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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안개」의 시적인 배경은
당시 경기도 시흥리의 벌판에 막 들
어서기 시작한 공단지역으로 보입
니다. 현재 기아자동차 공장 등이 들
어선 시흥공단쯤으로 보입니다.
한강은「붉은 닻」을 구상할 때에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했다고 합니
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사는 곳은 인천 어디쯤으
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경기도 시흥
벌판의 변두리나 인천 변두리나 생
활환경은 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형도의「白夜」라는 시를 보면,
<仁川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
고/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하늘
은 딱딱한 널판지처럼 떠 있다./가
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손쉽
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싸
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오>
르는 풍경과,
한강의「붉은 닻」에 묘사되고 있
는 동네 풍경은,
<밤이 되면 어린아이들도 흩어졌
다.불빛이 휘황하게 흔들리고 젊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떠들썩했던
그 길에는 을씨년스러운 어둠의 뭉
텅이들만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학교가 있던 빈터는 묘지처럼 고요
했으며, 가정집도 없어 불 켜진 곳
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골목은 등화
관제 혹은 전염병 따위의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냈>(271p)던 분위기
와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삶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배태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유년
시절은 더욱 그러해서 희망보다는
허기를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런 삶의 풍경은 삶의 자양분이 되지
를 않고 오히려 삶의 부패성분으로
자리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변두리 풍경, 기형도의 시흥벌
판에서 피어난 안개는 시인에게 그
곳은 <안개의 聖域>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그러나 그 성역이라는 것이
별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
이 지나면 다 알아버리게 되는 삶의
한 풍경들이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보
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니다 보면 별 것도 아니라
고 말하면서,
<습관이란/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멀리 송전
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
지/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는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개>는 삶의 풍경을 감춰
주기도 하지만 그 풍경을 드러내주
는 오브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렇다면 <안개>에 의해서 가려지는
것은 무엇이고, <안개>에 의해서 드
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더불어 시인이 <안개>로 가리고 싶
은 것은 무엇이고, <안개> 때문에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들이 굳이 그
사건이 <안개> 때문이 아니라고 강
변하는 것은 왜일까?
<몇 가지 사소한 사건> 즉 <한밤중
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고, <지
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
가 얼어죽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안개>에 의해서 보여지는 풍경은
그대로 삶이 되지만, <안개>에 의해
서 가려지는 것은 삶의 풍경에서 지
워지고 있는 것이 기형도의 <안개>
입니다. 거기에는 삶의 정확성이 없
고 <안개>의 모호성과 우연성만이
존재하고 있는 삶입니다.
그것은 시인 자신도 어쩔수가 없이
감내해야 되는 삶의 풍경일 것이라
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모호성과
우연성은 1980년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 맞물리기도 합니다. 그 <안
개>를 헤집고 뭔가를 찾아낼 수 없
다는 절망감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기형도의 <안개>가 그러하다면, 변
두리 삶의 풍경 속에 서식한「붉은
닻」의 어머니와 형제(동식/동영)
는 고단한 삶 속에서 을왕리 해수욕
장의 바다를 접하게 됩니다. 그곳
은 기형도의 <아침 저녁으로 샛강
에 자욱이 안개가>끼는 곳이 아니
라,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닻들이 불타고 있었다. 석양이 비추지 않는 곳은 완벽한 암흑이었다. 이제 거기서 무엇이 일렁이고 있는지 알 수 없>(299p)
는 그런 바다입니다.
기형도의 시선은 보이는 대로 받아
들이는 데에 비하여, 한강의 시선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고>, <날카로운 닻들이 불타>며, <석양이 비추지 않는 곳은 완벽한 암흑이>라는 풍경을 보고 있지만, 그러나 <거기서 무엇이 일렁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그럽니다.
이 지점에서 기형도의「안개」에 나오는 화자가 있었다면, <거기서 무엇이 일렁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안개」에 나오는 화
자는,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보이면 안보이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붉은 닻」의 화자는 일단 의심을 하면서 새롭게 의미를 찾고
자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
면서 끝내는,
<파도가 들어오고 있었다. 일순 그 고요한 물결이 닻들의 무리를 어루
만지며 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수많은 운명들이 소리 없이 해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물결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동식은 동영의 구두들을 뒤로 한 채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
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어머니' 하
고 부르려 하는 순간, 먼저 그녀의 입술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오
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어서,
<불타는 닻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
고 있었다.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
자가 그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걸
어 나오는 모습이 보>(300p)면서
어머니와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
자>인 아버지가 만나는 것을 클라
이막스로 장식합니다. 이는 화해이
기도 하며 죽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죽지 않았던 남편(아버지)을 이제는
허허롭게 만나는 풍경이기도 합니
다.
그렇게 보내야만이
산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제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기형도와 한강의 변두리 풍경은
서로가 비슷한 스케치를 하면서,
안개와 바다라는 필터를 통해서
삶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기형도는 안개 속에서
안개를 걷어내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한강은 바닷가의 붉은 노을 속에서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를
기어코 찾아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피어난 시흥벌판의 안개는 피고지고를 하다가,
1990년대에 을왕리 해수욕장의 바다로 나와서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를 기어코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안 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
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
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
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
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
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
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
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
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
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
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
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
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
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
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
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
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
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
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
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
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
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
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