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이 일제강점기에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몸 담았던 동북항일연군.
이 동북항일연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는데... 바로 중국인 저우바오중(주보중)입니다.
하지만 인터넷에 동북항일연군이니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이니 하는 내용들은 많아도 동북항일연군의 중심급 인물인 저우바오중 자체에 대해서는 관련 내용이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저우바오중에 대해서는 김일성이나 동북항일연군을 설명할 때 어느 정도 언급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만큼...
제가 직접 저우바오중의 경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내용은 일본 위키와 중국 위키에서 많이 참고했습니다.
(번역기 돌리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겁니다. 때문에 아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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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1902년 ~ 1964년 2월 2일
1902년 운남성 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년 15세의 나이에 호법 운동에 참가했다.
1922년 ~ 1924년까지 운남육군강무학당에서 수학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 활동, 북벌에 참가했다.
1927년 7월 우한시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12월 국민혁명군 제6군 제18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여 호남성, 절강성, 하북성 등에서 수송 및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다.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만주 요녕성 등에서 항일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서 제2군 군단장에 취임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되면서 제3로군 군장에 취임하여 길림성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 때문에 1940년 소련 연해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소련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가 소련군 장춘위수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동북항일연군이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칭되면서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10월 31일 동북항일연군과 토착 무장조직들이 규합하여 동북인민자치군이 편성되자 총사령 린뱌오 밑에서 부총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년 1월 14일 동북인민자치군이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자 린뱌오 사령원 밑에서 부사령원을 역임했다.
1946년 ~ 1948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중국 동북부의 장춘시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년 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도 참가했다.
1948년 1월 동북민주연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된 후, 11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령원에서 해임되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1950년 2월부터 운남성인민정부 부주석, 서남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을 역임했다.
1951년 10월 ~ 1957년 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을 역임했다.
1953년 8월 ~ 1954년 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4년 9월 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5년 일급팔일훈장 및 자유독립훈장이 수여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9년 4월 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및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되었다.
1964년 2월 2일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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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저우바오중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4년에 사망했네요.
저우바오중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마오쩌둥을 계속 지지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지만...
만약 저우바오중이 마오쩌둥의 정책에 대해 한때 이이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면...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에 사망한 만큼 어찌보면 운이 좋았을 수도...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