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들을 불러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들에게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생의 삶인 것과
그 영생의 삶이 바로 주님과의 사귐과 교제임을 알게 하옵소서.
뚤루즈 캠프 이틀째를 맞이하오니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혼들을 불러모아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격없는 자,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나아가오니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1: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7.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
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0.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1.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과연 그러하다 그들은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12. 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3.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 받았거늘
14. 에브라임이 격노하게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의 주께서 그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
(본문 주해)
11:12~12:2절 :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 나라들을 의지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한다.
북이스라엘이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쌌다는 것은, 금송아지가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걸음을 막은 것을 가리킨다.
유다 역시,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함이 없는 것이다. 북이스라엘보다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늘 왔다 갔다 날마다 흔들리는 것이다.(11:12절)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말씀은 먹지 않고 헛된 정욕을 위하여 따라가는 삶을 가리킨다. 이것이 거짓과 포학을 더하는 삶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애굽에 기름을 보내는 것이다. 이는 자기들을 살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모르고 앗수르와 애굽에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모양이다.(1절)
이스라엘이 계속 고집부리며 헛된 바람을 쫓아가고 있으니 그 소행대로 벌을 주신다.
벌주심이 은혜요 사랑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날마다 속임수로 살아가는데도 그대로 방치하신다면 버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논쟁하시고 벌주시고 보응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벌과 보응이 목적이 아니라, 결국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인 것이다.(2절)
3~6절 :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을 ‘속이는 자 야곱’을 비유로 말씀한다.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늘어졌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하느님과 겨루다가
하느님의 천사에게 짓눌리자 울며 애걸하지 않았더냐? 베델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거기에서 약속을 받지 않았느냐?
"야훼, 만군의 하느님, 그의 이름은 야훼시라."
그러니, 너희는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느님만 바라고 살아라.”(공동번역)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가다가 들에서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타나셔서 약속을 주셨다. 이미 태에서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마침내 이루셔서 20년이 지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다가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거기서 야곱이 꺾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날들을 자기 힘을 의지하고 성공하고자 애를 쓴 그 야곱의 허리를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다. 그때로부터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 자기 힘을 의지하려고 하여도 할 수가 없는 자가 되어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붙드는 자가 되는 것이다.
호세아를 통해 ‘이 야곱을 보아라’ 하신다.
그렇게 나면서부터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 그, 장년이 되기까지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그 야곱을 꺾어 이스라엘로 만드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고 하나님만 항상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7~10절 : “거짓 저울을 손에 들고 남을 속이기나 좋아하는 가나안 놈 같은 것들,
"나는 정말 부자가 되었다. 한몫 단단히 잡았거든. 이 손이 닳도록 벌었는데, 누가 나를 부정축재했다고 하랴." 라고 에브라임은 말한다마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었다. 내가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희를 다시 천막에서 살게 하리라.”(7~9절, 공동번역)
에브라임이 가나안인처럼 완전히 사기치고 강탈하는 장사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들의 부가 하나도 죄 된 것이 없다고 교만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의 교만을 광야의 상태로 돌려놓으시겠다는 것이다. 광야에는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니,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고 그들을 장막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 장막에 거하는 것은, 상황적으로는 고난이나 가나안의 문명 생활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적 문화에서 벗어나 광야의 장막에 거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이제 다시 야곱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11절 :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요단 서편의 길갈의 성소에서 저질러진 죄악을 고발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토착민들에게 영향을 받아 행한 우상숭배의 제사로 보인다. 그들이 제사를 섬기던 제단은 들의 고랑에 있는 돌무더기가 되고 말 것이다.
12~13절 : “우리 조상 야곱은 메소포타미아 평야로 달아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아내를 얻으려고 종살이를 하였다. 아내를 얻으려고 목자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 한 사람을 시키셔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예언자 한 사람을 시키셔서 그들을 지켜 주셨다.”(새번역)
야곱이 사람을 섬기고 양을 친 것은 순전히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에 이러한 야곱을 다시 부르시고 얍복 강가에서 그의 허리를 치심으로 이스라엘로 만드신 것이다. 야곱을 이렇게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것이다.
14절 : “에브라임이 주님을 몹시 노엽게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주님께서 에브라임을 벌하시고, 받으신 수모를 에브라임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새번역)
야곱에서 보여주듯이 자기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고지한다.
조상들이 보여준 잘못된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들을 벌하시며, 주께서 받으신 조롱을 그들에게 그대로 갚으실 것이다.
(나의 묵상)
태어날 때부터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자가 야곱이다.
형의 발꿈치를 잡아야 했으니 얼마나 힘을 썼을까?
그뿐이 아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마음,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받는 고난과 신경전, 20년만에 보란듯한 가정을 꾸린 것, 두려운 형과의 만남, 그 전에 천사와 씨름한 것, 벧엘에서의 하나님을 만난 것을 잊어버리고 적당한 곳에서 살려다가 디나의 사건으로 깜짝 놀라 울며 겨자 먹기로 그곳을 떠나 벧엘로 향하는 야곱이다.
평생 자기힘으로 살려다가 결국 온몸의 힘을 빼게 하시고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 야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이런 조상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지 못하고, 여전히 사기 치면서 번 돈에 대해 자랑하고 교만하게 구는 자가 되니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을 알기 전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았다.
그렇게 내 힘으로 살다가 안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ccm 가사 중에도 그런 것이 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 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중에서
‘날이 저물어 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 손으로 걸을 때...’만이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나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때임을 지금은 안다.
그러나 복음을 알기 전에는 무엇인가 안되고 괴로울 때만 하나님의 때인 줄 알았다.
복음을 알고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나의 주님을 알아가는 자가 된 것이다.
주님과의 사귐과 교제의 시간은 내 힘을 빼는 시간이고 전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내 삶의 전 시간이 하나님의 때인 것을 알고 수시로 일어나는 탐심, 자기의, 자기주장의지 등 내 힘이 잔뜩 들어간 죄악 된 본성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사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힘을 빼는 것을 ‘내려놓는다, 자기를 비운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매일 말씀 앞으로 가서 배우는 것은 그저 내려놓는 것도 아니고, 비우는 것도 아니라, 십자가에 연합되는 것이고, 복음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그저 한가하게 명상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주님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을 받게 되었다.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만난 사람들에 비해 영적 깊이가 얕을 수가 있겠다.
때때로 그들의 험한 신앙 여정을 들을 때, 얕은 내 믿음이 조금 걱정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는 내게 꼭 맞는 은혜를 주셨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언제나 감사할 뿐이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나로 하여금 이미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게 하셨으니 말이다.
오늘 캠프 첫 시간에 말씀 묵상의 은혜에 대해 말하는 시간을 맡았다.
이들은 기존에 이미 들은 바, 배운 바가 아닌 자들이라 어떻게 전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도 나의 힘을 빼야 한다.
야곱의 힘을 빼셔서 결국 주께로 돌이키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며, 내 힘을 빼고, 오직 강력하고도 유연한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주님의 일하심이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은 야곱을 돌이키시는 분이요,
심판하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돌이키시는 분이시요,
날마다 저를 돌이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힘도 안 되는 것들을 힘이라고 움켜쥐는 자를
십자가에 연합되게 하시니
이것들이 다 헛된 것들임을 그제야 보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 손에 낀 장갑처럼
주님 뜻에 밀착된 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풍성한 기쁨을 누리고 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