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은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삼성이 김 변호사의 명의를 도용한 차명계좌를 통해 수십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조성·관리해 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로써 그 동안 의혹으로 무성하게 떠돌던 ‘삼성 비자금’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 변호사의 주장에 대해 삼성 측은 임원 한 명의 개인적인 자금운영에 따른 것으로 삼성 측과는 관련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곧이곧대로 듣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다. 당장 ‘제3자의 자금 운영을 왜 굳이 보안계좌까지 개설해 김 변호사 계좌를 통해 운영해왔느냐?’는 지적에 대해 삼성측은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번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은 그 동안 소문으로 떠돌던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밝혀낼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삼성공화국’이라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이 이번 기회를 통해 낱낱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성이 관리해온 비자금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밝혀진다면 ‘정-경-검-언 유착’이라는 우리 사회의 추악한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따라서 언론들은 김 변호사가 ‘양심고백’한 내용과 그 증거물을 토대로 ‘삼성비자금’의 실체를 밝혀낼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지만 사제단의 기자회견이 있은 다음날인 30일, 한겨레만이 13건의 기사를 통해 다각도로 실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을 보였을 뿐 나머지 신문들은 각각 단 한 건 밖에 보도하지 않아 사건 초기부터 철저하게 무시하려 했다.
김 변호사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8년여 동안 삼성의 고위직 임원을 지낸 것은 물론, 그 이전 특수부 검사를 지내지면 ‘전두환 비자금’을 찾아내는 등 ‘특수 수사통’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전직이지만 ‘삼성의 핵심’이라 할 만하고, 비자금 등 ‘구린 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인물이 사제단을 통해 ‘양심고백’을 하고, 증거자료까지 제시했다면 신빙성을 가지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언론의 당연한 태도다.
그러나 한겨레를 제외한 신문들은 김 변호사의 주장과 삼성의 ‘반박’을 ‘공방’내지 ‘논란’ 수준으로 각 1건씩만 보도하는데 그쳐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심층적인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편집상 기사 배치나 기사 길이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드러낼 뿐이었다.
<표> ‘삼성 비자금 의혹’과 관련한 신문 보도량
경향 |
국민 |
동아 |
서울 |
세계 |
조선 |
중앙 |
한겨레 |
한국 | ||
10월 |
배치면 |
2면 |
8면 |
12면 |
2면 |
10면 |
12면 |
10면 |
1,3,4,5,6면,사설 |
7면 |
보도건수 |
1 |
1 |
1 |
1 |
1 |
1 |
1 |
13 |
1 | |
10월 |
배치면 |
사설 |
· |
· |
· |
· |
사설 |
· |
1,3,4면 |
· |
보도건수 |
1 |
0 |
0 |
0 |
0 |
1 |
0 |
5 |
0 |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각각 관련 기사를 2면에서 비중있게 보도한 반면, 조선·중앙·동아는 <삼성그룹 ‘차명계좌 비자금’ 논란>(동아), <“내 계좌에 비자금 50억 있었다”>(중앙), <前 삼성법무팀장 “삼성그룹이 내 계좌로 50억 비자금”/ 삼성그룹 “외부 제3자의 돈 밝혀져…회사와는 무관”>(동아) 등의 기사를 사회면인 10면과 12면에 배치해 단순 사건이나 공방형식으로 처리하는 데 머물렀다.
그나마 31일에는 한겨레, 경향, 조선을 제외한 모든 신문에서 ‘삼성 비자금’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은 사라지고 말았다. 경향은 사설 <삼성 비자금 의혹 검찰이 진실 밝혀야>에서 “차명계좌 개설은 그 자체로 금융실명제 위반”이라며 “누군가 범죄행위를 저지른 게 분명하고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라고 검찰의 철저한 진실 규명을 촉구했고, 조선은 사설 <삼성의 이상한 비자금 이야기>에서 삼성측의 해명은 석연치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적은 그동안 삼성의 태도를 돌이켜보면 하나마나한 지적과 마찬가지다. 삼성이 스스로 진실을 고백하기를 바라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가지는지, 그 내용이 가져올 파장은 뭔지에 대해 조선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대표기업다운 태도를 보여라’는 ‘충고’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 신문에 비하면 한겨레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한겨레는 기자회견이 있기 전인 27일 이미 김용철 변호사와 인터뷰했고, 이 내용과 사제단의 기자회견 내용 등을 토대로 30일 모두 13건의 기사에서 ‘삼성 비자금’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를 충실히 전달했으며 삼성과 우리은행의 반응과 입장, 향후 전망 등을 심층적으로 보도했다.
한겨레는 특히 <삼성 비자금 전모 밝힐 기회…검찰 의지에 달렸다>와 사설 <삼성 비자금 실체 철저히 규명해야>를 통해 “검찰의 수사 의지에 따라서는 삼성의 비자금 전체 규모가 드러날 수도 있다”, “검찰이 이번 기회에 삼성에 본격적인 수사의 칼을 들이댈지, 아니면 또다시 ’삼성에 약한 검찰‘의 모습을 보일지 지켜볼 대목이다”, “관건은 검찰의 의지다”고 지적하며 철저한 검찰 수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노력도 적극적이었다.
한겨레는 31일 거의 모든 언론이 이번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외면했을 때도 <검찰 “수사의뢰가 들어오면…” 이번에도 몸 사리나>를 통해 검찰의 소극적인 수사의지를 비판했다. 또 <“삼성, 2002년 대선자금도 비자금서 제공”>에서 ‘2002년 대선자금이 삼성의 회사 비자금에서 나왔고, 1997년 대선자금 역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새로운 주장을 상세히 전했다. 이 기사 또한 2003~2004년에 걸쳐 진행된 검찰의 ‘2002년 대선자금’ 수사가 ‘선거자금이 이 회장 개인돈에서 나온 것으로 종결됐다’며 김 변호사의 새로운 증언에 따라 이 회장을 ‘횡령·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수사가 다시 진행되어야 하는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삼성 비자금', '신정아-변양균 유착' 보다 '깜' 안되나?
이번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과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보도를 통해 우리 언론에게 ‘성역’으로 존재하는 삼성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깊은 자괴감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편법 경영권 승계를 위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논란,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는 순환출자 구조와 허술한 금산분리 등 삼성과 관련된 해묵은 논란은 물론, ‘삼성 SDI 불법 위치추적’과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 X-파일’ 의혹, 지난 해 ‘시사저널’ 외압에 이르기까지 삼성과 관련된 사안은 하나같이 대다수 언론의 외면 속에 잊혀 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골리앗’과 같은 삼성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대한 정당한 외침은 몇몇 ‘다윗’들의 외롭고 힘든 싸움으로 남겨졌다. 김갑수 씨 등 삼성 SDI 해고 노동자들이 그랬고, MBC 이상호 기자가 그랬으며, 전 ‘시사저널’ 기자들이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극소수 언론만이 이들의 외침과 양심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인가. 정녕 삼성은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철옹성과 같은 성역으로 남아야 하고, 김용철 변호사는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신정아-변양균 유착 사건’에 대해서는 신정아 씨의 핸드백과 티셔츠 브랜드까지 들춰내고 급기야 누드 사진까지 등장시키면서까지 지면을 도배했던 신문들이 ‘삼성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 약속이나 한 듯 외면하는 행태는 건전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번 ‘삼성 비자금’에 대해 검찰은 당연히 철저하게 수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검찰만 믿고 맡길 수 없다. 검찰 또한 언론 못지않게 삼성을 성역으로 여겨왔고, 벌써부터 ‘더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고 법적 처벌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면, 언론에게는 취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검찰의 수사만 촉구하는 것도 언론의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삼성의 긍정적인 변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고 ‘양심고백’의 이유를 밝혔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의 경제 민주주의가 진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이들의 바람을 언론들이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