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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4일(월)
* 시작 기도
(시 103:15-16)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주님...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한 것과 같이 베드로 사도 역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서신에 분명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벧전 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 인생은 풀과 같이 시들고 또한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떨어지는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만은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안개와 같고 헛것 같으며 먼지와 같고 또한 죽은 흙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거기에 누구 한 사람 반기를 들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 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할까요?
이는 내 안에 숨겨진 탐욕 때문이겠지요.
우리 주님이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은 시드는 풀이요 금세 떨어지는 꽃임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그런 순종보다는 거역하여 내 맘과 뜻대로 살고자 하는 악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나는 주의 심판만이 답이오니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소서.
그 안에서 새 생명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를 부인하며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상전들을 대하되 주를 대하듯 하게 하시고 종들을 대하되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11:1-11
제목 :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동안 애굽에 내려가는 야곱에게 약속하신 임마누엘의 언약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고된 노동을 보셨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되자 그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다.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라고 말할 때 모세의 입술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참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출 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 아들이요 내 장자라고 부르신다.
그런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과 언약을 맺기 위함이다.
(출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목적은, 물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무조건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언약을 맺어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언약 백성을 삼기 위한 목적이 있으셨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도해 내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지켜야 할 계명인 조건의 규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명을 주신다.
(출 19:4-6)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라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을 모세가 백성들에게 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자기들이 온전히 준행하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한다.
(출 19: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보화인 소유로 삼고 그들을 통하여 온 세계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제사장 나라로 삼을 것이다.
또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 굳은 약속을 해놓고서는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패역을 저지르고 만다(출 32장).
게다가 광야 40년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등 계명을 지키지 않아 결국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은 파기되고 만다.
언약이란 원래 쌍방 당사자가 존재하는데 한쪽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하여 그 언약을 깨트렸을지라도 또 다른 한편 당사자인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가 없는 분이시다.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불의가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이 계명을 지키지 않아 그 언약이 파기되었을지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기를 원하신다.
만약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약을 맺으면 한쪽 당사자가 계약을 파기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른 한쪽 당사자도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했다 할지라도 그들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하신다.
물론 알콩달콩 신혼생활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좀 서먹서먹한 관계라도 유지하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결단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이 파기 되자 그들과 함께 모압에서 언약을 갱신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그 모압 언약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풍요의 신 바알과 쾌락의 신 아세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므로 해서 결국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 넘어지고 만다.
또 다시 이 모압 언약이 파기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세겜에서 언약을 다시 갱신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겠노라고 약속하는 그것을 그렇게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모세가 듣고 자기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한다.
(신 5:27-29) 당신(모세)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앞에서의 義란 세상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잘 지켜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이다.
(신 6: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겜 언약을 맺고 잘 지키겠노라고 약속했음에도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 바알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고 만다.
세겜 언약 이후에 바로 이어지는 시대가 사사 시대인데 이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영적인 암흑기였다.
결국 종교 지도자들인 레위인과 제사장들까지 다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패역한 삶이 출애굽부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무려 860년에 걸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렘 11:7-8)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이렇게 해서 결국 세겜 언약도 파기되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완전하고 최종적인 언약을 약속하시는데 그 언약이 바로 새 언약이다.
이 언약은 (렘 31:31-34)까지 잘 나타나 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과 같지 않다.
이는 옛 언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깨질 수도 없고 파기될 수도 없는 완전한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 언약을 일컬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
새 언약의 내용은 이렇다.
옛 언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지만,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속에 친히 들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하나님과 친히 교제와 사귐을 갖게 되면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히브리어 ‘야다’로 표현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다 사하시고 그들의 죄를 기억지도 않으시겠단다.
물론 이 새 언약은 지금 당장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새 언약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약속하시고 그 새 언약을 이루고 성취하실 분을 그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바로 예레미야 33:2-3절 말씀인 것이다.
(렘 33:2-3)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크고 은밀한 일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신 선한 말로 대변되는 새 언약을 성취하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결국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로부터 600여년 후에 이 땅에 약속대로 오셨고 그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성취하신다.
(눅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절대적 주권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패역을 일삼는다.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여 바알과 다른 우상들에게 절하고 분향한다(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아 길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3).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싫어하여 결국 앗수르 왕이 그들의 왕이 되는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그들이 성을 막는다고 해도 앗수르 왕이 그 빗장을 풀고 성읍을 무너뜨릴 것이다(5-6).
이스라엘이 얼마나 그 마음이 완고하고 패역한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그런데 이런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한 번 보라.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불붙듯 하도다.
여기 나오는 아드마나 스보임은 성 전체가 음란으로 패역하여 하나님의 불심판을 받아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옆에 있는 이름도 거의 나오지 않는 조그만 마을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심판을 받아 멸망당한 그들과 같이 대우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끝까지 붙들겠다고 천명하신다.
게다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이제 다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의 심판을 내리지 않을 것은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는 사람과 같지 않으시기 때문이다(9).
사자가 새끼를 부를 때 새끼가 어미에게 오듯,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를 때 그들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10).
그들은 애굽에서, 앗수르에서 새 같이 비둘기 같이 떨면서 오지만 그들을 다시금 그들의 고향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변치 않으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패역하고 불순종하여 구원에서 잠시 멀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완전히 진멸당하지 않을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약속은 새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따라서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들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진정한 집이요 고향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다.
불순종하며 패역한 이스라엘이야말로 여지없는 나 자신임을 고백한다.
지금까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온갖 죄들, 먼지보다 많은 그 죄들과 함께 살아왔던 나는 얼마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며 깨트리는 장본인이었던가?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고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데 나는 돌아오는 것처럼 하면서도 마음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였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였으며, 성경공부에도 열심히 참석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높이 쌓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속마음은 주님을 전혀 닮아가지 않는 패역한 이스라엘이었다.
겉사람은 주를 닮은 듯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았을지라도, 정작 속사람은 주님을 떠나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패역한 자였음을 고백한다.
이런 내가 목사가 되어 성도들을 가르쳤으니 그 성도들이야 말로 얼마나 불쌍한 자들인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쓰레기 잡탕을 만들어 개밥처럼 양식이라고 주었으면서도 나는 그것으로 변하지 않는 그들만 탓하며 내 죄를 밝히 보지 못했던 자로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한다.
나는 이미 복음을 아는 자이면서도 복음의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말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나의 모습은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정말 주의 소유로,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또한 사모한다.
내 마음에 날마다 주를 향한 갈급함이 넘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매일 복음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주님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생수로 목마름을 채우고 또 채우기를 원한다.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는 자로 선 나는,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가 되어 지금 누리고자 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면서 마지막 날 멸망할 원수를 호통친 사도 바울의 그 믿음의 호령이 오늘 나의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패역하고 악한 이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여기 있나이다.
나는 끊임없이 주를 부인하였나이다.
입술로는 주를 찬양하고 몸은 주를 예배하는 자처럼 행동하였으나 나의 속사람은 여전히 주님 없이 살아왔음을 고백하나이다.
나는 이처럼 패역한 자로 죽어 마땅한 자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이 종은 주의 심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심판이 나에게는 은혜임을 아오니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눈만 뜨면 죄지을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끊임없이 거짓말과 거짓 행동이 나를 언약 파기자로서 지옥으로 이끌어 가나이다.
이제 주의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게 하시고 보혈의 능력과 옛 사람의 죽음을 통하여 나는 죄에 대하여 불구자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죄를 향하여 나아가는 걸음이 갈수록 느려지게 하시고 주의 은혜의 자리 영적 충만함의 진리로 나아가는 걸음은 민첩하게 하소서.
주의 영광이 오늘 나의 영광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