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속의 ‘진실’
박 원명화 무릇 태어난 생명은 언제가 떠나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생명의 몫을 다하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본다면 백 프로 자살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대한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그렇게 죽음을 강요당하듯 삶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든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목숨을 함부로 한 본인의 잘못이 크다 할지라도 결국 자살과 타살이 함께 공모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다.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내 가슴이 아픈 것도 그렇다. 꼭 팬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타살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멘다. 약 10년 전(1997년) 여름에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자살도 아니고 타살도 아니고 사고사였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이애나야말로 타살인 것이다. 그녀의 연인이던 도디 파예드와 함께 차에 올라타고 달리자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몰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다이애나의 차는 이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과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터널 속에서 차가 전복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야 말로 파파라치들에 의한 타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파파라치들이 찍은 다이애나의 사생활의 사진은 특종이 되고 이를 앞 다투어 보도하고 취재하려 드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세자비를 죽인 것은 파파라치 몇 명이 아니라 그 사진을 사고파는 사회전체의 잘못이기도 하다. 최진실의 죽음은 이런 사고사는 아니지만 그녀의 자살에는 그녀의 사생활을 프랑스 파리의 파파라치들처럼 캐내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그 속임수에 빠져가는 우리 사회도 문제다. 우리는 세상을 내 잣대로 보고 내 좋은 대로 생각한다. 남의 일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얘기하는 걸 즐기고,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무심하기 일쑤다.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만능 탤런트 최진실! 단아한 모습이 그 이름처럼 참해보인 「장미 빛 인생」의 맹순이로 만난 것이 얼마 전인데, 그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니? 차라리 헛소문이기를 바랬다. 이렇다 할 유서도 없이 왜 갑자기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나 역시 그 진실이 아리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문의 꼬리는 많은 보도와 입방아로 이어져 바람처럼 파다하게 퍼져 나왔다. 드라마를 그리 좋아하지 않은 편이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몇 편인가 보았다. 언젠가 결혼기념일 날 남편과 단둘이 그녀가 출연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본 일이 있다. 신혼부부 얘기였는데, 남편이 그녀를 지나치게 깜직, 발랄, 귀엽다고 극찬을 해서 괜히 심통이 나 ‘예쁘지도 않은데 자기 혼자 반한 모양’이라며 빈정댔다. 사실은 나도 진실이의 그 깜직, 발랄한 연기에 반했었지만…. 그녀의 매력은 소박한 데 있는 것 같다. 톱스타라는 화려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능청스러울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했다. 빨치산 여전사로, 이혼당한 가냘픈 여인으로, 억척스런 아내로, 발랄하고 매력 넘치는 젊은 아기씨로, 시한부 삶을 사는 엄마와 아내의 슬픈 삶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림도 그려지지 못할 복잡한 영화나 드라마가 많았다. 그녀가 뭇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배역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곤궁하던 삶을 빠져나와 보란 듯이 진짜 ‘맹순이’처럼 악착같이 근검절약하는 이름 그대로의 진실한 삶의 모습에서 갈채를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비보를 접하고 나는 하루 종일 우울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외롭게 죽어간 그녀를 다투어 보도하는 언론들의 자세와 네티즌들의 열띤 시비는 망자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아침이면 습관처럼 보던 신문은 물론, 컴퓨터의 인터넷조차도 괜히 보기 싫고 왠지 모르게 갑갑증이 나거나 살짝 짜증이 났다. 마음대로의 이유야 있었지만 딱히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불편함, 참는 것에 대한 불만이 표출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손을 타기 십상이다. 스타는 그만한 탤런트를 가진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연기에 매료되어 그들의 손짓 발짓 하나하나까지 하늘의 별처럼 좋아하고 아득한 신비로 여긴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들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인기로 먹고 사는 직업인지라 본의 아니게 야누스처럼 때마다 색조를 달리 할 수밖에 없었을 때도 있었다. 싫은 일을 하면서도 웃어야 하고, 슬퍼도 행복한 척 미소를 지어야 하는 멍울이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인기인이라는 명예 앞에 아무렇게나 편할 수도, 울분을 토할 수도 없었으니 그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인기가 올라 갈수록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의 취향과는 맞지 않은 짓도 마치 연기하듯 보여줘야 하는 이중성이 얼마나 감내하기 힘들었을까. 그렇다고 그렇게 허무하게 떠난다는 것은 그녀의 또순이 이미지에 큰 흠이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군중속의 고독’ 겉으론 화려한 스타지만 안으론 외로움에 지치는 게 스타의 본얼굴이라 한다. 만인의 연인이니, 아름다운 요정이니 하는 허사 속에 마땅히 누려야 할 개인의 사생활이 희생되는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누구도 너그럽지 못하다. 팬의 입장을 넘어 관리 대상으로 소속사의 일까지, 심지어는 영화필름 개봉 일까지 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사에, 인터넷에 홍보활동을 펼치려 드는 극성팬들로 인해 인기도 올라갈 때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엉뚱한 루머를 만들어 홍역을 치르게도 한다. 진실이만 해도 그렇다. 스타라고 하는 빛난 별빛만 바라보았을 뿐, 구름 낀 날의 진실이의 눈물에는 그 누구도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도 없이, 부모 형제를 다 뒤로 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들을 두고, 바보같이 왜 죽었느냐고 굳이 따져 묻기는 싫다. 오죽 했으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임을 잘 알면서도 떠난 것을 생각하면 그저‘불쌍하다’ ‘딱하다’ 고 한탄 할 수밖에 없다. 최진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탤런트가 아닌 자연인의 삶을 목말라 했다. ‘국민배우’ 라는 명성에 비해 한 여자로서의 삶은 비운의 연속이었다. 타인들에게 폐가 될까봐 혼자 울고,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 끝내 이승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홀로 소리죽여 울적에 주변의 어떤 사람도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다독여 주지 못했다. 아니 다독여 주기는커녕 확실치도 않는 일로 그녀를 헐뜯고 비난하기에 모두가 바빴다. 결국 최진실 역시 자살 반 타살 반일 수밖에 없다. 죽음을 자신이 선택했으니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든 원인은 다분히 우리 사회에 있다고 본다. 혼신을 다해 우리 모두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던 그 귀한 인물을 우리는 아낄 줄 몰랐던 것이다. 만인의 연인 최진실! 죽는 그날까지 화면 속에서 그 청순한 웃음꽃을 우리의 가슴에 심어주고 떠나갔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 밤하늘의 진짜 별이 되어 보석처럼 빛날 수 있는 스타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그러면서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찬바람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영국의 하이드파크 공원에는 다이애나 기념 샘물(Diana Memorial Fduntain)이 만들어져 있다. 띠를 두른 형태로 잔디 위에 설치된 돌 조각 위에 샘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그것처럼 진실이의 발자취가 남겨진 자리에도 ‘국민배우 최진실’을 위한 작은 기념비 하나라도 세워졌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