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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최고의 시인 백곡 김득신
김득신(1604-1684)은 선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대를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 살다간 인물이다. 그 시기는 임진왜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거친 데다가 격심한 붕당싸움이 벌어지던 혼란기였다.
그런 시대에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으니,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화집으로 <종남총지(終南叢志>
문집으로 <백곡집(栢谷集)>이 있다.
81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
제1기는 1604년 출생부터 10대에 이르는 시기이고,
제2기는 1624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면서 시인으로 성장하던 청장년기이다.
이 때는 주로 천안 목천 집을 삶의 근거지로 삼아 절집과 서울 등지를 오가면서
글 공부에만 전념하던 시기이다. 또한 수시로 낙방하는 과거시험에도 불구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시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고통을 노래하였다.
제3기는 과거에 급제한 1662년부터의 노년기이다.
그의 나이 59살인 1662년에 뒤늦게 급제하여 부친의 뜻을 이루자,
바로 괴산 능촌에 취묵당을 짓고 거처를 목천에서 취묵당 옆 초당으로 옮긴 뒤
자연과 벗하면서 살았다. 때로는 벼슬살이를 위해 괴산을 떠났지만,
늘 마음은 취묵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우둔했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곡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17세기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공부 때문이었다. 타고난 천재성이 없음을 안 그는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며 인내하고 노력하였다. 한 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한 길만 걸어,
결국 청운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으로서 삶을 마칠 수 있었으니,
그의 일생을 반추해 보고 그의 자취를 찾아보는 일은 의미 있는 탐구가 될 것이다.
1. 가계와 출생
백곡 김득신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4년(선조 37) 10월 18일
아버지 김치(金緻)와 어머니 사천 목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관향은 안동으로 고려조의 명장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이 14대조이자
중시조이며 제학공파의 10대손이다.
그의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백곡노인(栢谷老人)・백옹(栢甕)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백곡을 주로 사용하였다.
백곡은 할아버지 때부터 세거해온 천안 목천 백전리(栢田里)에서 딴 것이다.
김석의 선대는 경기도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친인
언묵의 묘소는 시흥이며 그 선대들의 묘소도 거의 경기도 일원이다.
다만 김석의 모친 의성김씨는 괴산읍 수진리에 묘소를 잡았으니 친정동네요
이미 김석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후로 괴산일원은 이 집안의 세거지가 된다.
김득신이 목천과 능촌 두 곳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
김석(錫, 1495-1534) 이후부터이다. 김석의 선대는 그의 부친을 비롯한
여러 선대의 묘소가 경기도 시흥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경기도 시흥 일대가 가문의 삶터였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었던 고조부 김석은
학문이 뛰어나 1519년(중종 14)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그럼에도 스승이신 조광조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이를 피해 외가집이 있던 충북 괴산군 문법리와 전법리로 옮겨 살면서 정착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백현묘원에 있다.
김석에게는 5갑으로 표현되는 충갑・효갑・우갑・제갑・인갑 등 다
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충갑(忠甲, 1515-1575)만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인 151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네 아들은 괴산으로 이주한 이후에 태어났다. 이들 5갑의 묘소 역시
첫째 아들인 충갑은 충주시 살미면 무릉동에, 효갑은 경기도 시흥시 소래산에,
우갑은 괴산읍 수진리에, 셋째와 넷째 아들인 제갑과 인갑은 아버지와 같은
괴산읍 능촌리에 있었다. 이들 묘소는 현재 대부분 괴산 능촌리
개향산 백현묘원으로 천봉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김석이 괴산으로 내려와
여러 아들을 둠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괴산 능촌리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에 세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석 (金錫) | |||||||||||||||||
1495~1534 | |||||||||||||||||
김충갑 (金忠甲) | 김효갑 (金孝甲) | 김우갑 (金友甲) | 김제갑 (金弟甲) | 김인갑 (金忠甲) | |||||||||||||
1515~1575 | |||||||||||||||||
김시회 (金時晦) | 김시각 (金時覺) | 김시민 (金時敏) | 김시신 (金時愼) | 김시진 (金時進) | 김시약 (金時若) | ||||||||||||
(양자) | 김치 (金緻) | ||||||||||||||||
1577~1625 | |||||||||||||||||
김득신 (金時晦) | |||||||||||||||||
1604~1684 |
그런데 목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김석의 맏아들이자
백곡 김득신의 증조부인 김충갑의 유배 때문이었다.
김충갑은 진주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의 아버지로,
안동김씨 중시조인 김방경의 11대손이자 파조(派祖) 김익달의 7대손이다.
그 역시 1545년(명종 1)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지평 등 관직에 올랐으나,
그 해에 일어난 을사사화 때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고
서청주(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로 유배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중종・명종대에 걸친 피비린내나는 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서청주로 유배를 온 김충갑은 냇가 건너 이웃 마을인
백전리(柏田里, 현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 사는
창평이씨 이성춘의 딸과 1547년경에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
이성춘은 큰 부자로 딸만 둘 있었다고 한다.
김충갑과 결혼한 창평이씨는 1529년생으로 결혼 당시
18세였는데(창평이씨 묘비),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목천지역에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김충갑에게는 모두 시회(時晦), 시각(時覺), 시민(時敏), 시신(時愼), 시진(時進), 시약(時若) 등
6명의 아들을 있었다. 그 중에서 맏아들 시회(1542-1581)는 서청주로 유배를 오기 전에
이미 작고한 광주이씨와의 사이에 낳았고, 시약은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창평이씨 소생으로 목천에서 태어난 아들은 시각, 시민, 시신, 시진 네 명이었다.
김득신이 태어난 병천 잣밭
시민이 바로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
충무공 김시민(1554-1592)이다. 김시민은 목천 잣밭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1578년(선조 11)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에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이해 죽은 목사를 대신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하였다. 이어 여러 지역의 왜군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랐고 금산에서도 왜군을 격파하였다.
10월에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3만여 명에 이르는 왜군을 죽이고 격퇴시켰으나,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구의 총탄을
이마에 맞고 순국하였다. 그의 묘소와 사당이 괴산에 있다.
김시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큰 형인 시회의 넷째 아들을 양자로 삼으니,
그가 바로 김득신의 부친 김치(1577-1625)이다. 김치는 자가 사정(士精),
호가 남봉(南峰), 또는 심곡(深谷)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기 직전인
1597년(선조 30)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에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했다. 사가독서란 휴가를 주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한 제도이다.
어머니 사천 목씨는 이조참판을 지낸 목첨(睦瞻)의 딸로, 외삼촌 3명은 각각
예조참판 목서흠, 호조참판 목장흠, 강릉부사 목대흠이었다.
목대흠은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가깝게 지낸 외사촌 2명도 나중에
동부승지와 우의정을 지낼 정도로 출중하였는데,
그중 목래선은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집안 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김득신이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사가독서를 하기 4년 전인 1604년(선조 37) 10월 18일이었다.
태어난 곳은 할아버지 김시민이 태어나 성장한 목천인지,
아버지가 태어난 괴산인지, 어머니 사천 목씨가 살았던 외가집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김치가 선영의 일로 1601년부터 4년 동안
괴산 방하현(方下峴, 괴산 능촌리 방아재)에 머무른 일이 있었다.
김득신이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괴산에 있을 때이므로,
괴산 능촌이거나 청안이었을 것이다. 특히 청안은 고조할아버지가 처음
서울서 낙향한 괴산 전법리와 가까운 데다가, 어린 시절 한때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곳이고 아버지의 묘소도 증평 율리에 있는 만큼,
그의 출생지는 청안(증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다
김득신이 10살 되던 1613년 무렵, 아버지 김치는 전라도 흥덕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괴산 선영 아래와 청안으로 거처를 옮겨가면서 살았다.
이때 아들에게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 김득신이 10살 때 청당현(현 증평)에 살면서
<<史略>>을 직접 가르쳤는데, 이는 다른 아이보다 늦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득신은 3일이 지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였으니,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격려하면서
더욱 분발하도록 독려하였다. 14살 때 서울로 올라간 이후에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 19살 무렵에는 한시 연구(聯句)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시에 일찍 재능을 보였다.
시에 대한 그의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 하다.
아버지 김치는 광해군 당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았는데,
그래서 구당 박장원(朴長遠)이 11살 무렵에 와서 직접 당시(唐詩)를 배울 정도였다.
1624년(인조 1) 어느 봄날이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동래부사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갔다.
전에 지은 과시(科詩) 5,6수를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칭찬을 하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춤을 추을 정도였다.
그렇게 칭찬을 해주던 아버지는 다음해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안동을 순찰하다 객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1626년에 삼년상을 마친 뒤
외삼촌 목서흠에게 문사(文辭) 시험을 보았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星斗欄干月滿天 북두성은 난간에 걸려 있고 달빛은 하늘에 가득한데
石池秋光銷寒烟 石池는 가을 색 깊어 차가운 안개에 잠겼어라.
黃花依舊樽仍在 예로운 국화는 만발하였고 술항아리도 그대로이니
千載陶君若箇邊̥ 그 옛날 도연명이 여기에 있는 듯 하네.
이 시를 받아 본 외삼촌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칭찬하였다.
주변의 문인들로부터도 시로 세상에 크게 떨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엿한 시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그는 20년 동안 목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목천 집과 산사(山寺)를 오가면서
글 공부에 힘을 쏟고 시를 썼다. 1630년 그의 나이 27살 때는 책상자를 메고 사찰에
들어가 공부에만 매진하였는데, 31살이 되던 1634년부터는
고문(古文) 36편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해서 독파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33세이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 당시 1년 전부터 서울 남산 아래로 옮겨 살고 있었는데,
시골로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과 그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는 시가 있다.
- 병자호란 때 피란 가서 처음 짓다-
風塵一別洛陽家 난리 통에 한 번 서울 집 떠나 온 뒤로
獨抱深愁亂似麻 홀로 깊은 시름 안은 채 삼처럼 어지럽구나
窮谷積陰春意懶 깊은 골짜기 쌓인 음기에 봄이 더디니
小梅寒勒不開花 작은 매화가 추위에 움츠려 피지 못하네
병자호란 때 서울을 떠나 궁벽한 영남 진주로 피난을 간 김득신,
쓸쓸함과 황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해 목천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관동지방으로 떠났는데, 1638년에는 장인이 부사를 지낸 삼척에 머물렀다.
죽서루에 올라 남긴 시 한 수가 남아 있어, 당시의 정황을 읽을 수 있다.
- 죽서루에 올라 -
迢迢湖路幾時尋 멀고 먼 호서 길, 어느 때나 밟을까
回首天邊萬疊岑 하늘가로 머리 돌리니 산봉우리 수없이 겹쳤어라
老雁嘶和蠻店笛 늙은 기러기 울음소리는 어촌의 젓대소리와 어우러지고
怪禽啼雜峽村砧 괴산한 새소리는 산골 마을 다듬이 소리와 섞였네
中原戰血流依舊 중원의 싸우다 흘린 핏물 예전과 다름없이 흐르고
西塞軍聲動至今 변방의 군사 떠들썩한 소리는 아직껏 진동하네
獨上危樓憑曲檻 홀로 높은 누대에 올라 굽은 난간에 기댔으려니
海棠花雨暮江潯 해당화 우수수 떨어지는 강가에는 해가 저무누나
죽서루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름답고 목가적이건만,
세상은 온통 핏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 우수수 떨어지는 해당화에 슬픔이 느껴진다.
이렇듯 그의 시는 당시의 풍광과 마음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런 그의 시작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36년 동안 36편의 고문을 읽었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무려
1억 1만 3천 번을 읽어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할 정도였다.
피나는 글 공부였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하여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특별한 스승은 없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사찰에서 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을 지낸
벽암대사를 비롯하여 여러 스님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혜정(惠正) 스님에게
써준 시에서, “유교와 불교는 비록 도는 다르나 이럭저럭 삼십년을 지냈지.
행여나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우리 함께 참선이나 하세”라고 하였다.
유학자로서의 편협함과 고루함에서 벗어나 있었다. <장자>·<노자>도 즐겨 읽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교 사상도 체화하여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각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연을 노래한 사실주의적이고 회화적인 시를 많이 썼고
더 애착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으며,
한 자 한자 시어를 놓을 때마다 고뇌하고 공을 들여 썼으니,
그런 자연관과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당대 최고의 시인묵객이 될 수 있었다.
3. 벼슬살이와 시인의 갈림길
김득신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었지만, 이루지 못한 청운의 꿈이 있다.
바로 과거시험 합격을 통한 벼슬길이었다. 더욱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60살까지는 과거에 응시해 보라”라는 유명(遺命)도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청운의 꿈이었다.
드디어 1642년(인조 20), 그의 나이 39세에 진사 3등 51위에 입격하였다.
그 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작은 결실이었다. 그는 “한유의 글과 사마천의
사기를 천 번이나 읽었거늘 이제야 겨우 진사과에 붙었네”라고 감회를 술회하였다.
그러나 진사 입격이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1646년에 외삼촌의 주선으로 음보(蔭補)로 숙녕전 참봉직에 제수되었지만,
꿈꾸던 길이 아니었기에 나아가지 않으려 하였다. 결국 외삼촌의 강권에 못이겨
참봉직을 맡았지만,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런 심기는 다음과 같은 그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 청라산인의 시에 차운하다 -
東望親朋今幾日 동쪽을 바라보며 친구를 그린 지 몇 날이던가
廣陵煙樹遠依依 광릉의 안개 낀 나무 저 멀리 가물거린다
此身羈縶無由脫 매인 이 몸 벗어날 길 없어
羨殺天邊去翼飛 하늘을 나는 새가 부럽기만 하구나.
참봉직이 그야말로 새장 안일 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시에서
“왜 이리 숙직이 길기만 하나, 끈끈이에 붙은 새 같은 신세”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또는 “하찮은 벼슬에 얽매어 늘 숙직에 시달리니, 마음은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리는 듯 하네”라고 하였다. 여기서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김득신의 자
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감성으로는 참봉직이 새장 안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참봉직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이내 사직하고 청주의 도정 골짜기에 있는
도정당(桃汀堂) 등지에 거처하면서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도정당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그의 나이 40살이던 1643년 8월에 만들어
거처하던 곳이었다. 53세이던 1656년(효종 7)에는 증평 율리에 갔는데,
아마도 아버지 산소에 들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해 모친상을 당하였다.
그렇다고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당당히 벼슬길을 하려던 청운의 꿈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그가 살았던 지식인의 업보요 굴레였기에 의지대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어느 해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목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주에서 지은 시에는
그의 한탄과 고통이 묻어 있다. 실로 처량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 공주 길 도중에 -
今年落魄客心驚 금년에 낙백하니 나그네 마음 놀라워
孤館通宵夢不成 외로운 객관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네
龍岳重雲埋翠色 계룡산 짙은 구름은 푸른 색 묻어 버리고
錦江層浪吼寒聲 금강의 높은 물결은 차가운 소리 으르릉
天魔戱劇窮吾命 마귀들의 장난질에 내 운명 궁해지고
萬事乖張歎此生 만사가 어그러짐에 이 인생 탄식하네
北向家鄕聊送日 북으로 고향 향해 애오라지 눈길을 보내니
暮天風雨暗歸程 저무는 하늘 비바람에 돌아갈 길 캄캄쿠나.
당시 과거를 통한 벼슬길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그로서는 거듭 떨어지는
과거시험에 만사가 어그러지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그가 지은
‘용호(龍 湖)’와 ‘한강(漢江)’을 보고 효종이 “당음(唐音)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탁월한 시인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 당파로 나뉘어져 붕당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특별한 당파가 없던 그로서는 과거에 합격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그의 탁월한 문학적 능력은 달달 외워 답안지만 잘 쓰면 되는 시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귀의 장난질이 끝났는지, 드디어 그의 나이 59세이던
1662년(현종 3)에 문과 증광시 병과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꽤 늦은 나이였다. 그렇지만 평생 꿈꾸던 청운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자,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백곡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과거 급제 이후 서책에 찍은 도서로 ‘四世文科’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증조부(김충갑, 1546), 조부(김시회, 1567)), 부친(김치, 1597),
본인(1662)에 이르는 4대가 차례로 문과에 급제하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늦게나마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옛날이나 지금에 학문으로 성공한 선비는 부지런함으로써
이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에 문장으로 크게 울린
분들로서 글을 많이 읽은 분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
나는 태생이 노둔해서 다른 사람보다 배나 읽었으니…
그 중에서 <백이전>을 가장 좋아해서 일억 일만 삼천번이나 읽고는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이름지었다…
실제 그는 <백이전> 외에 <노자전(老子傳)>과 <중용서(中庸序)> 등을
이만 번 읽었을 뿐 아니라, 일만 번 이상 읽은 책이 여러 종류가 될 뿐 아니라,
장자·사기·대학 등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읽었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둔해진 머리를 포기하지 않고 특별한 스승도 없이
혼자 글 공부를 통해 극복해낸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학론(成均館論)을 시작으로 병공예조좌랑・
정선군수・풍기군수・사헌부장령・장악원정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홍천현감과 정선군수에 제수되자,
“김득신은 시인일 뿐 일은 서툴러서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대신들이 저지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사헌부 장령에도 제수받았지만,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피비린내나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붕당싸움의 현장에서 순박한
시심(詩心)을 가진 시인 관료가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671년(현종 12) 그의 나이 68세에 사예(司藝)에 제수되어 근무할 때,
“병든 몸 억지로 끌고 서울에 왔건만 마음은 밤낮 산골 물가로 돌아간다”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 관청 벽에 써 붙이다 -
强扶衰病入京師 병든 몸 억지로 끌고 서울에 왔지만
日夜歸心峽水湄 마음은 밤낮 시골 물가로 돌아간다
再忝成均司藝職 두 번 성균관 사예가 되었으니
鮎漁恰似上竿遲 메기가 죽간에 더디 올라가는 것 같구나
- 돌아가고픈 생각에 -
珂馬驅馳九陌塵 장식한 말을 타고 한양 거리 먼지를 날리지만
衰年宦味益酸辛 노쇠한 나이라 벼슬살이 더더욱 힘드네
蒲帆未掛秋風去 돛도 달지 않고 갈바람에 배 떠나는데
無乃沙鷗送罵頻 모래밭 갈매기 어서 가라 꾸짖지 아니할까
이렇듯 벼슬살이 하러 서울에 왔지만, 늘 마음은 시골에 가 있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라 육체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적한 시골에서의
유유자적한 생활이 그립기만 하였다. 이내 사직하고 그의 발길은 어느덧 시골에 가 있었다.
4. 취해도 침묵을 지키리다
평소 김득신은 친인척이 삶의 터전으로 모여 살고 선영이 있는 데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괴산 능촌에 가고 싶어 하였다. 그럼에도 가지 못했던 것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의 나이 59살이던 1662년 3월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마음에 그리던 그곳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해 8월 목천 집에서 괴산 능촌 방아재로 갔다.
그런 다음 청안현감 등의 도움을 받아 선산이 있는 개향산 자락에 정자를 지으니,
인생 말년을 보내면서 시와 술을 즐기고 자연과 벗하면서 부귀영화를 멀리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 정자 이름을 취묵당(醉默堂)이라 하였으니,
왜 ‘취묵’이란 이름을 붙였는지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자.
무릇 세상 사람들은 취하여도 침묵하지 못하고 깨어도 침묵하지 못하여
재난의 기틀 속으로 빠짐을 경계할 줄 모르니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취해도 고요히 침묵하고 깨어도 조용히 침묵하여 입을 병마개 막듯이
꼭 봉함을 일상의 습관으로 삼으면 반드시 재난의 기틀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취하여도 침묵하지 못하고 깨어서도 침묵하지 못하여 재난이 발생한다면
어찌 두렵지 않으리요? 만약에 취중에 침묵하지 못하고 취한 다음에도 침묵하지 못한다면,
비록 몸이 들판 바깥에 있다고 하더라도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가운데 있으면서
말을 삼가지 않는 사람과 그 순간을 함께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구당 박중구가 임인년 여름에 네 번이나 편지를 보내어
침묵하지 못한다고 경계하였는데, 나는 그를 믿는다.
당(堂)의 이름을 취묵(醉默)이라고 단 것은 대개 취하더라도 침묵해야 한다는
뜻을 잊지 않고자 함이다. 만약에 능히 취하여서도 침묵하고 깨어서도
침묵한다면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아 몸이 재난을 면할 수 있다면,
이는 중구가 준 것이니, 어찌 그가 나를 경계한 뜻을 저버린 것이리요? <醉默堂記>
이 글은 취묵당을 지은 다음해 봄에 지은 ‘취묵당기’의 일부이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심지어 술에 취해서라도 말 조심,
몸 조심을 하기 위함이었다. 취해도 고요히 침묵하고 깨어도 조용히 침묵하여
입을 병마개 막듯이 꼭 봉함을 일상의 습관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의 절친한 친군인 박장원이 “깨어야 침묵하는데 하필 취함인가?
이것은 대개 도연명이 잘못이 많을까 두려워 하였던 것의 끼친 뜻일 것이오.
그러나 그 집의 이름을 ‘묵’자로 한 것은 또한 번거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일 텐데,
또 어찌 하여 다른 사람의 글을 구하여 그것을 꾸미고자 하는가?
그렇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조만간 서로 만나 이 집 위에서 술잔을 들어 취하고,
그 개울과 산의 기이함을 보고 물고기와 새가 사람과 친함을 살펴서
하늘이 흘러 움직이는 취향을 이야기한다면 또한 어찌 끝내 침묵함을 얻는데
그치겠는가?”라고 하자,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좋다고 하였다.
이런 모습이 윤선거(1601-1669)의 눈에는 좋아 보였다.
윤선거는 1664년(현종 5) 1월부터 5월까지 원주, 제천, 영월, 강릉, 금강산,
영춘, 단양, 청풍, 괴산 등지를 여행하였는데, 4월 25일경 단양의
도담삼봉 근처에서 백곡을 만나 함께 옥순봉, 청풍 한벽루 등을 구경하고
28일에는 김시민과 김치의 묘소가 있는 봉황대 근처에서 아침밥을 먹고
백사장에서 놀다 간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백곡이 고향 산의 왼쪽에
삼간의 서재를 신축하여 취묵당이라 하고 늘그막을 보낼 계획을 삼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백곡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백곡은 결코 어리석지 않네”라고 평하였다.
당시에는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와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윤선거도 우암 송시열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힘든 상황이었다. 다들 벼슬을 하려 목숨을 걸고 당파싸움을 벌이던 때였으니,
사람들이 백곡을 어리석다고 할만도 하다. 그럼에도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윤선거는 백곡의 깊은 뜻을 알고 공감을 표하였던 것이다.
취묵당 모습. 저곳에 오르면 어느 누군들 취하지 않으리...
이렇게 취묵당을 지은지 얼마 뒤에는 다시 주거할 초당을 지었다.
아버지가 살던 옛 집이 남아 있고 김시민장군의 자취도 알 수 있는 개
항산 입구 언덕에 초가집을 지었다. 그곳은 벼슬을 버리고 번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낼 공간이었다. 초당 상량문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한 칸의 집을 엮어서 수많은 골짜기의 경치를 독차지하고, 책을 보고 시를 읊는데
누가 능히 더럽히겠는가? 꽃을 찾고 버들을 물으니 스스로 회포를 풀 만하네.
지나가는 손님은 사립문에 말을 매고 이웃의 승려는 이끼 낀 길에 지팡이를 휘두르네.
비록 취묵당의 높고 트임과 거리가 있지만, 또한 개향산의 그윽하고 깊음과는 비슷하네.
구불구불한 긴 강을 굽어보니 쾌청한 빛이 닦은 거울인 듯하고,
넘실대는 작은 못에 내려가니 가는 무늬가 비단과 같네.
또한 그가 얼마나 시인으로서 꿈에 그리던 생활을 초당에서 하게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창은 한 줄기 물에 닿아 있어 가죽 무늬 같은 물결이 쌓이고,
문은 반 무의 못을 눌러 처마 그림자가 벌써 잠기었네. 푸른 절벽으로 병풍을 삼고,
흰 구름으로 울타리를 삼네. 버들을 묻고 꽃을 찾으니 마땅히 물외의 뜻과 흥취를 돕고,
달을 비평하고 물을 이야기하니 또한 한가로움 속에도 옳고 그름이 있네.
층진 벼랑의 소나무를 마주하는데 어찌 조래산의 푸른빛을 부러워하며,
언덕에 기댄 매화를 보니 유령의 싸늘한 매화향기와 다르지 않네.
땅이 무릉도원과 같으니 멍하게 진시황 시대에 세속을 피한 사람인 듯 여기고,
뜰이 율리와 같으니 간혹 진나라 때 전원으로 돌아온 도연명 처사처럼 여기네.
이 또한 족하거늘 누가 감히 얕보리요? 흥취가 유독 술잔에 있거늘 녹색 술을
기울일 만하고, 시를 지으려는 욕구가 다리 주변에서 일면 나귀를 채찍질해도 좋네.
<草堂序>
초당에서의 생활은 무릉도원에서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백곡도 대만족이었다. 당시 취묵당 주변의 경관은 ‘옹암의 꽃 구경’,
‘성불산의 눈 구경’, ‘강어귀의 장삿배’, ‘나루터의 고기잡이 등불’,
‘들판 다리의 행인’, ‘시냇가 모래밭의 놀란 기러기’, ‘우협의 아침 이내’,
‘용추의 저녁 비’와 같은 8경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이 8경은 백곡 자신이 그린 것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취묵당과 초당을 떠난 그의 마음 속은 온통 취묵당으로
다시 돌아가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수시로 관직을 맡아도 병을 핑계로
고사하거나 맡아도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몸은 괴산을 떠나지만,
마음만은 늘 취묵당과 초당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 여관의 창에서 짓다 -
長夜何能慰客愁 긴 밤에 어찌 하면 나그네의 시름을 위로할 수 있는가?
只看孤燭照狀頭 다만 머리를 감춘 외로운 촛불이 빛남을 보네.
此身淹泊歸期阻 이 몸이 지체되어 돌아갈 날이 머니
夢入槐江化白鷗 꿈속에 괴강에 돌아가서 흰 갈매기로 화하네.
취묵당과 초당을 떠난 그의 몸은 나그네요, 마음은 괴강가에 머물러 있었다.
오죽하면 꿈 속에서 흰 갈매기가 되어 괴강으로 돌아갈까?
그래서 취묵당으로 다시 돌아오면 너무 기쁘고 편안한 나머지 모든 것이 예쁘게 보일 뿐이다.
- 취묵당에 돌아와 -
時序今當野菊香 들국화 향기로운 이 계절에
歸來鄕國興偏長 고향에 돌아오니 흥겨움이 그지 없구나
湖光山色天然態 호수빛 산빛 천연스런 그 자태
何似西施滿面粧 어쩌면 그토록 곱게 화장한 서시 얼굴 같을꼬
그리고 취묵당에만 돌아오면, 아름다운 자연에 시심(詩心)이 자극되어
시 짓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시
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 취묵당에서 우연히 읊다 -
水光晴后艶 물빛은 개인 뒤에 예쁘고
山色雨中奇 산 빛은 빗속에 기이하구나
騭核誠非易 딱히 뭐라 말하기 어려워
吾寧廢賦詩 차라리 시 짓기 그만둘까보다
이렇게 취묵당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시를 짓고 종종 벼슬살이를 위해
다른 곳으로 갔다가 이내 취묵당으로 되돌아오곤 하던 백곡은
1683년(숙종 9)에 나이 80을 맞아 1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위계가 올랐다.
안풍군(安豊君)에도 봉해졌으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몸이 아팠다.
그러던 중 명화적에게 해를 입어 그토록 사랑했던 취묵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81세요, 해로는 1684년(숙종 10) 8월 30일이었다.
슬하에 두 명의 부인으로부터 8남 3녀를 두었다.
취묵당에 앉아 바라본 괴강,
백곡이 왜 이곳을 사랑했는지 이해된다
그의 제문(祭文)에 “주인 없는 강산은 선생이 있는 곳이요,
끝없는 풍월이 선생의 즐거움이었다. 외물의 번화함에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침묵으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고요함 속의 한적함을 마음에 잊지 않고 다만 시를 읊어 뜻을 드러내었다”라고
평하였다. 시를 사랑했고, 그래서 진정한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백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그의 자취를 찾아서
▢ 잣밭마을
백곡 김득신이 태어난 곳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증평으로 추정하고 있다
. 10대 때는 아버지를 따라 목천과 괴산・증평 및 서울 등지로 옮겨 살았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1624년 그의 나이 21살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59살 이전에는 주로 목천 집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가 살았던 목천 백전(栢田)은 현재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마을이다.
잣밭마을은 그의 증조부인 김충갑(1515-1575)이 1547년경에 그곳에 살던
창평이씨와 결혼하여 인연을 맺은 곳으로, 후손들이 대를 어어 지금은 안동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충갑이 살고 김시민이 태어난 곳에는 지금도 거북이 모양의 구암(龜岩)이
의젓하게 앉아 있는데, 김충갑의 호를 ‘구암’으로 짓게 된 바위이다.
바위에는 ‘김씨세거 백전동천(金氏世居 栢田洞天)’이라는 글씨가 한자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안동김씨 세거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옆에는
김시민이 9살 때 이무기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사사처(射蛇處)라는
김시민 유적비가 1988년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백곡 김득신도 삶을 영위하였다. 백곡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이곳에
서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1626년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1659년까지는 잣밭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잣밭마을은 그의 생활터전이었을 뿐 아니라, 시를 짓고, 글 공부를 하던 정든 곳이었다.
마을 앞 개울가에는 복구정(伏龜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이 정자는 시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백곡이 이곳 향리를 그리워할 때 먼저 떠오르는 풍류의 현장이기도 했다
.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구정문적(龜亭聞笛>과 <龜亭>은 바로 이 정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김시민이 이무기를 죽인 곳
- 복구정에서 피리소리를 드다 -
斷橋平楚石陽低 평야의 끊어진 다리에 저녁햇살은 나직한데
政是前山宿鳥棲 참으로 앞산에 새가 깃들 무렵이네.
隔水何人三弄笛 물 건너편에서 누가 몇 가락 피리를 부는가?
梅花落盡故城西 옛 성 서쪽에는 매화가 다 떨어지네.
이 시는 해질 무렵의 들판의 경치와 잠을 자기 위해 둥지로 날아가는 새의 모습으로
시각적 심상을 보여주고,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로 청각적 심상을 자극한 뒤,
다시 그 소리에 감응하여 떨어지는 매화꽃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봄날저녁
들판의 정취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목천의 백곡은 이처럼 매우 아름다운
산수 속에 위치한 마을로 그에게 인식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그의 호도 잣밭의 한자지명인 백곡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잣밭마을은 아름답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난개발로 어지럽다.
백곡이 시를 짓던 복구정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자취를 아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냇가를 건너 김시민의 어머니이자 김득신의 할머니이신 창평이씨의 묘소로 가는 발길이 허허롭기만 하다.
▢ 능촌 취묵당
백곡 김득신의 자취가 가장 뚜렷이 남아 있고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곳은
능촌 취묵당이다. 능촌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능처럼 큰 충익공 하담 김시양의 묘소가 있으므로 ‘능말’ 또는 ‘능촌’이라 하였으며
, 주위에 ‘길골, 소리실, 숙청거리’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길골’은 원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피난지로 이용된 곳인데 길게 형성돼 있어 불려진 이름이라고 한다.
‘소리실’은 원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늘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라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고,
‘숙청거리’는 ‘술청거리’라고도 하는데, 전에 술청(주막)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오랜 옛날부터 안동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는데,
현재는 도시로 많이 떠나고 약 40여 호만이 남아 있다.
안동김씨가 세거하게 된 연유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인 1519년
영상공 김석(1495-1534)이 기묘사화를 피해 서울에서 외가인 이곳
괴산 문광면 전법리로 피신했다가 이곳에 묘소를 모신 뒤 후손들이 세거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능촌에 가면, 이곳에 살다간 이들이 마을 북동쪽 개향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 백현능원(柏峴陵苑)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2006년에 안동김씨 제학공파 괴산 입향조인 영상공 김석의
선친인 김언묵 이하 24위를 한 곳에 모신 곳이다. 묘원 제2단에는
백곡의 고조할아버지인 김석, 증조할아버지인 김충갑의 묘소가 있으며
, 제3단에는 친할아버지인 김시회의 묘소가 있으며,
제3단과 4단에는 각각 아버지 김치와 본인의 가묘도 마련되어 있다.
취묵당은 능촌 마을과 인접한 개향산을 넘어 괴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취묵당은 백곡 김득신이 문과에 급제하던 1662년(현종 3, 59세)에
능촌리 충민사 옆 괴강가에 건축하고 독서당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괴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멋들어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로 내면은 통칸 마루,
사방 난간으로 되어 있으며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1979년 완전 해체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개향산 언덕위 취묵당
취묵당에 걸린 괴강의 풍광
취묵당 안에는 취묵당 중건기 2개가 현액으로 걸려 있다. 그에 따르면, 1
차 중건은 임자년인 1792년에 이루어졌다. 허물어진 것을 후손들이 중건하였는데,
이때 3칸으로 증축하였다. 그뒤 세월이 흐르면서 취묵당을 찾는 발길도 뜸해지고
관리도 소홀해지면서 허물어졌다. 그래서 1912년(융희 기원후 5)에 다시 중건하여 보존되다, 1
979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동안 김시민장군의 사당인 충민사(충북 기념물 제12호)의 일부 건물로
관리되어 왔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2007년 9월 7일
충북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면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건물 안에는 중건기, 각종 시문 등을 새긴 12개의 현액이 있다.
백곡 김득신이 쓴 ‘취묵당’ 현판과 후손 김교헌이 쓴 ‘억만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다만, 전면 기둥에는 백곡의 <용호(龍湖)> 시를 양각한 주련이 걸려 있다.
- 용호(서울 용산 앞 한강) -
古木寒雲裏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秋山白雨邊 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치네
暮江風浪起 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없어진 주련 부분)
漁子急回船 어부는 급히 뱃머리 돌리네
이 시는 서울 용산에 있는 정자에서 지은 절구시이다.
우연히 효종이 이 시를 보고 극찬하였으며, 화가에게 이 시의 풍경을 병풍에다
그리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백곡의 대표적인 시이나,
이 때문에 노론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2구는 당시의 사회 정경의 소슬함과 참담함을,
3,4구는 당쟁의 풍랑을 피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결국 숙종이 ‘시인의 즉흥시’라 하여 불문에 부쳐지긴 하였으나,
아무튼 17세기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회화적 묘사임에 틀림없다.
취묵당 옆에는 백곡이 거처하던 초당이 있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다만, 백곡의 여러 글과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초당이 있던 곳은 아버지의 옛 집이 있었고 할아버지 김시민의 자취가 남아 있던
개향산 입구 언덕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푸른 절벽이 병풍 처럼 서 있었고
괴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취묵당에서 그
리 멀지 않은 곳으로 괴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초당은 사라졌지만, 취묵당의 자연은 아름답다. 백곡이 흠뻑 취할만도 하다.
개향산 남쪽 언덕 위에 자리잡은 취묵당은 괴강의 물소리를 온 몸으로 받고 있다.
왼쪽으로 성불산이 보이고 전면 멀리 괴강의 물줄기가 아련히 사라진다.
취묵당에 앉아 그의 시를 읊어본다.
- 붓을 달려 짓다 -
開香山口結茅庵 개향산 입구에 지은 띠집,
日夜牕間透翠嵐 밤낮으로 창 사이로 푸른 기운이 스며드네.
明月欲沈花滿地 밝은 달은 지려하고 꽃이 땅에 가득한데
枕邊孤夢落江南 베갯머리의 외로운 꿈은 강남 땅에 떨어지네.
野叟驚眠曲檻西 시골 노인은 굽은 난간 서쪽에서 잠을 놀라 깨니
夕風驅雨黝雲低 저녁바람이 비를 몰아서 검은 구름은 나직하네.
寒聲日夜無時歇 밤낮으로 차가운 소리 그칠 때가 없으니
百尺樓前峽水啼 백척 누각 앞에서 골짜기 물이 우는 소리라네.
이 시는 각각 초당과 취묵당에 관한 시이다. 밤낮으로 창 사이로 푸른 기운이
스며들고 지는 달에 꽃잎이 가득 떨어진 초당 띠집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또한 취묵당 난간 서쪽에서 자다 깨어보니 저녁바람이 검은 구름을 몰고 오는데,
괴강의 물소리는 그치지 않는 취묵당의 정취가 지금도 그대로이다. 취
묵당에 앉아 백곡이 듣던 괴강의 물소리는 지금도 그대로이건만, 그
는 간 곳 없고 시만 남아 우리의 발길을 이곳으로 안내할 뿐이다.
취묵당 가는 길은 능촌에서 가는 길과 충민사를 통해서 가는 길이 있다.
능촌 가는 길은 괴산읍에서 제월리를 지나 배들다리를 건너기 전에 좌회전해서
능촌 개향산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으나, 이 길은 찾기 어렵다. 그
보다 좋은 길은 배들다리를 건너 수안보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조금 가다 보면,
왼쪽으로 강 건너 산 아래 눈에 띠는 정자가 보인다. 그것이 바로 취묵당이요,
취묵당을 품고 있는 산이 백곡이 사랑했던 개향산이다.
이내 직진하면 곧 왼쪽으로 충민사 입구가 나온다.
괴산읍 능촌리 57번지에 위치한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1554~15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처음에는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한 김제갑(1525~1592)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조선 선조 때 건립된 것인데,
진주 충민사에 모셔져 있던 김시민의 위패가 1866년(고종 3)에 강제 훼철되자 후에
이곳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 충주 살미면 무릉동에 있던
김시민의 묘소를 이곳 능촌으로 옮겨,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성역화하고
충민사라 이름 지은 것이다. 현재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12호(1976. 12. 21)로 지정되어 있다.
취묵당 옆 충민사(백곡의 할아버지 김시민장군 사당)
취묵당은 충민사에서 능촌마을 가는 후문으로 나와 왼쪽 개향산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아직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여름엔 풀들이 발길을
가로막곤 한다. 허나 한적한 산길이기에 17세기 최고의 시인을 찾아가는 길 답다.
이윽고 산 아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취묵당에 오르면, 산길을 걸으며
흘린 땀이 괴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이내 식는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괴강 물소리를 따라 조용히 시인을 만나 세속을 잊어본다.
▢ 묘소
충북 증평군에는 백곡로가 있다. 백곡 김득신을 기념하기 위한 도로인데,
백곡이 증평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부친과 본인의 묘소가 증평에 있기 때문이다.
백곡로는 증평 남차리에서 율리휴양촌과 좌구산휴양림을 가는 길이다.
삼기저수지를 따라 나있는 백곡로는 아름다운 산길이다.
백곡로 끝자락에 율리(밤티)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율리휴양촌 위
밤티길을 따라 골목길을 따라 산으로 조금 오르면 묘소가 나온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것은 5월초 어느 봄날이었다. 묘역에는 이름 모를 노란꽃과
자주빛 제비꽃,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을 더듬게 하는 할미꽃이 어우러져 장관이다.
좌구산 산라락은 초록으로 물들고 새 생명의 에너지가 샘솟고 있었다.
삼가저수지와 백곡로
야생화 사이로 우뚝 우뚯 솟아 있는 비석과 망주석들은 오랜 세월 풍상을
이긴 듯 마른 이끼로 뒤덮여 있어 꽃들과 잘 어울린다. 그곳에 바로 백곡 부자가 묻혀 있는 것이다.
묘역 위쪽에는 백곡의 아버지인 김치의 묘소가,
그 아래에는 백곡이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백곡의 묘비는 숭정 기원후 62년
, 즉 1689년에 세워진 것이다. 백곡이 1684년에 잠들었으니, 5년 뒤 세운 것이다.
320년 전에 세운 석물들이 세월에 얼룩지고 검은 반점의 이끼 옷을 입고 있어
고색창연하다. 모두 약간씩 기울어져 있다. 관리 소홀로 탓하기 전에,
그냥 세월이 흐른 대로 기울어져 있어 자연스러움이 더 좋다.
최근에 세운 묘비도 있지만, 맛과 멋이 없다.
김치의 묘소는 1957년에 세운 묘비와 큰 키의 문무인석, 망주석이 갖추어져 있으나,
백곡은 아버지 앞이라 그랬는지 오래 된 망주석이 없다.
최근 세운 망주석이 양 옆으로 서 있다. 문무인석도 동자석으로 대신하고 있다.
죽어서도 아버지 앞에서 예의를 갖추기 위함일까.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백곡은 그곳에 누워 있으니, 그래서 묘역의 야생화들이
더욱 아름답고 좌구산 산자락 초록이 더 짙게 물드는지도 모른다.
한 시대 자연을 벗하며 살다간 시인은 그렇게 누워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누워있는 백곡 묘소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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