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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 간의 장관급 회담 한번으로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를 침략국이라고 비판해온 미국이 이 표현을 공식 문서에 올리기를 거부하고, 지난 3년간 무기및 재정 지원을 해온 우크라이나와는 손절할 태세다.
이같은 판도 변화에 러시아측은 표정 관리에 바쁘고, 우크라이나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앞장서서 미국 때리기에 나섰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미-러 장관급 회의/사진출처:러시아 외무부 (사이트)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우크라 광물(개발) 협정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서명 거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승리 플랜'의 일환으로 서방 측에 희토류 등 광물의 공동 개발안을 제시했는데, 이를 수락한 트럼프 대통령이 내민 협정 초안을 단칼에 거부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정 초안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건넨 베네트 재무장관을 홀대했다며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미-러 사우디 고위급 회담과 함께 미-우크라 광물협정으로 시작될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그의 '이니시어티브'(주도권)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게다가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러 사우디 회담에 대해서도 비판의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으니,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화가 날만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사진출처:페북 @DonaldTrump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세계관이다. "내가 백악관 주인이었다면 전쟁을 벌어지지 않았을 것" "집권하면 24시간내 전쟁을 종식시킬 것" 등의 호언장담은 선거 공약이기도 했지만, 가치 중심의 기존 세계 질서에 대한 그의 반감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정학적, 경제적 '거래'(딜, 협상)에 의해 세계 질서가 재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세계관은 덴마크령 그린란드의 장악과 캐나다 통합, 멕시코만 호칭 변경 등에 대한 발언으로 드러났고, 철광석 등 특정 종목의 관세 부과및 예고, 일반관세, 상호관세 등 '무역 전쟁'으로 현실화하는 중이다. 취임 한달 만에 세상을 뒤집어놓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덩달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시각도 조 바이든 전임 행정부와는 180도로 달라졌다. 전쟁은 아무리 좋은 전쟁이라도 나쁜 평화보다 못하다고 본다. 미국의 국익 관점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사에서 "진행 중인 모든 전쟁을 끝내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일군 대통령으로 여러분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집권 1기 최고의 전략가로 통했던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 취임식을 맞아 가진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트럼프의 베트남전'으로 변할 수 있다"며 "존슨 대통령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을 후임인 닉슨 대통령이 이어받는 바람에 '닉슨의 베트남전'으로 역사에 기록됐다"고 훈수를 뒀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마을에 새로운 보안관이 왔으니,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즉시 설명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새로운 보안관'론은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입에도 자주 올랐다.
잘 알다시피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한 뒤 1973년 1월 남북 베트남과 3자 '파리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철수했다. 그리고 베트남은 결국 공산화됐다. 하지만 협상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와 레득토 전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원이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나을까?
'좋은 전쟁 vs 나쁜 평화' 논쟁은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1그해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뒤 체코슬로바이카의 독일인 거주지인 주데테란트를 욕심낼 때, 영국 등 4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이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평화협정이 바로 '뮌헨 협정'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또 다시 대규모 전쟁 발발의 위기를 느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재임:1937~1940년)가 히틀러를 만나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 그는 그해 9월 30일 "유럽 대륙의 평화를 지켜냈다"는 말로 '뮌헨 협정'을 한껏 포장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로부터 6개월 뒤, 알토란 같은 주데테란트 지역을 독일에 양보했던 약체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키고, 1년 뒤(1939년 9월)에는 폴란드 국경을 넘어서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나쁜 평화'가 더 큰 전화를 불러온 것으로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을 넘긴 2024년 3월 미국에서도 "추악한 평화가 아름다운 전쟁보다 낫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러시아어판)에 따르면 미국의 군사기업(PMC) '블랙워터'의 창립자인 에릭 프린스는 유튜브에 게시된 팟캐스트에서 "우크라이나는 현재 인구 통계학적으로 붕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이미 다음 세대의 인적 자원을 갉아먹고 있다. 불쌍하다. 재래식 무기 전쟁에서는 러시아 '곰'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아름다운 전쟁'보다 '추악한 세상'을 갖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에릭 프린스 PMC 블랙워터 창업자/사진출처:위키피디아
'추악한 세상'에 대한 질문에 프린스는 "적대 행위를 동결하고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 등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주라. 미국의 납세자들은 우크라이나에 추가로 천억 달러를 내놓을 의무가 전혀 없다. 게다가 거기에는 비리가 넘쳐나고, 지원한 성과도 전혀 없다"고 답변했다.
공교롭게도 프린스 대표는 트럼프-푸틴 대통령의 첫 전화 통화 성사시 이름이 오르내렸다. 러시아에서는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금융가)에서 펀드 매니저로 일한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직접투자기금(RDIF) 대표가 미-러 정상 간의 첫 전화통화와 미-러 사우디 장관급 협상에 참여했는데, 그의 과거 미국 측 파트너가 프린스 대표였다. 신종 코로나(COVID 19)의 러시아 백신인 '스푸트니크V' 개발을 주도한 드미트리예프 대표는 2017년 트럼프 1기 백악관과 접촉한 크렘린 측 비공식적인 대리인이었다고 한다. 그때 프린스 대표와 합을 맞췄다는 것이다.
전쟁보다 평화를 주창하는 트럼프 대통령 측근은 또 있다. 밴스 상원의원 출신의 부통령이다.
그는 2024년 4월 상원 연설에서 "히틀러를 달래려는 체임벌린 영국 총리의 정책을 반복할 수 없다는 말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주 듣는다"면서 "그러나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과 같은 사건에 흥분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제3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된다는 논리다. 1910년대 유럽에서는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 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 협상'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는데,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으로 두 세력이 충돌한 게 제1차 셰계대전이다.
미 상원의원 시절의 밴스 부통령/사진출처:스트라나.ua
밴스 부통령은 또 "우리는 (대량살상무기 제조를 이유로) 2003년 이라크를 공격하기 직전과 같은 '전쟁(을 해야 한다는) 선전전'에 빠져 있다"며 "우크라이나 지원 반대는 곧 푸틴(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이며, 미국은 옳고 민주주의는 훌륭하지만, 이라크와 푸틴은 나쁘다고 하는데, 외교정책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당시 바이든 행정부를 직격했다. 나아가 자신의 이라크전 참전 경험을 토대로 "선전전에 휩쓸려 해병대에 지원해 이라크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 몇 주만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집권 2기의 실세로 알려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평화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국 무기 지원 요청을 여러 차례 조롱하고, 전쟁이 끝난 뒤 대(對)우크라 자금 지원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야 하며, 키예프(키이우)로부터 '검은 돈'을 받아온 미국의 '전쟁 로비스트'를 비판했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확정 직후에는 엑스(X, 옛트위트)에 '영국과 유럽군이 800마일(약 1만2,900㎞)에 이르는 현 전선을 따라 비무장지대를 만드는 게 트럼프의 평화안 중 하나'라고 쓴 주간지 '뉴스위크' 기사를 공유하면서 "무분별한 살인은 곧 끝날 것", "이제 전쟁광과 폭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시간이 다 끝나간다"고 댓글을 달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큰 아들 트럼프 주니어도 그 즈음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달러가 쏟아지는 흑백 '밈'을 올리고 "혜택을 잃기까지 38일이 남았디"고 썼다. 38일이란 그해 12월 17일로 예정된 선거인단의 선거날까지 남은 날짜다. 비록 형식적이지만, 선거인의 표결을 거쳐야 트럼프 후보는 '대통령 당선자'라는 직함을 얻는다.
트럼프 주니어의 젤렌스키 대통령 조롱 '밈'
◇ 트럼프 대통령의 젤렌스키 저격
트럼프 대통령 측근들의 그간 언행으로 보면, 미-러 사우디 장관급 회담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비판은 트럼프 측의 공격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저격이다.
스트라나. ua는 19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트럼프의 젤렌스키 저격'(Наезд Трампа на Зеленского) 코너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러 회담을 부정적으로 발언(비판)한 뒤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고 전했다. 스트라나.ua는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있지만, 그것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의 일"이라며 "대선에서 승리하고 취임한 후, 젤렌스키 대통령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평화를 일굴 준비가 되었다'는 등 칭찬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의아하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은 다소 감정적이기까지 했다. "국민의 지지율이 4%에 불과하지만 전쟁을 계속하려는 독재자"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튿날(19일)에도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인 '트루스소셜'에 "(공식 임기가 지난해 5월에 끝났음에도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을 겨냥한 듯) 선거를 치르지 않은 독재자"라며 "가능한 한 빨리 선거를 실시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사라질 것"이라고 악담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발언권이 없나요? 왜 오랫동안 선거를 치르지 않나요?"라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법적 정당성을 문제삼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지율 4% 발언에 대해 "오늘 아침 키예프 국제사회학 연구소(KIIS)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의 대국민 지지도가 57%로 나왔다"며 "다른 여론 조사에서는 57% 이상이라고 들었다"고 반박했다. 또 "지금 당장 나(대통령)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쏘아부쳤다. "(지지율 4%를 이야기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허위 정보(가짜 뉴스) 공간에서 살고 있다"고 면박을 줬다.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스트라나.ua는 그러나 "KIIS 여론 조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지 몇 시간 후인 19일 아침 발표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며 "대통령 지지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론조사에서 2024년 1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2개월 동안 국민 신뢰도가 52%에서 57%로 증가했다는 자료의 신뢰성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지지도가 가장 높은 사람은 발레리 잘루즈니 전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현재 영국 주재 대사)다. 그는 19일 차기 대선 참여에 대한 질문에 "부적절하다"며 "그런 상황이 오면, 공무원으로서 답변할 것이지만, 지금은 나라를 굳건히 보존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피해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더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폴란드와 튀르키예(터키), 영국 등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대국민 지지도를 조사하고, 자신과 비교하자고도 했다.
◇미국의 대(對)우크라 지원 규모의 진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또 하나의 쟁점은 미국의 대우크라이나 지원 규모.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여 3천500억 달러를 쓰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유럽(1천억 달러)보다 2천억 달러 이상 더 지출했지만, 유럽과 달리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바이든 전 대통령은 왜 공평한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을까"라며 전임 행정부를 겨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많은 돈이 어디로 간거지? 어디에 있는 거지? 회계처리한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미국)가 보낸 돈의 절반이 실종되었다고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반박은 이렇다.
"미국은 3천500억 달러가 아니라 약 1천억 달러 상당의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우리는 전쟁 무기 비용 만으로 3천200억 달러를 썼다. 1천200억 달러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2천억 달러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유럽(EU)이 댔다. 미국만 따지면, 무기 670억 달러 어치와 315억 달러의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미국의 외교 분야 NGO인 '외교관계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는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대우크라 지원 규모를 총 1천750억 달러로 추산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주장한 것보다 2배 가까이 많다.
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 '패싱' 주장에 대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사례까지 들추며 가혹한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지금보다 훨씬 일찍 협상을 시작했어야 했고, 몇 년 전(2022년 3월 이스탄불 협상)에 평화협정을 체결했어야 한다"며 "당신들(우크라이나)이 러시아와 직접 거래를 할 수도 있었는데, 안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거래를 했다면, 수도를 포함해 우크라이나의 거의 모든 땅을 지킬 수 있었고(이스탄불 협정에서는 러시아군이 2022년 2월 이전 국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편집자), 사람도 죽지 않았고, 도시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당신들은 다른 길(전쟁)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질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더욱 열받게 한 대목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친러시아적인 발언들이다.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다. 그나마 더 큰 피해가 날 수 있었는데, 모스크바가 그같은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는 키이우를 향해 많은 미사일을 발사하고 싶지 않았고, 또 그렇게 했다. 그래서 20%가 파괴됐을 뿐, 100%는 아니었다. 그들이 100%를 파괴하고 싶었다면 아마도 매우 빨리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지도에서 지워지고 있고, 사람들은 지쳤다. 사람들은 무언가(평화협상) 일어나기를 원한다."
언뜻 보면 푸틴 대통령이 한 말로 착각할 정도다.
'우크라이나전 3년째 전쟁 저널리즘'(이진희 지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사상자가 의외로 적은 진짜 이유는 푸틴 대통령의 작전 개시 명령에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22년 2월 24일 새벽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명령을 내리면서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 문화, 정신적 공간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이며 친구들 뿐만아니라 혈통, 가족관계로 연걸돼 있다"며 진격하는 군부대에 우크라이나 민간인과 민간 시설 보호를 주문했다.
이후 뱌체슬라프 볼로딘 러시아 하원(국가두마) 의장도 그해 4월 25일 "러시아군도 처음부터 유고와 이라크, 리비아 등에서 미군이 보여준대로 키예프 등을 무자비하게 때려부수는 공습과 폭격을 가했더라면, 전쟁은 이미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의 군사작전과는 달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민간 기반 시설과 민간인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선택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한 게 (전쟁을 오래 끌게 된) 실책이라는 접근이었다.
◇워싱턴 vs 키예프 설전(舌戰)
트럼프-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논쟁은 양국 주요 인사들간의 설전으로 이어졌다.
머스크 CEO는 19일 '지지율이 57%'라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아 "그렇게 인기가 높다면 (미국의) 선거 실시 주장이 매우 흡족할 것"이라고 비꼬았고, 마이크 월츠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러-우크라 양쪽 모두에서 죽음과 파괴가 뒤따르는 끝없는 파괴적 전쟁의 시대는 끝났으며,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의 반발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다"고 경고했다.
밴스 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협상) 접근 방식은 미국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비방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직격했다. 그는 "트럼프 새정부의 정책 목표는 전쟁 종식에 있다"며 "우크라이나도 유럽도 이를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 영국 총리가 1945년 7월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에게 패배한 것을 포츠담 회담 도중에 알고 귀국해야 했다"며 "전쟁 중에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이 "우리는 독립을 위해 계속 일하고 싸운다"고 강조했고, 부다노프 군정보총국(GUR) 국장은 "우리는 확고하게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시비가 외무장관도 19일 엑스(X)를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과 그들의 대통령(젤렌스키)은 푸틴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며 "아무도 우크라이나에 항복을 강요할 수 없고, 우리는 우리의 존재 권한을 방어할 것"이라고 썼다.
대통령 유고시 권한 대행 1순위인 스테판추크 최고라다(의회) 의장도 미국의 선거 실시 요구에 대해 "우크라이나에는 지금 투표용지가 아닌 총알이 필요하다"고 엑스(X)에 적었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은 민주적 절차(선거)를 통해 선출되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독립, 우크라이나인의 삶을 위한 투쟁을 이끌고 있다"며 "선거는 갈등(전쟁)이 공정하게 종식된 뒤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옹호했다.
친정부 성향의 곤차렌코 의원은 서방 주요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도 여론 조사및 비교를 주장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제안에 덧붙여 "일주일이면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것인데, 만약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가 젤렌스키 대통령보다 낮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까?"라고 반문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현실적 딜렘마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초강경 발언에 발끈하지만, 진짜 고민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9일 미국을 향해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 20기와 탄약을 추가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 게 바로 우크라이나가 처한 현실이다. 그는 "새벽 3시, 4시, 5시에 전쟁터의 군 사령관들이 전화를 걸어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이 바닥났다'고 하소연할 때 정말 미안했다"며 "지금 러시아 미사일 8기가 날아오고 있는데, 격추할 미사일이 없다고 하니, 난감하다"며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다고 뒤늦게 미-러 장관급 회담을 지지하고 평화 협상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가 끝까지 미국 주도의 평화 협상 참여를 거부하면 결론은 뻔하다. 미국의 대우크라 무기 지원 중단→전쟁 패배라는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할 가능성도 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18일 러시아에 대한 협상 지렛대로 사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러 제재를 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모스크바는 협상 참여, 키예프는 협상 불참'이라는 상황이 벌어지면, 워싱턴은 제재 해제에 나설 수도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국의 대러 제재 해제는 러시아가 세계 시장으로 다시 복귀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세계 시장에서 러시아 기업들이 처한 달러 결제에 대한 모든 제한(스위프트·SWIFT 배제)이 해제되고, 석유 및 가스 등 에너지 분야 수출이 정상화된다. 그 경우, 러시아는 전쟁 직전인 2021년이 아니라 (크림반도 병합으로 대러 제재가 시작되기 전인) 2013년의 수준으로 빠르게 세계 시장에 복귀할 수 있다. 물론 영국과 유럽연합(EU)가 대러 제재를 계속한다고 해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스트라나.ua는 내다봤다.
미국의 제재가 해제되면 러시아는 경제적 안정성을 되찾고,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EU도 미국의 제재 해제에 뒷짐만 지고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다. 경제 침체에 허덕이는 독일 등 EU 주요 국가들은 러시아와의 경제적 협력 관계를 회복하는 게 불황을 이기는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유럽 기업들도 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에 진출해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선택
미-러 평화협상 진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선택은 두가지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대러 제재 해제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고 버티는 것이다.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패배는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철수와 같은 굴욕적인 사건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 행정부가 더 이상 우크라이나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미국이 지원을 끊더라도 EU가 일부 충당하고, △현대전의 핵심 무기인 드론을 자체 생산하고 있으며, △430억 달러 규모의 외환 보유고를 갖고 있으니 당분간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또 흐리브냐 통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평화협상을 주장하는 세력을 '반역자' 프레임을 씌우면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게 홀로서기를 시도하다 보면, 오히려 러시아에서 반전 폭동이나 경제적 붕괴가 일어나 먼저 주저앉을 것이라는 기대다.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 줄까? 전황과 국민 여론, 주변국들의 움직임 등이 관건이다. 홀로서기에 대한 객관적인 전망은 어둡다고 해야 한다.
스트라나.ua의 결론은 이렇다.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 엄청난 위험을 초래한다. 그 결과가 다른 어떤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앞으로 몇 주가 지나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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