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武王)은 익산 경영과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왕권강화에 성공한 왕으로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무왕 31년 갑작스런 사비환궁 그리고 33년 사비환궁 이후의 태자 책봉과 무왕 말기에 나타난 국정상황 등을 통해 볼 때 기존의 견해와는 다른 정치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무왕의 사비 환궁은 익산 세력의 약화와 사비지역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사씨 세력의 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씨의 등장 배경에는 대(對) 신라 및 고구려 방비 그리고 익산 경영에 따른 군사적·경제적 필요성으로 인해 무왕이 대성귀족(大姓貴族)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사씨와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이해된다.
또한 사비로 환궁한 이후 의자(義慈)의 태자 책봉도 당시의 정국 변동과 서로 밀접하게 관련 되었는데 이는 사씨의 정략적 지지에 의한 결과였다. 즉 사비로의 환궁과 익산 세력의 축출 그리고 사씨 출신 태자비의 납비(納妃)를 전제로 이루어진 지지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씨 세력과 익산 세력과의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사씨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무왕 말기의 정국상황은 태자에 책봉된 의자가 대 신라전 등 국정의 상당 부분을 위임 받아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무왕은 상왕(上王) 또는 대왕((大王)으로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무왕은 638년 3월 이후에서 639년 정월 이전에 익산 왕궁성으로 다시 행차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왕 부부의 능으로 비정되는 익산쌍릉의 존재와 추모밀지(枳慕密地) 천도 및 제석정사의 중건내용,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 의식 그리고 왕의 동서양역(東西兩城) 거주에 대한 기록 등은 그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들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무왕은 익산 경영과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왕권 강화에 성공한 왕으로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무왕의 갑작스런 사비환궁과 태자책봉 그리고 무왕 말기에 나타난 국정상황 등은 익산 세력의 약화와 사비 지역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사씨 세력의 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강종원/충남대 백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