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42]울력과 들깻잎 따기 단상
#일요일 새벽 5시 6분, 난데없는 전화. 광양에 사는 친구가 남원 아영의 친구집에 도착했다며 빨리 나오라는 것이다. 허걱! 이게 무슨 일이람. 사연인즉슨, 남원에 사는 서예가친구가 인근 아로니아밭(남원 덕과)에 무수히 달려있는 아로니아 열매를 같이 따자고 SOS를 친 것이다. 오전 8시만 넘어도 더워 일을 하지 못하니 서두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광양에서 4시에 출발했단다. 아무리 그래도 날조차 밝지 않았는데, 아침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의견을 조정, 5시반 남원시청 옆 콩나물해장국을 한 그릇씩 급히 해치우고, 4명이 6시부터 일제히 작업 시작. 네 명이 작은 바케츠 하나씩을 들고 아로니아밭을 헤매기 3시간여. 루테인과 효능이 진배없다는 아로니아가 한때는 ‘인기 캡’이었는데, 지금은 푸대접 수준이다. 친구가 그 150평 아로니아밭을 산 까닭은,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300평이 넘어야 농업인으로 등록할 수 있고, 농지대장을 갖출 수 있기 때문. 말하자면 300평 이상의 논이나 밭을 실제 짓지 않으면 농민農民 자격이 없는 것이고, 직불금도 탈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막상 사놓고보니, 이게 일은 많고 수거작업도 만만찮다. 일일이 씻어 아로니아청을 담고 환을 만드는데 드는 수고로움이 친구부부를 잡을 지경이어서 계륵鷄肋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부가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인근에 사는 친구들의 노력봉사를 요청한 지 3년째이던가? 누구 하나 전화를 받으면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농촌 일은 혼자 하면 할수록 미치도록 팍팍하다. 그래서 싫든 좋든 부부는 바늘과 실이 되게 마련이다. 친구들과 네댓 시간의 노동勞動은 힘이 들어도 재밌다. 중간중간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하고, 재담才談도 꽃을 피운다. 더워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며 일에 열중하여 목표치를 대충 채우자, 밭주인 친구는 무조건 올스톱하잔다. 이것이 절의 스님들이 잘 하는 ‘울력’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노동은 즐거움도 될 수 있다. 파리올림픽의 팀 코리아 슬로건도 ‘함께 투게더’였지 않았던가. 우리말로 ‘울력’이 그것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울력, 그것이야말로 재밌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다음 기다리는 것은 먹는 시간. 샤워 후 홀가분한 심신으로 들이키는 소맥 한 잔에 이 불볕더위도 간다. 내일모레가 처서이다. 네 이놈, 더위야! 물럿거라. 네가 어찌 절기節氣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을소냐?
아로니아 잎이 다 떨어지는 10월말이나 11월초, 또 한번의 울력(전지剪枝)을 약속하고 헤어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어떤 조건이나 대가없이 친구의 밭일을‘쬐끔’이라도 도와줬기 때문일 터. 친구야, 괜히 우리 생각하고 청을 담그거나 아로니아환 만들어 안줘도 암시랑토 안헝개, 걱정이랑 허들들들 말어라. 또 곧 보자. 즐거운 일요일 오전의 일기.
# 염천지하, 삼복지절, 가마솥(찜통)더위 등 말을 많이 들어봤어도 올해처럼 날마다 피부로 실감한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입추가 넘어가고 말복이 내일모레인데도 이 더위가 가실 줄을 모른다. 제주에서는 열대야熱帶夜가 달포를 넘어섰다던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에어컨이 없었더라면 진즉 십 수명이 명을 달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오전 8시 이후부터 오후 5시 이전까지는 꼼짝할 수가 없을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모처럼 시골집에 오니 논이고 밭이고 엉망진창이다. ‘죽일 놈’의 풀 때문이다. 무릎을 넘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저 무성한 풀들을 과연 어이할꼬? 무성茂盛, 그 자체. 산소의 풀들도 벌초 생각하니 심난하고, 논두럭의 풀들도 이미 풀약 가지고는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전원田園이 장무將茂하니 호불귀胡不歸라던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첫 구절이 절로 생각난다.
허나, 눈에 띄게 반가운 것은, 뒷밭 200여평에 들깨 모종을 얻어 몽땅 심어놓고, 3주 전쯤 풀약을 했는데, 들깨가 완연히 풀들을 이기고 나선 것이다. 하여, 오늘 아침 <인간극장>이 끝나자마자 1시간여 들깻잎을 따기 시작했다. 밭에 들어서니 풍겨오는 들깨향은 또 얼마나 좋든지(고소하다, 꼬소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된다). 깻잎은 살짝 데쳐 무쳐먹어도 좋고, 장아찌를 해놓거나, 쪄먹어도 좋다. 가장 좋은 것은 갓 담은‘쌩’깻잎김치. 한 바작 따도 숨죽여 놓으니 얼마 되지 않으니 최소한 두세 푸대는 따야 하는데, 땀이 질질질 흐르는 통에 중단했지만, 따는 작업만큼은 모처럼 신선했고, 향에 취애 좋았다. 정말 요모조모 쓸모있는 우리의 식자재, 최고닷!
가을마다 어머니가 담가주신 ‘단풍깻잎김치’는 예술이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해마다 가을에 친구부인에게 달라붙을 것인가? 그 기술을 아내가 전수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구부인도 솜씨가 못지 않아 조금만 얻어먹어도 행복하다. 오죽하면 그 맛에 대한 글을 써놓았겠는가? 올해도 한 보시기만 부디 주시길. 내일 상경길에 올라가 서너 번 씻어놓고 개종개종(가지란하게) 해놓고,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리라. 현장에서 양념 챙겨주면(마늘 찧기 등) ‘맛 좀 보라’고 입에 넣어주는 그 순간, 모처럼 황홀한 가정사가 아니겠는가. 내일 저녁을 고대하는 까닭이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편지 47신]근 10년만에 맛본 단풍깻잎장아찌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