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 정말로 끝내줬던! 한여름의 산행
맑고 깊은 숨결로 도시의 더위에 지친 우리들을 촉촉히 감싸준 지리산에 이 글을 바칩니다.
첫째날,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토요일 새벽, 눈을 뜨니 비가 오고 있다. 앗싸! 오늘은 필경 김치전과 술판이 벌어지겠군.ㅎㅎ 준비해둔 옷을 얼른 꿰어차고 조용히 집을 빠져 나온다. 가족을 버리고 혼자 놀러갈 때는 잽싸게 빠져나오는 게 관건이다.
양재역에 도착해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되니 우산들을 쓰고 속속 모여든다. 여성전용 차라고 미리 공고한 내 차에 꼬맹이언니와 오솔길언니가 타고, 대장 차에 총무와 지리산이 그리고 규갑 형과 동연이가 탄 차에 아톰 형이 타고 인월 식당을 향해 출발한다.
사실 120mm 강우량이 예상되는 지리산 1박2일을 갈 것이냐는 고민들이 있었지만 대장의 일성에 모든 갈등이 평정되었으니 ‘봉규 형이 움막에 이미 내려가셔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친절과 배려의 아이콘 김봉규 선배님(우리 산악회와 오랜 시간, 다양한 산행을 함께 해오신)이 우리 때문에 미리 내려가 계신다니...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고고씽!
멍게 형이 내 차를 운전하기로 하고 천안휴게소에서 잠시 조우한다. 아뿔사! 비가 거의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대장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린다. 아직도 순진한(?) 지리산은 “비도 오는데 설마 산에는 안 가겠죠?”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여성동지 세 명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한다. “비야, 비야. 내일은 니 맘대로 하고 오늘은 많이 좀 와라. 전이나 구워 먹고 퍼질러 앉아 놀 수 있게...’
인월 식당에서 한데 모인 우리들은 아점을 먹고(식당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답니다.ㅠ), 봉규 형네 움막으로 향한다. 선두에 선 대장 차의 네비 아가씨가 안내한 길은 꽤나 길고 좁은 산길이다.(다음날은 훨씬 짧고 넓은 길이었다, 김기사가 최고여! ㅋ)
1,300여 평에 지어진 200여 평이 넘는 움막은 원래 집하장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일부는 숙소로 개조하셨고 나머지는 아직 계획 중이시라고. 덕분에 차량 네 대가 구석에 주차하고도 남는 실내공간에 오늘의 잠자리용 텐트 세 개가 놓여 있다. 규갑 형이 가져온 텐트를 하나 더 쳐도 끄떡 않는 넓은 공간 한 켠에 바베큐를 위한 화로와 10인용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다.
소화를 위해서라도 간단한 산행이 필요치 않겠냐며 우리를 산으로 유도하려는 대장의 의견을 봉규 선배님이 위험하다고 제지하시면서 편안한 산책로를 소개하신다. (휴~~ 하마터면 진창길 산행을 할 뻔했다)
움막 뒤편으로 길게 뻗어 있는, 공원관리공단에서 잡초 제거까지 깔끔하게 마쳐둔 넓은 임도로의 산책이 시작됐다. 살짜쿵 비님은 내리시는데 판쵸의를 입거나 우산을 쓴 우리는 여유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마치 새색시처럼 수줍게 내려앉는 빗속을 차박차박 걸어가는 그 청량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가까이 내려앉은 하늘과 더 가깝게 다가오는 푸르름 속을 하염없이 걷는다. 초록이 싱그럽고 공기는 깨끗해 폐부 깊숙한 곳까지 맑은 기운을 마음껏 들이마신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아름다운 길이 이 땅 어디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왕복 8km 정도, 2시간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의 워밍업을 마치고 움막으로 돌아간다.
평지를 걸어서인지 아직도 배는 꺼부룩 하지만 준비된 고기를 구워먹기로 한다. 그렇게 4시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수다와 음주는 12시 여성동지들의 오붓한 와인 자리까지 이어진다. 아톰 형이 끼면서 여성모임은 혼성모임으로 와인은 두 병으로 늘었지만 즐거운 시간이다.
둘째날, 촉촉하고 싱그러웠던 여름산행
다섯 시에 여성동지들은 일어났다, 화장실 사용이 번거로울 테니 먼저 준비하고 있자는 취지에서다. 부족한 잠과 부대끼는 속을 달래며 단장을 마치고 다시 누우려니 이번엔 아래층 부엌에서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낸다. 뭐라도 먹여 내보내려는 봉규 선배님께서 아침을 준비하시는 소리다. 고기가 들어간 뜻뜻한 김치국에 밥을 잔뜩 말아 먹고 커피까지 우아하게 마신 뒤 비로소 산행을 시작한다. 눈을 뜨면 허겁지겁 나서던 이제까지의 양상과는 많이 다르다. 9명의 어머니 역할을 기꺼이 해주신 봉규 선배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정령치 주차장에 도착하니 안개가 짙어 한 치 앞이 안 보이고 차가운 바람이 속살을 후빈다. 다들 긴팔과 두꺼운 잠바로 바꿔 입느라 야단들이다. 대장은 얇은 오리털까지 입는다. 다만 본인은 얇은 잠바로 오소소 떨면서도 우리들 발걸음을 믿으며 고요히 서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금방 데워질 몸이다.ㅎㅎ
첫 번째 오르막을 다 오르기도 전에 투덜이들의 볼멘 소리 2탄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다들 옷을 벗느라고 난리다.ㅋㅋ
정령치 1,172m 만복대 1433m 약 300m 정도의 고도를 높이는 그 길은 무난하면서 다정다감하다. 어느새 시작된 능선을 휘적휘적 걷노라면 호젓한 산길 옆으로 줄을 지어 핀 온갖 꽃들이 우리를 맞아준다. 때로 천상의 화원처럼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진다. 하늘말나리 화원, 일월비비추 화원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것이었다. 주변의 모든 풍경은 안개로 가리우고 꽃밭만 넓게 펼쳐놓으셨다. 그 사랑스러운 것들을 하나도 그냥 지나치치 말라는 고요한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촉촉한 안개 속을 걸어가던 그 길은 꿈같이 몽롱하고 꿈결같이 아름다웠다. 문득 생각나는 대사가 있다. “여기가... ... 천국인가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중) 말이 별로 없는 지리산도 한 마디를 남긴다, 구름이슬로 샤워를 한다고. 이 커다란 축복에 감사하는 것에는 모두가 한마음이다. 대장도 화원이 펼쳐질 때마다 무려 5분!의 감상시간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만복대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정령치에서 만복대까지 2km, 왕복 4km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위한 구룡폭포 5km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쩌면 이쯤에서 끝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졸병의 마음 속 아우성이 뭔 소용이 있을까, 굳건한 대장의 의지를 좇아 만복대에서 성삼재까지 5.4km를 더 가기로 한다. 꼬맹이 언니와 오솔길 언니는 발길을 돌린다. 차키를 건넨다. 닿은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이 손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한 순간의 선택은 우리를 정령치와 성삼재로 갈라 놓으니 당신은 부디 오셔서 우리를 픽업해서 당신이 계신 그곳으로 데려가 주소서. 서로 간에 짦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다. 그 후로도 한참을 이어진 천상의 꽃밭을 지나칠 때마다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모두의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리봉까지의 조그만 봉우리 다섯 개는 그리 쉽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헥헥 거리며 오를 때마다 두 분의 혜안에 다시 한 번 감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 그 손을 그렇게 놓는 게 아니었는데... 세 개인가의 봉우리를 거쳤을 때 휙! 지나가는 익숙한 모습을 본다. 봉규 선배님께서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다. 우리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사실 그 전날 모두 마셔버린) 정상주까지 들고서. 생수통 두 개에 앙증 맞게 담겨져 온 시원한 소맥으로 늦은 정상주를 마신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안개는 걷히고 해가 얼굴을 내민다, 우리가 지금부터 계곡으로 물놀이 갈 걸 어찌 아시고... 우리 산악회에 대한 지리산의 편애가 지극하다. 동연이와 산책을 하고 있던 규갑 형까지 모두는 이번에는 구룡폭포로 향한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길고 힘찬 폭포를 만났다, 구룡폭포라는 이름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폭포다. 비 온 뒤 엄청난 물이 굉음을 내며 계곡을 가득 채우고 흘러내린다. 우리는 정상부터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간다. 거꾸로 이 길을 올랐더라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2.7km 지점에서 꼬맹이 언니가 만든 주먹밥(아침에 밥통에 남은 밥과 기름과 소금으로 동글동글 빚어 두 개씩 배급한)과 라면을 먹는다. 웃통까지 벗고 물놀이를 즐기던 개구쟁이 장년들은 아쉬움을 접고 남은 2.3km를 걸어 계곡을 벗어난다. 규갑 형이 종일 셔틀을 해준 덕에 정령치에 있던 차들이 돌아와 모두를 태우고 남원 광한루 앞 추어탕으로 향한다. 그렇게 정리 모임을 갈음한 후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보슬비 속의 우중산행, 꿈결 같았던 안개산행, 따가운 햇살 아래 계곡물놀이까지 어느 하나 놓친 것 없는 삼박자 산행이었다. 서울로 향하는 차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크고 아늑하고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리운 어머니, 그 푸근함으로 우리를 촉촉이 감싸준 큰 사랑에 감사드린다. 지리산이 거기 있기에 다음 만남에 대한 기대를 또 품고서 우리는 도시로 돌아왔다. 메마른 이 거리에서 오늘도 당신을 그리워한다, 가슴 속에 푸르던 보슬비가 내린다.
첫댓글 하늘말라리아화원이란 것은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전국의 임도를 관리하는 데는 관광공사가 아니라 국립공원관리공단이거나 산림청 산하 영림서일거야. 암튼 고생했다. 잘 읽었다.
하늘말라리아가 많이 펴있으면 거기가 하늘말라리아 화원이지. 대장이 상사도 아니고 내가 신문기사 쓰는 것도 아니고, 각자 스타일대로 쓰는 거지. 다시는 산행기 안 쓸 거야!
대장이 댓글을 수정하셨었군. 음... 졸지에 공사와 말나리 땜에 널을 뛴 꼴이 됐군. 쳇!
빠르게 써 올렸는데도 잘 썼네. 재밌게 잘 읽었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산행기가 이렇게 신속하게 올라 올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역시 가상이형 부지런하십니다. 단지 하루가 지난 어제의 일인데 모든게 아득한 꿈결 같이 느껴집니다. 다만 다리는 어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지 아직도 장단지 근육이 땡땡합니다. 봉규형님의 배려로 잠자리도 입도 산행도 즐거운 잊지 못할 지리산 산행이었습니다. 알대장님, 멍게총무님을 비롯한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벌써 다음달 산행이 그리워집니다.
정말 초스피드 산행기, 빨리 쓰느라 고생했겠네. 재밌게 읽었어. 그 화원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양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던 그 오렌지색 얼굴의 녀석은 하늘말나리. 만복대에서 정령치로 향하면서, 꼬맹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고, 난 아주 천천히, 그 화원을 홀로 즐기면서 걸을 수 있었네. 천국이 따로 없던 날...^^
그러게 저는 그냥 나리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언니가 잘 아니까 열심히 새겨 들었거든요. 글고 책 제목'너도 하늘말라리아' 말해줘서 그건가 했지요. 저자가 꽃이름 착각한 건가???
@가상이 나리꽃도 말나리, 하늘말나리, 털중나리 등등 여러 종이 있대. 책 제목도 <너도 하늘말나리야>이던데...^^
@오솔길 내가 잘못 듣고서 이름이 말라리라니... 하면서 검색했는데, 마침 블로그에 '너도 하늘말라리아' 책 제목의 뜻을 묻는 글이... (퇴근하고 급히 쓰느라 사실 검색을 잠깐 했는데) 마침 그게 떡 하니 나온 거지.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어요.ㅋ 빨리 장아찌 무치고 씻고 자야지...
초고속 업로드된 산행기에 늘 열며칠씩 지나 산행기 올리는 꼬맹달팽이 기가 팍! 죽네. ㅠ. 잘 썼다. 읽으면서 관광공사에서 한번, 하늘말라리아에서 한번 풋, 누군가 한마디하겠군 했더니 기어이 알 형이 못참고 일갈하셨군요. 좀 봐줘가며 삽시다, 사람인데 실수, 착각 이런 것도 해야지, 안 그래요?
나도 내 카스에 꽃이름 잘못 올렸다가 오솔길한테 혼났다는^^.
우리가 한참 노닐던 그곳, 원추리를 하늘말나리로 표기는 쫌 심했다는....ㅎㅎ
@오솔길 그러게. 내려 오면서 하늘말나리 한 송이 꺽어 머리에 꽂고 걷다가 마주 오던 아줌씨한테 지청구들은 트라우마 때문인가? 자꾸 나리가 왔다갔다 ㅋㅋ
"촉촉한 안개 속을 걸어가던 그 길은 꿈같이 몽롱하고 꿈결같이 아름다웠다."
"보슬비 속의 우중산행, 꿈결 같았던 안개산행, 따가운 햇살 아래 계곡물놀이까지 어느 하나 놓친 것 없는 삼박자 산행이었다."
재밌게 읽었네.. 부지런하고, 똑부러지는 성격이 산행기에도 나타납니다.. 담에도 즐거운 산행, 함께합시다..
두 가지. 인월 고향식당에 대해. 내가 4월인가 갔을 때는 시어머니 혼자 상을 차려주셨어요. 밥을 막 지어 내놓으셨고요. 전라도 분이세요. 며느리는 잠깐 외출했다고 했고요. 그러니 메인 디시와 찬이 조화로웠지요. 그런데 지난 토요일은 아들까지 셋이 있었어요. 말씨 들으면 알겠지만 며느리는 경상도 분. 그래서 간이 셌던 것. 원래 경남 함안군 마천면과 이웃지간이라 말씨도 섞이고 입맛도 섞인다고 할머니가 얘기해주셨지요. 다음에 혹시 가게 되면 참고하세요. 인터넷에 상당히 맛있게들 먹었다고 평이 올라와 있네요. 다음은 네비. 저도 김기사의 후신인 카카오네비를 씁니다. 가상이와 똑같은데 왜 그런 차이가 빚어졌는지 모르겠네요
마천은 함안군이 아니라, 함양군입니더. 마천과 인월 이야기는 예전 매동마을 민박집 할머니로부터 들은 야그. 그 할머니도 마천 분이셨었어요.
원추리와 하늘말나리는 사진으로 정리해 드렸고요?!
하나 더. 오솔길에게. 그러니까 만복대 아래 그곳은 원추리 밭으로 표현하는 게 맞다는 건가? 정리는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지. 그리고 가상이에게. 처음에 댓글을 달아놓고 아무래도 네가 아파하겠다는 생각에 수정했던 것. 나 그 정도는 아는 사람. 근데 지금도 의문인 건 있어. 그런데 차마 여기 못 쓰겠다.
이번 산행기 쓰면서 제가 뭔가 죽을 죄를 지었나봐요!
산행기 자체가 촉촉하네 그려...
초고속 산행기 잘읽었습니다.우리 산악회회원들은 하나같이 글재주가 출중하네요. 함께 못해 아쉬어요.
부럽군.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산행기, 잘 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