 물론 과거의 중국 역경승들도 각자 달리 번역하였다. 팔리어 ‘dīpa’라는 단어가 등불(lamp)과 섬(island)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원문과 번역본들을 비교 검토해 본 결과 붓다는 섬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경전적 증거가 바로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과 주석서에서 ‘dīpa’는 피난처(tāna), 동굴(leṇa), 운명(gati), 목적지(parāyaṇa), 의지처(sara-ṇa) 등과 같은 동의어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번역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난아,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하고 법을 너 자신의 귀의처로 하라. 다른 누구도 너의 귀의처로 하지 말며, 다른 무엇도 너의 안식처로 하지 말라”며 붓다가 죽기 전 아난에게 했던 마지막 가르침은 절대불변의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야야지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아주 명백하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나약해 질 때,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은 본래 없다. 나(我)라고 하는 것도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며,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붓다가 ‘자귀의(自歸依)와 법귀의(法歸依)’의 법문을 설하게 된 배경은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였다. 이 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과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과 법을 섬이나 피난처, 구호소, 귀의처 등으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상응부경전에서 제시해 놓았다. 그것이 곧 사념처관(四念處觀, catusatipaṭṭhānas)이다. 이 사념처관(身․受․心․法)의 수행을 통해 스스로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