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놀라스코
그는 1182년 프랑스 남쪽의 루마 쌩 프에르라는 읍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사(騎士)였으므로 그도 어려서부터 검술(劍術)이나 창술(槍術)을 배웠고, 학문은 베르나르도 수도원에서 배웠기 때문에 자연히 수사들로부터 좋은 감화를 받고 신심생활에 힘쓰는 바가 있었다.
15세때에 부친과 사별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같은 기사가 될 바에야 예수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려고 결심하고, 그 당시 반란을 일으킨 알비파 이단 토벌(討伐)의 십자군, 몽포르의 시몬 공작(公爵)의 부하로서 종군했는데 공작은 그의 우수한 재주를 알게되어 자기가 아라곤 왕으로부터 의탁받은 왕자의 교육을 베드로에게 의탁하게되었다.
그 뒤부터 왕자와 베드로 사이에는 절친한 교제가 시작되어, 뒷날 왕자가 야고보 1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때에도 그는 가끔 왕궁에 출입하며 왕이 사치하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뜻과 백성의 사정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훈계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사라센의 노에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제하려고 결심하고, 그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도 바치기를 사양치 않기로 결심했다.
그 뿐 아니라 베드로는 확실히 그 일에 관해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1218년 8월 1일, 성모께서 그에게 발현하시어 회교도의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를 구출하는 수도원을 창설하라고 분부하셨다.
다음 날 그가 야고보 왕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하니 왕도 똑같이 그러한 성모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조금전 부터 페냐포르트의 라이문도라는 성인도 왕에게 초대를 받아 아라곤에 와 있었는데 그분도 성모 마리아로 부터 같은 말씀을 받았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된 세 사람은 대단히 놀라며 바르셀로나의 주교 베렌가리오를 방문해 자세한 말씀을 여쭙고, 8월 15일을 기해 ’메르세데의 성모 마리아회’라는 새 수도원을 창립했다.
이보다 벌써 20년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기사 여러명이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해 한 신심회를 세운 일이 있었는데
베드로 등은 그 회의 규율을 기초로 새로운 회칙을 작성하고 즉각 13인의 동료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 수도원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인가를 얻은 해는 1235년이었다.
1212년 사라센들은 유명한 톨로사의 격전에서 패배해 거의 스페인에서 소탕 당하고 겨우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베드로는 수도원 창립 후 즉시 그 지방에 가서 불쌍한 노예 400명을 위해 대금을 내고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그는 또한 "노예인 신자들에게 자유를 줘야 할 때,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을 인질(人質)로 바칠 각오를 가져야 한다."라는 회칙의 제4서원에 따라 북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대신해 쇠사슬에 결박되어 투옥 당한 일도 있었다.
그때 사라센들은 그를 죽이려고 돛대도 키도 없는 작은 배에 태워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베드로는 그러한 고난과 피로와 노령으로 매우 몸이 허약해져서 수도원 총장직을 후임자에게 넘기고 수년간의 여생을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보속으로 지냈다.
이와같이 세상에서 많은 공적을 세운 성인은 1256년, 마침 성탄절 밤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1628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