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어느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갔을 때, 일본 수상을 지낸 사람도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매스컴은 전 수상의 죽음은 부고란에 간단히 취급했고, 이 사람의 죽음은 해가 떨어졌다며 대성 통곡했다 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기타오지 노산진, 도예가입니다.
이 사람은 14대를 이어온 심수관, 같은 14대인 고라이 자이몽 그리고 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아리타야키 등 일본의 유명한 도예가 가문처럼 대를 이어온 도예가도 아닙니다.
또한, 도예가이면서 물레를 차지 않는 도예가이기도 합니다. 한 때는 자신의 가마 없이 남의 가마에 작품을 주문하여 자기 작품을 빚은 도예가이기도 합니다(40대 중반에 자신의 가마를 짓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의 작품은, 세계 현대 작가의 작품 경매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주 유명한 옛 문화재급 도자기를 제외한 일반 골동품 도자기보다도 훨씬 비싼 값에 거래됩니다. 술 잔 하나가 우리 나라 돈으로 2,000만원을 호가하고, 차사발은 1억에서 2억원 정도이며, 이 사람의 항아리는 6억에서 7억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빚은 도자기가 적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본의 일반 도예 작가에 비해 비교적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작품에 어떠한 매력이 있기에 사람들은 이토록 비싼 가격에도 소장하고 싶어 할까요? 이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겠습니다.
▲ 노산진의 작품들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1883년 노산진이 태어날 때, 이 분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는 해에 저 세상으로 뜨고 그의 어머니는 노산진을 목판업을 하는 집안에 양자로 보냅니다.
그가 20살 때, 자기의 친어머니가 동경에 있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찾아가나 어머니의 차가운 응대에 낙담했다고 합니다. 이런 불우한 어린 시절의 문제 때문인지, 그의 결혼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주 많은 이혼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기타오지 노산진이 제작한 전각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그는 가난해서 홀로 독학으로 공부하다 서도에 빠집니다. 그리고 20살쯤 전각가(나무에 붓글씨를 새겨넣는 것)로 생활했습니다. 유명한 요정이나 일류 요리집에 서각된 간판을 제작해 주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나무에 전각을 해서 그것을 간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30대 초반,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된 1910년에는 우리나라로 건너와 총독부 인쇄국에 근무합니다. 3년간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우리 옛 도자기에 빠집니다. 또한, 동시에 요리에 빠져 듭니다.
그 시절, 노산진은 한 사람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 일본의 유명한 한학자입니다만, 자기가 직접 식기를 도안해서 아는 가마에 제작을 부탁한 뒤, 거기에서 나온 식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탄복한 노산진은 요리와 그에 어울리는 도자기 연구에 몰두합니다. 또한 그 자신도 도자기 가마를 방문해 성형을 의뢰한 뒤, 자기가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물레대장을 지도해 자신의 작품을 빚기 시작합니다.
▲ 노산진의 예술식기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그러면서 조선, 일본에서 공부한 고미술 보는 심미안을 내세워 골동품 장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골동품을 팔 때, 그 골동을 식기로 삼아 꼭 요리를 선보였다 합니다. 그리고 계절마다 그 계절에 어울리는 식기를 사용했습니다.
노산진은 "인간에게 있어서 요리는 가장 원초적인 예술이다. 그리고 요리는 혼자만을 위해서 만들지 않는다. 남을 위해 배려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요리는 먹기 전에 먼저 본다. 요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도자기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가 아닌가?"라는 말을 남깁니다.
37살 이때쯤 자기를 다른 집 양자로 보내버린 어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이때 노산진은 아주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미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자기의 예술관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골동품 가게 2층에 회원제 식당인 <미식구락부>를 발족하여, 자기가 모집한 옛 골동품, 때로는 골동품의 사금파리를 식기로 사용하여 자신만의 '미식'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노산진은 일본 전국에서 요리 재료를 구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고추장은 순창고추장, 미나리는 언양미나리, 조기는 영광굴비, 요리에 쓰는 물은 청주샘물 등…. 가장 유명한 재료를 이용하여 또 예를 들면, 접시는 고려청자, 술병은 조선백자, 대접은 분청자(분청사기)등을 식기로 사용하여 손님들에게 요리를 내놓았다 합니다.
그러자, 식도락가들이 노산진의 식당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부자들은 노산진의 <미식구락부> 회원이 못되면, 부자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유명한 요정이나 고급식당은 노산진을 흉내내어, 일본어로 '우쯔와'라는 요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정성을 쏟기 시작합니다.
▲ 노산진의 예술식기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또한 <미식구락부>는 요리 예술의 극치로 소문나, 회원수가 늘어납니다. 바로 이때부터 노산진은 자기 요리에 어울리는 식기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도예가들은 작품이 먼저이고, 그리고 그 작품에 맞는 요리를 생각하지만, 노산진은 요리를 위해 요리에 맞는 도자기 제작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때 노산진의 도자기는 자기가 디자인해 다른 가마에 주문하여 빚는 도예 작품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노산진의 가마에서 자기가 경영하는 요리점을 위해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43살부터입니다. 이때 자신의 가마를 처음으로 가지게 됩니다.
가마를 연 뒤에 노산진은 고요지 답사를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옛 가마터를 찾아 본격적인 도예 연구를 시작합니다. 노산진은 "나는 옛날 조선의 옛 가마터에서 진정한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조선 사기장(일본말 : 도공)의 위대한 창조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의 도자기의 스승은 먼 옛날 조선의 도공이다"라고 말합니다.
▲ 노산진의 예술식기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노산진은 사십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본격적인 도예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노산진 가마에는 물레차는 사람, 흙 만드는 사람, 불 때는 사람 등 많은 도자기 종사자가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그림이 아니다. 그림은 혼자만이 할 수 있지만, 도자기는 흙을 정제하는 자, 유약을 만드는 자, 물레 차는 자, 그림을 그리는자, 조각을 하는 자 그리고 불 때는 자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오는 협동예술이다. 조선의 도자기, 중국의 도자기, 아리타의 백자도 그렇다. 도예가가 도자기의 이 모든 공정을 혼자만 한다면 보다 나은 도자기 세계로 나아가기 힘들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조합하여 한데 묶어 최종적으로 가장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
또, 내가 나의 작품에 사인(Sign)을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기능을 취합하여 그것을 나의 예술세계를 통해 도자기가 완성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건축사가 집을 지으려면 목수, 미장, 도배공 등 이 모든 기능공을 잘 응용해야 좋은 집이 된다. 또한 영화는 배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만든다. 내 가마에서 나온 작품이 아무리 좋다해도 나의 '류'에 맞지 않는다면 바로 깨어버린다. 그것은 나는 그릇을 팔지 않고, 나의 예술관을 팔기 때문이다."
이때 노산진의 가마에는 그의 지휘 하에 도자기를 빚는 여러 기능공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아라카와 도죠(후에 인간 국보가 됨)도 그 당시, 노산진 밑에 속한 물레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노산진 가마에서 일했던 종업원들은 후에 독립하여 대부분 유명한 도예가가 되었습니다.
▲ 노산진의 차사발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노산진은 도자기를 위대한 교향곡이라 했습니다. 도자기가 교향곡, 즉 오케스트라라면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필요하겠지요. 그 지휘자 밑에는 바이올린 담당, 피아노, 첼로 등 많은 연주가가 필요합니다. 지휘자 혼자서는 오케스트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휘자가 없다면 조화롭고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또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노산진은 자신에 대해 '미를 탐구하는 도자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노산진은 이때부터 미학을 주제로 하는 잡지를 직접 발행하여 문화비평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한 번은 도자기에 대한 미학을 놓고,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판 싸움이 시작됩니다. 야나기는 그 당시 일본민예부흥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써 우리 나라의 미를 '애상의 미' 그리고 진주멧사발(이도자완)이 '잡기'였다고 주장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노산진은 야나기를 미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색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만든 자의 철학을 보지 못한다며(예를 들면, 도자기 빚는 사기장). 이 말에 필자도 동의합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500여년 전 조선의 사기장이 조상을 위해 정성껏 빚은 제기용 사발(일본에서는 이도자완이라 부름)을 '막사발'이라 칭하며, 그것을 빚은 사기장을 단순, 무식쟁이라 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1945∼1955년대의 일본은 패전국이며, 먹을거리가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의 전통식기는 사라져가고, 양식기와 우리가 왜사기라 부르는 도자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을 노산진은 개탄하고 전통을 통한 창조를 부르짖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노산진이 있었기에 일본의 식문화는 다시 일본 전통 식문화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유명한 서양화가인 '피카소'가 노산진 가마를 방문하자 노산진은 자기가 소장한 명품도자기를 내어놓습니다.
이때 '피카소'는 안의 물건은 보지않고, 포장한 상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노산진은 화를 내며 안의 물건을 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 이후 피카소도 도자기를 빚기 시작합니다.
▲ 좌) 피카소와 노산진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노산진은 말년에 일본 정부가 인간 국보로 인정하자, 누가 나를 평가하느냐며, 인간국보를 거절했습니다. 참! 우리나라의 공예품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는 그 사람의 업적보다 대를 이어 그 업에 종사했는지를 따집니다.
일본의 인간 국보는 몇 대에 거쳐 일을 했느냐보다 그 사람의 예술적 업적을 평가해 정합니다. 그래서 대를 잇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업적을 인정받아 인간 국보가 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959년 향년 76세, 노산진은 "어머니! 어머니!"를 울부짖으면서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 노산진의 예술식기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한 나라의 문화를 단계적으로 보면 매 단계마다 한 분야를 이끈 선각자가 있습니다. 그 선각자의 집념과 미래를 보는 눈을 통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그 문화가 보편화되고 일반화됩니다. 바로 노산진은 일본의 도자기를 요리와 결부시켜, 일본의 요리를 세계적으로 알린 선구자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을 통한 미의 창조자였습니다.
필자는 노산진의 작품이 아주 비싼 이유에 대해 생각합니다. '요리에는 식기가 필요합니다' 이 평범한 명제를 요리는 예술이며, 식기는 단순한 요리 도구가 아니라 '예술품'으로 승화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노산진의 작품은 단순한 식기라도 그의 예술혼이 담겨있는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 노산진의 예술식기
ⓒ2004 시부야 구로다 도엔
저는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본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되찾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사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미학자들이 왜곡한 도자기의 본질을 사기장인 제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며 책을 쓰고 있습니다.
2004/11/17 오후 6:27
ⓒ 2004 OhmyNews
신한균 기자는 도예가 신정희의 장남입니다. 현재 경남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작도 활동과 <잃어버린 사발을 찾아서>란 책을 집필 중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산에 올라 산사랑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