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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 4형제 모두 죽여 외척 씨를 말리다
왕권 강화 위해 왕자의 난 역전 이끈 민씨 일가 본보기 처형
왕의 ‘거친 생각’과 외척의 ‘불안한 눈빛’, 그걸 지켜본 왕비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태종(유동근 분)의 즉위식 장면. 태종 이방원의 오른쪽은 원경왕후 민씨(최명길 분)다.
신생국 임금은 선정을 베풀기가 어렵다. 어떤 나라이든 건국 초기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판친다. 착하게 다스리다가 망할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 지도자라면 때때로 잔인해져야 한다고 했다. 신생국은 나라를 지키고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왕이 잔인한 짓을 벌이더라도 결국 ‘위대한 군주’라는 평판을 얻게 된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그런 임금이었다. 태종의 과거시험 동기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방원은 전무후무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었다. 그는 고려 우왕 9년(1383)에 실시된 문과에 붙었다. 장원급제는 김한로, 훗날 태종이 세자 이제(양녕대군)의 장인으로 삼은 인물이다. 2등은 심효생으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배다른 동생 이방석의 장인이 된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기 직전에 병조판서로 임명한 박습도 동기였다.
이방원은 이 동기생들을 권력의 제물로 바쳤다. 이방석의 후견인이자 정도전 일파였던 심효생은 1398년 ‘왕자의 난’ 당시 1순위로 참살했다. 박습은 다소 억울했다.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역적으로 몰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 태종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목을 베었다. 사돈 김한로는 이방원과 오랜 세월 친분을 나눈 동기였다. 하지만 그는 태종이 금한 세자의 애인을 몰래 궁에 들여주는 바람에 세자 교체의 빌미를 제공하고 본인도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를 가장 많이 본 것은 공교롭게도 왕비의 혈육, 외척이었다. 원경왕후와 민씨 일족은 이방원이 왕좌를 차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나 즉위 후에 외면하고 잔인하게 척결했다.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 것이다. 태종 임금의 ‘거친 생각’과 외척 민씨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원경왕후….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재상가 민씨 집안과 신흥 무인 가문의 혼사
▎KBS 사극 [용의 눈물]을 통해 재연된 제1차 왕자의 난. 앞줄 왼쪽부터 이숙번 역의 선동혁, 태종 이방원 역의 유동근, 조영무 역의 장항선. 뒷줄은 하륜 역의 임혁(가운데), 정집사 역의 정일모(오른쪽).
원경왕후 민씨는 1365년 여흥(여주)에서 민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민제는 학식이 뛰어난 관리였다. 우왕 원년부터 성균관 사성이 돼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런데 가르치는 틈틈이 사윗감도 골랐던 모양이다. 1382년 이방원이 진사시를 통과해 성균관에 입학하자 민제는 눈여겨봤다. 1367년생이니 둘째 딸과 얼추 나이도 맞았다.
물론 집안도 맞춰봐야 한다. 그 시절 지배층의 혼사는 무엇보다 가문 궁합이 중요했다. 여흥 민씨 일족은 고려 후기에 과거급제자를 대거 배출하며 신진사대부로 각광받았다.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집안이었다(세종대왕의 학구열과 천재성도 어머니 원경왕후의 혈통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1308년 충선왕이 교서를 내려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누대의 재상가)’을 지정했는데, 그 15개 가문에 여흥 민씨도 당당히 포함됐다([고려사] 세가 ‘충선왕 복위년’). 민제의 증조부와 조부 또한 찬성사(정2품), 판밀직사사(종2품) 등 고위직을 지냈다. 혼처로 어디 내놔도 나무랄 데 없는 명문가였다.
민제가 볼 때 이방원 집안은 가문 궁합이 좋았다. 서로 보완하는 상생의 관계였다. 방원의 아버지 이성계는 1380년 황산대첩으로 왜구를 섬멸하고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학문이 출중한 여흥 민씨로서는 명망 있는 신흥 무인 가문과의 통혼으로 든든한 배경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 말처럼 어지러운 난세에 무력의 뒷받침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민제는 혼사를 통해 일족을 보위할 무력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성계도 흡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산대첩 이후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문관들과의 교류가 많아졌다. 그는 고려를 개혁하고자 하는 신진사대부들의 주목을 받았다. 재상지종의 명문 사대부가와 사돈을 맺는다면 시골 무장 집안이라는 업신여김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민제는 방원이 사부로 받드는 성균관 사성이었다. 똘똘한 다섯째 아들이 문관으로 출세하려면 제 일처럼 뒤를 봐 줄 후견인이 필요했다.
1382년 이방원은 민제의 둘째 딸과 혼례를 올렸다. 신랑은 16세, 신부는 18세였다. 이듬해 방원은 가문 최초로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이성계는 감격해 대궐 뜰에 절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자식 가운데 드디어 문관이 나온 것이다. 후일 제학에 임명됐을 때는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 인사 명령서)를 여러 번 읽게 했다. 그는 다섯째 아들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다. 연회 때마다 불러 빈객과 한시를 주고받게 했다([태조실록] 총서).
민씨 부인은 한동안 자식을 생산하는 데 전념했다. 그녀는 이방원과의 사이에 공식적으로 4남 4녀를 뒀다. 다산했으니 순탄했을 것 같지만 속사정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처음에 딸 둘(정순공주·경정공주)은 그럭저럭 낳아서 길렀다. 그런데 1388년 위화도 회군부터 1392년 조선 건국까지 시대의 격변에 휘말리는 동안 민씨 부인의 가정사도 몸살을 앓았다.
아들 셋을 연달아 출산했지만 모두 일찍 가슴에 묻은 것이다. 그 슬픔과 고통을 민씨 부인은 견뎌냈다. 세자 자리를 놓친 남편을 다독거리는 한편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그 시절 여인의 할 일을 했다. 1394년 이제(양녕대군)가 태어나자 부인은 또 일찍 죽을까 봐 친정에 맡겼다. 2년 후에 낳은 이보(효령대군)도 병약해 궁 밖에 내보내 길렀다. 모유 수유를 빨리 끊고 아들을 더 가지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이도(세종)가 태어난 것은 1397년의 일이었다. 이방원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의 대업 위해 전면에 나선 민씨 부인
▎부자간 갈등이 심했던 태종(이방원 분)과 양녕대군(이민우 분), KBS 사극 [용의 눈물]의 한 장면이다.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핍박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다.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늘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바깥에 나갈 일도 없고 집에서 무료하던 차에 나는 대비(원경왕후)와 함께 갓난아이를 돌봤다. 안아 주기도 하고 업어 주기도 했다. 아기가 무릎 위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도타워 다른 자식들과 달랐다.”([세종실록] 1419년 2월 3일)
상왕의 육아 회고담이다. 22년 후 왕위에서 물러난 이방원이 세종과 양녕대군, 신하들을 불러 지난날을 돌아본 것이다. 1397년 셋째 아들 이도가 태어날 무렵 이방원은 정치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세자 이방석의 장래를 위해 존재감이 큰 그를 제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울적하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이방원은 집에 납작 엎드려 민씨 부인과 함께 지냈다. 이도의 탄생은 정치적 고난에 처한 아비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갓난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면서 가정에 평화가 깃들고 부부의 정 또한 돈독해졌을 것이다(그때 화목한 가정에서 도타운 사랑을 받은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큰 인물이 된다. 성군 세종대왕이다).
민씨 부인도 그제야 홀가분한 처지가 됐다. 서른셋의 나이에 아들딸 여럿을 건사했으니 할 도리를 다했다는 만족감이 들었을 것이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발언권을 키운다. 민씨 부인은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남편의 대업을 도모했다. 그녀는 지혜롭고 담대했다. 현명한 조언과 과감한 행동으로 이방원의 입지를 180도 바꿔놓았다.
“전쟁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그 전쟁은 정당한 것이다. 무력 이외에 희망이 없다면 그 무력은 신성한 것이다.”(마키아벨리, [군주론])
1398년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은 서구의 ‘마키아벨리즘’에 비춰보면 정당하고 신성한 것이었다. 정도전 일파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싸우는 것 말고는 살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전개 과정을 뜯어보면 민씨 부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侍衛牌)를 폐지한 것이 이미 10여 일 됐다. 정안군도 군사를 해산시키고 군영의 무기를 불태웠는데 부인이 몰래 병장기를 빼돌려 변고에 대응할 계책을 세웠다.”([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안군(靖安君)은 왕자 이방원의 봉호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초에 여러 왕자와 종친들을 각도의 절제사로 삼아 군사의 징발과 통솔을 일임했다. 절제사는 도내 군적에 오른 장정들을 번갈아 가며 자신의 군영으로 불렀다. 이 군대를 시위패라고 불렀는데 왕자와 종친들의 사병 노릇을 했다. 정도전은 시위패를 나라의 군대로 만들려고 통일된 진법 훈련을 했다.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속내는 정적들의 사병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무기 빼돌리고 정보 캐내 이방원 사지에서 구해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능을 합쳐 이름 붙인 곳이다.
정도전 일파의 집요한 압박에 이방원은 시위패를 돌려보내고 무기마저 불태워야 했다.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민씨 부인은 병장기를 빼돌려 숨겨놓았다. 실로 대담한 행보였다. 걸리면 처형감이었다. 그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무장해제는 적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뜻이다. 저들은 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숨통을 끊으려고 할 것이다. 변고를 예측한 민씨 부인은 무기를 확보하고 대응에 나섰다.
과연 10여 일 후 정변 징후가 포착됐다. 1398년 8월 26일(음력) 태조 이성계의 병환이 심해져 왕자와 종친들이 근정문 밖 행랑에서 숙직했다. [태조실록]에는 그날 정도전과 세자 측이 왕자들을 척살하려 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도전·심효생 등이 남은의 첩이 사는 송현동 안가에 모여 음모를 꾸미고 세자 이방석, 부마 이제, 도진무 박위 등이 태조의 명을 내세워 왕자들을 궁궐 안으로 유인해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을 민씨 부인이 입수했다.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에 남동생 민무질이 누나 집에 찾아왔다. 남매가 마주 앉아 긴한 이야기를 나눈 뒤 부인은 종 소근을 남편에게 급파했다. 민씨 부인의 배와 가슴이 갑자기 아프니 어서 들어오라는 전갈이었다. 이방원은 숙부 이화가 챙겨준 청심환을 들고 속히 달려갔다. 집에는 부인과 처남, 그리고 또한 사람이 정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참찬 이무였다.
이무는 정도전 일파에 속했지만 민무질과도 가까운 인척이라 왕래했다. 민씨 남매는 이무로부터 정도전과 세자 측의 정보를 캐고 있었다. 민무질을 따라온 이무는 정안군을 만나고 먼저 돌아갔다. 음모의 윤곽을 파악한 이방원은 민씨 부인과 대책을 의논했다. 일단 숙직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형들에게 경고하고, 낌새가 이상하면 빠져나와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남편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자 부인은 지체 없이 무기를 꺼내러 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이방원은 큰처남 민무구를 이숙번에게 보내 군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얼마 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책사 하륜의 조언대로 안산군수 이숙번을 투입할 작정이었다. 이숙번은 때마침 정릉(신덕왕후 강씨의 능)에서 사역하기 위해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정안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일은 손바닥 뒤집듯 쉬우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성현, [용재총화])
이윽고 초경(오후 7~9시)에 궁에서 사람이 나와 왕자들에게 입궐하라고 했다. 태조가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단, 종자(從者)는 대동할 수 없었다. 이방원은 궁문에 등불을 밝히지 않은 게 의심스러웠다.
그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서문 밖으로 말을 달렸다. 왕자와 종친, 측근들이 속속 합류했다. 정릉에서 사역하던 군사들도 달려왔다. 그들은 민씨 부인이 내놓은 병장기로 무장했다. 하인들은 막대기를 들었다. 왕자의 난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방간의 난’ 때도 주저하는 남편 설득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민무질의 묘.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이방원은 결국 정도전 일파와 세자 이방석 등을 모조리 죽이고 거사를 성공시켰다.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였다. 최초 거병한 군세가 수십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적들이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오히려 정안군이 낭패를 볼 뻔했다.
민씨 부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패할 경우 남편과 함께 죽고자 경복궁 남문 밖으로 나아갔다. 도평의사사와 의흥삼군부 사이 관청가 한복판에, 문과 무를 다스리는 이 나라의 중심부에 정안군이 우뚝 서 있었다. 믿음이 갔다. 하인이 죽은 정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왔다. 민씨 부인은 승리의 확신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왕자의 난’ 당시 이숙번이 큰 공을 세웠다지만, 부인이 아니었다면 이방원은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무기를 챙기고 정보를 캐고 동생들을 움직여 정변을 수세에서 공세로 바꿨다. ‘방간의 난’도 마찬가지였다. “골육이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다. 내가 무슨 낯으로 응전하겠는가?”([정종실록]1400년 1월 28일)
1400년 회안군 이방간이 박포의 부추김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 형 정종은 허수아비 임금이었으니 동생이자 실권자인 이방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방원은 친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일 순 없다며 싸움을 망설였다. 이화·이천우 등 종친들이 응전을 촉구했지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이때 민씨 부인이 나섰다. 대의로 남편을 설득하고 갑옷을 꺼내 입힌 것이다. 이방원은 넷째 형 회안군을 꺾고 난을 진압했다.
이성계가 경처(京妻) 강씨의 보좌를 받아 대업을 이뤘듯이, 이방원도 민씨 부인의 활약에 힘입어 왕좌를 차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하지만 태조와 달리 태종은 현실정치에 능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토끼를 잡았으니 이제 사냥개를 삶아 먹을 차례다. 너무 욕할 건 없다. 단지 게임의 법칙일 뿐이다. 권력을 잡기 전과 후의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은 그래서 무정하고 뻔뻔하다.
이방원은 1400년 11월 정종의 양위로 새 임금이 됐다. 태종은 신생국 조선을 안정시키려면 무엇보다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사병 혁파, 지방관 파견, 호패법, 육조직계제 등을 순차적으로 추진했다.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예방 차원에서 뿌리를 뽑았다. 왕비와 일등공신을 배출한 민씨 집안은 1호 제거 대상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즉위하자 후궁을 여럿 두고 가까이했다. 신빈 신씨, 선빈 안씨, 의빈 권씨 등 9명이나 됐다. 남편의 축첩(畜妾) 놀음을 조강지처는 좌시하지 않았다. 임금의 체통을 들먹이며 당신이 누구 덕분에 왕위에 올랐느냐고 따졌다. 단순한 사랑싸움이 아니었다.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원경왕후의 발언권이 커졌다. 그것이 민무구·민무질 등 처남들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왕의 귀에 경고음이 울렸다. 이제 손볼 때가 됐다.
태종은 치밀했다. 사냥을 시작하기 위해 그는 우선 덫을 놓았다. 1406년 갑자기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고작 13세였다. 신하들은 적극적으로 양위를 만류했다. 자신들의 충성심을 알아주십사 한 것이다. 하지만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참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를 바랐다.
야심만만했던 정략 결혼의 슬픈 종말
세자 이제는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숙들과의 관계가 무척 친밀했다. 1404년 이제가 세자에 책봉되자 민무구·민무질은 권신으로 떠올랐다. 세상은 그들을 차기 임금의 후견인으로 지목했고 권력을 쥐여줬다. 그러니 태종의 양위 선언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민씨 천하가 어른거려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매형의 덫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다음 수순은 몰이꾼들로 하여금 포위망을 좁히게 하는 것이었다. 민무구·민무질이 양위에 미온적으로 나오자 비난 여론이 형성됐다. 1407년 영의정부사 이화가 상소를 올려 민씨 형제를 탄핵했다. 이화는 이성계의 배다른 동생으로 전부터 이방원의 의중을 대변해왔다. 그의 상소에는 놀라운 고변이 담겨 있었다.
“민무구 등이 주상께 아뢰기를, ‘세자 이외에는 똑똑한 왕자가 없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또 전하가 곁에 계신데도 신극례를 부추겨 친아들이 먹으로 장난친 종이를 찢게 하고 ‘제왕의 아들 가운데 똑똑한 자가 많으면 난을 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왕자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니 저들을 국문하여 난을 막으소서.”([태종실록] 1407년 7월 10일)
이화는 민무구 형제가 똑똑한 왕자를 죽이려 했다고 주장했다.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충녕대군을 겨냥한 도발이었다. 사태는 일파만파 번져 나갔다. 태종은 민무구·민무질의 공신록권을 빼앗고 각각 여흥과 대구로 유배 보냈다. 장인 민제를 봐서 목숨만은 보전해준 것이다.
그러나 1408년 민제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죄목을 공식화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협유집권(挾幼執權)! 어린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지난날 정도전에게 씌운 혐의를 적용했다. 1410년 태종은 제주도로 옮겨간 처남들에게 자결을 명했다.
가문의 재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415년 이방원은 아내의 남은 동생 민무휼·민무회에게 마수를 뻗쳤다. 왕은 과거 왕비의 몸종(효빈 김씨)이 자기 아들(경녕군 이비)을 임신했는데 민씨 일족이 추운 곳에서 낳게 해 모자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또 다시 왕자를 제거하려 한 일로 엮은 것이다. 국문장에 끌려온 민무휼·민무회는 압슬 등 참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형들이 죄 없이 죽었다’는 말을 세자에게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두 사람도 형들처럼 유배지에서 자결을 명받고 죽어야 했다.
왕비 민씨는 기가 막혔다. 남동생 4형제가 몽땅 매형에게 목숨을 잃었다. ‘재상지종’ 민씨 집안이 멸문할 지경이었다. 조강지처에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맏아들 이제는 원로대신의 첩을 빼앗아 같이 살다가 폐세자의 치욕을 당했다. 모든 게 허망했다. 병석에 누운 원경왕후는 1420년 세상을 떠났다. 야심만만했던 정략결혼의 슬픈 종말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외척들의 말로를 본보기 삼아 누구도 왕권을 넘볼 수 없게 만들었다. 세종비 소헌왕후의 집안도 무사하지 못했다. 새 왕비의 아버지 영의정 심온은 아랫사람들이 군권을 가진 상왕 태종에게 병력 보고를 하지 않는 바람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이방원은 새어머니 신덕왕후, 아내 원경왕후에 이어 며느리 소헌왕후의 집안까지 끝장냈다. 경복궁에 왕비 3대의 피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은 신생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조선의 실질적 창업자로 추앙받았다.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첫댓글 나는 왕이 정말 싫어요.
범부로서 카르페디엠하고 싶어요.
내 형제가 그렇게 죽었다면 평생을 와신상담하며 복수심에 치를 떨고 살았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