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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능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몸을 죽이십시오!
우리의 영이 거듭날 때 혼이나 몸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혼은 말씀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즉 재교육해야 합니다. 하지만 몸은 재교육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몸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만이 죄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몸을 죽이는 것에 대해 가능한 한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1) 문제는 우리의 몸입니다.
잔 폴 잭슨 목사님은 『영적 전쟁의 불필요한 사상자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 모든 문제를 사탄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초래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예답게 우리는 그가 했던 것과 동일하게 사탄을 고소하곤 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남을 탓한다는 것은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손가락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자로 자처하는 경향성(victim mentality)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뼈아픈 진실은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종종 의를 선택하는 대신 죄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9)
우리는 모두 '자신'이라는 최후의 적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제1순위 혹은 가장 강한 대적은 사탄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주적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특히 우리의 몸은 우리 영의 가장 큰 대적입니다.
우리가 단지 마귀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락한 몸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마귀가 아니라 우리의 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2-24)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 9:26-27)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베드로전서 2:11)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의 몸을 죽여야 합니다. 몸에는 강한 욕망이 있습니다. 이 몸이 우리를 주관하면, 우리의 마음 즉 의지와 감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몸을 죽여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에베소서 4:22)
이처럼 몸에는 육신의 취향이나 혹은 '육신의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했고 한 번도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3-15)
이 성경구절에 의하면, 사람을 잘못된 곳으로 끌어가는 것은 새로워지지 않은 본성인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욕이나 죄가 마귀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거듭나지 않은 육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로마서 8:23)
우리 몸의 속량 즉 몸의 구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립보서 3:20-21)
그때까지 우리 안에는 싸움이 있고 탄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몸을 죽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요구하신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몸과 싸워야 하지만 능히 승리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육신을 통해 역사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이것을 이길 권세가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가 육신에게 해야 할 일을 하는 이상 우리에게 어떤 권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함으로 자기 몸을 죽이십시오. 그러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2) 쉬운 길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죄를 극복하기 위한 쉬운 길로 축사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축사사역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축사사역"의 내용 중 몇 가지는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속에 귀신이 있어서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게서 마귀를 쫓는 일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마귀를 쫓아낸 사람들은 모두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자의 영에 마귀가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는 자라도 마음이나 몸에 귀신의 억압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55년 이상 사역하는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주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들의 마음과 몸에 마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축사사역을 하는 목사님들은 모든 그리스도인 혹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적으로 내쫓아야 할 마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성경은 죄들이 항상 귀신 때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의 모형을 따라 질투귀신 혹은 탐식귀신, 정욕귀신, 혈기귀신 등으로 이름 붙이는 일에 대하여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귀신이 아니라 단순히 육신의 성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집회를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와서 귀신을 쫓아내주기를 청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긴 목사님, 나에게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영을 내쫓아주세요."
그 여인은 다른 여성도가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무개 자매가 나한테 잘못을 했어요. 하나님은 내가 그 여자를 용서해주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나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이 오래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영을 내게서 쫓아내주세요!"
그때 해긴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남편을 용서해준 적이 있습니까?"
그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물론 있지요."
해긴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자신에게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영이 있어서 용서를 못한다고 말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자매님을 용서하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여자에 대하여 원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당신에게서 내쫓을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당신의 육신일 뿐입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당신이 에베소서 4장 32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그곳에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공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롬5:5). 그러므로 악한 영을 내쫓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에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것은 정욕이나 혈기 등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하셨다면 그리고 온유하라고 하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육성을 부인하고 결단하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축사가 아니라 육을 죽이는 것입니다.
"축사"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모든 습관적인 죄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단정하고 변화되려면 그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귀 탓으로 돌리는 많은 죄들이 사실은 육체의 일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은 재창조되었지만 몸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전처럼 육신의 정욕을 행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젊은이가 구원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구원받기 전에 어떤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경우 그의 몸은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 여인을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귀를 쫓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영이 자신의 육신을 다스리게 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죄 된 행동이 마귀가 원인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육신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축사를 하는 목사님들은 자주 원인이 귀신이 아닌데도 이런 귀신과 저런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축사사역에 효과가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문제의 원인이 귀신이 아닌데도 귀신을 다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이거나 혼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쫓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그냥 쫓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주 쉽고 편하게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고 즉각적인 변화를 원합니다. 일을 쉽게 해결하려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시간이 더 걸리고 더 어렵습니다. 축사사역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문제를 마귀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사"가 인기가 있게 된 이유는 이처럼 축사가 손쉬운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육신을 다스리는 일은 "축사"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저도 죄를 이기려고 축사를 수차례 받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죄나 육신은 축사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말씀 위에 서서 의지를 바르게 행사할 때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이것은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사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귀신들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만 귀신을 쫓아내고 육신을 못 박은 것에 대해 지금보다 7배는 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교회와 성도들이 놀랍게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마귀를 다루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마귀가 아니라 육신이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아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 그들의 몸과 혼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제가 바로 목사님이 말한 '아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중 한 사람입니다. 암만 해도 내 안에 귀신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축사를 받아야 변화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7)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하여 예수님은 해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는 '당신의 목사를 불러서 마귀를 대적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마귀를 대적하게 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너에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한 것이다. 만일 네가 마귀에 대한 권세가 없었다면 너는 마귀에게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옳습니다. 야고보는 "김옥경 목사님을 불러서 마귀를 꾸짖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변애경 목사님을 불러서 너를 대신하여 마귀를 대적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했습니다(약4:7). 여기서 '너희는'이 문장의 주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지금 즉시 자신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마귀에게 나가라고 명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나갈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제 마귀 문제는 없어졌으니 결단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대신 해주시지 않습니다.
앞에서 저는 축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쉬운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하게 축사나 받음으로 변화될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정반대의 시도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 혹은 불세례를 받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 묵티에서 창녀들을 대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던 판디타 라마바이의 사역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을 기대합니다. 당시 회심한 창기들이 기도할 때 눈에 보이는 불길이 창기들의 온몸을 감싸고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서 물을 떠다 끼얹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불세례"라고 불렀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마치 이처럼 성령의 불을 받으면 정결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를 통해서 주장되었고 확산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에서 열리고 있는 모라비안 집회에 참석해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고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입니다. 그는 이것을 성경 체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난 후 믿음을 통해 순간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존 웨슬리를 매우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가 체험한 것이 좋고 진실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인의 체험에서 이끌어낸 교리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리는 개인의 체험이 아닌 성경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성경 어디에도 예수 믿고 거듭난 뒤 어느 한순간에 거룩해지는 경험을 기록한 곳은 없습니다. 아기들은 순간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자랍니다.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성경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올바로 반응함으로 점진적으로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존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고 실제로 변화되었지만, 그것이 곧 성결 체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속에서 자라가라."(벧후3:18)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은혜를 받고 계속 자라야 합니다. 이런 일은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큰 은혜를 받은 후 받은 은혜를 쏟지 않고 잘 유지하면 그때 변화되었다고 느끼게 되고 실제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그때 어떤 단회적인 성결 체험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순간에 믿음으로 성결케 되는 성결 체험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며 오해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장로교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성결교에서 했습니다. 성결교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사중복음을 주장합니다. 참으로 성경적이고 좋은 가르침입니다. 많은 이들이 순복음교회에서 여기에 축복 하나를 더해서 오중복음을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 안에는 성결교에서 주장하는 '성결'과 순복음에서 주장하는 '성령세례'(성령충만)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이 둘이 같은 것일까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순복음에서 주장하는 성령세례는 복음의 산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의 권능으로 옷 입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결교의 교리가 된 존 웨슬리의 성결체험은 믿음으로 어느 한순간에 거룩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성령에 의한 것이지만 그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짜 성령세례는 이 둘 중 어느 것일까요? 어쩌면 둘 다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오래전부터 이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방언: 오순절 다락방을 넘어』라는 책을 읽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는 순복음 교단에서 말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의 권능으로 옷 입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말한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불은 소멸하는 것이니 혹시 불세례가 존 웨슬리가 말한 성결 체험은 아닐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런 의문을 품은 지 족히 20년 이상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6월 18일 성경에서 이와 관련 있는 구절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기필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길 원합니다.
이 문제의 발단은 다음 두 구절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태복음 3:11)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누가복음 3:16)
여기에 보면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것이 나옵니다. 즉 성령세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성령세례에 성령의 권능으로 옷 입혀주는 것 외에 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불세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주안점입니다.
양용의 교수님은 자신의 책에서 불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을 소개했습니다.
"1) 성령과 불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불로 태워 정결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
2) 성령과 불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성령세례는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지칭하고 불세례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3) 성령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이해하지 않고 심판의 강한 바람으로 이해하여, 불과 성령이 공히 심판적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견해
4) 세례자 요한은 성령만을 언급했는데, 후일에 이를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가운데 '과 불로'가 첨가되었다고 하는 견해
5) 성령과 불이 공히 회개하는 자들을 정결케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소멸시킴으로써 종말론적 정화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견해"
이런 다섯 가지 견해를 소개한 후 양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첫째, 이 세례는 구약의 선지자들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질 것으로 약속된 성령 강림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며(사32:15, 44:3, 겔36:26-27, 욜2:28-29),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풀어질 구원 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 세례는 문맥 가운데서 드러나고 있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 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나1:6, 말4:1). 이러한 우리의 이해가 옳다면, 요한은, 자기 뒤를 이어 메시아가 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어, 의인에게는 구원을 제공할 것이며 악인에게는 심판을 시행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양용의 교수님이 실력 있는 교수님이지만, 그리고 성령은 구원,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이 뒤에 나오는 구절과 어울리지만, 저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경신학자 이상근 박사님이 잘 지적한 대로 "'세례'란 말 자체가 신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세례는 신자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해석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요한이 베푼 회개의 물세례가 구원과 관계가 있듯이,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쭉정이는 불에 던져 사른다는 것이 사역이 아니라 구원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므로 이 표현이 구원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즉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이 성령세례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는 두 번째 세례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때 정결케 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불세례라고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더구나 로마서 6장 4-6절에 나오는 세례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바울이 말한 세례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결과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불세례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중생을 성령세례와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본문을 숙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은 성령의 상징이기 때문에 성령과 동의어로, 요한이 베푼 물세례와 대조하여 사요한 표현일 뿐입니다. 오순절날 요한이 말한 성령과 불의 세례가 임할 때 실제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불(불의 혀)이 임해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무엇보다도 다른 복음서에서 나오는 이 구절의 병행구절에는 "불"이라는 단어가 바져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마가복음 1:8)
보십시오. "불"이 빠지고 없지요? 그러니까 성령과 불의 세례는 그냥 성령세례일 뿐입니다. 훗날 예수님 역시 "불"이라는 단어를 빠뜨리고, 요한의 세례와 자신이 베풀 성령세례를 요한처럼 대조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5)
또한 베드로는 동일한 세례가 고넬료 일가에게 임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사도행전 11:16)
이로 보건대 성령과 불의 세례는 단순히 오순절에 임한 그 성령세례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성화였습니까? 아닙니다! 증인을 삼기 위해 능력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게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49)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4-5, 8)
그러므로 성경에서 불이 수차례 정화를 상징했더라도 여기서는 정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불세례와 성령세례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정관념을 버리십시오. 왜 불이 꼭 정화를 상징해야 합니까? 불은 능력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데살로니가전서 5:19)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디모데후서 1:6)
그러므로 불은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린 것처럼 능력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불세례는 성령의 권능으로 옷 입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은 물세례를 통해 세례받는 영혼들이 구원받게 했으나, 요한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은 불세례를 주심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은 요한과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상 성화가 아니라 능력을 베푸는 것이 성령세례의 목적임을 밝혔습니다. 그것이 성령세례라는 것은 이미 설명해드린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너무나도 잘 설명한 글이 있어서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길 원합니다. 그것은 『신약이 말하는 방언』이라는 책에 나오는 김동수 교수님의 글입니다.
"성령세례의 본질은 신자가 증인되는 것과 관계된 것인가?
누가 - 행전에서 성령세례의 본질에 관한 열쇠는 오순절 사건을 구체적으로 예언한 본문들(눅24:49, 행1:4, 5)과 그것이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건 기사(행2:1-13)와 그것에 대한 해설 기사(행2:14-21)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에 대한 표현은 '옷을 입는다'. '권능을 받는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 성령세례가 주어지는 목적이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표현 되어 있는 것은 사도행전 1:8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이 그의 증인이 되기 위해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인이 되기 위해 받는 성령세례는 신유 등과 같은 능력을 체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적으로 변화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신자의 마음을 깨끗하게 변화시키는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오순절주의자들과 웨슬레안/성결론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왔다. 성경 전체로 볼 때 성령의 사역은 신자를 성결케 하는 일과 신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을 주는 일을 다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신학을 전개하는 누가-행전 본문에서 성령세례의 본질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먼저, 요엘 2:28-32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 기사(행2:14-21)는 누가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 본문이다. 누가는 요엘서 본문을 인용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첨가 혹은 수정을 가한다. 그중에서 '그리고 그들이 예언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첨가한 것은 누가가 이해한 오순절적 성령세례 체험은 예언자적 영감에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오순절적 성령체험의 외적인 현상으로 방언, 예언 등이 많이 나타난 것 또한 이를 증명한다. 스트론스테드(Roger Stronstad)가 지적한 대로 '베드로가 오순절 사건을 해석하면서 성령의 내적인 갱신을 보도하는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에 호소하지 않고 성령의 예언자적 활동의 회복을 보도하는 요엘서에 호소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예언자적 영감을 받는 체험, 즉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체험인 것이다.
성령세례가 내적 갱신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을 받는 것이라는 것은 오순절 사건에 대한 예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누가에 의하면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것은 위로부터 능력을 '옷 입는 것'(눅24:49)이다. 사실 여기서 동사 '옷 입는다'는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은유적인 의미로서 구약에서도 성령으로 옷 입는다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삿6:34, 대상12:18, 대하24:20). 어떤 이가 성령(혹은 능력)으로 옷 입었다는 것은 옷을 입는 이가 내적 변화를 받았다는 것보다는 그가 어떤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능력을 입는 것은 입는 이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옷이 입혀지는 것이다.
성령세례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오순절 사건 자체를 보도하는 본문(행2:1-13)도 위와 맥을 같이한다. 오순절 사건의 결과 제자들에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4절)과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11b). 그리고 방언이 말해진 언어와 관계 있는 민족을 열거하는 것을 통해서도(7-11a) 성령세례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외적 능력을 받음과 우선적으로 관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쓰신 『내주하시는 성령 임하시는 성령』이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 책에서 해긴 목사님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목적은 그 사람의 인격을 위한 것이며, 임하시는 성령님의 목적은 믿는 자들의 봉사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성령의 역사를 두 가지로 대별해서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는 이 중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능력을주는 것이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래서 주님이 다음가 같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2-23)
즉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바울 또한 다음과 같이 경고한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1-3)
그러므로 우리는 사역을 위해 성령세례와 성령의 은사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자신의 변화를 위해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열매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로 봉사할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남을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너무 작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36:25-28)
이처럼 성경은 성령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에스겔이 성령을 우리 위에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겠다고 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십시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변화되고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됩니다. 바울은 신약에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8-9, 13-14)
주의해서 보시면 여기에 언급된 성령도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나 성결 체험을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르고 의지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전서 1:1-2)
이 말씀에 잘 나타나 있듯이 거룩이나 순종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 즉 거듭남과 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잘 따라감으로 우리가 정결케 되고 거룩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존 웨슬리나 찰스 피니가 거룩 그것도 완전성화를 주장하면서 그토록 자주 거듭남에 관한 구절들을 완전성화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인용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한일서 3장 8-9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웨슬리나 피니는 자주 완성성화를 주장하면서 이 구절을 근거구절로 사용했습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저는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완전성화는커녕 성화도 아닌 거듭남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으로, 그만큼 우리의 거듭남과 그때 주어진 영적인 권세와 그때부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우리의 거룩과 순종이 달려 있다는 반증입니다. 결코 성령세례나 성결 체험에 우리의 성결과 순종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성화는 축사나 성령의 불을 받음으로써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성화는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과 감동과 소원과 암시를 자기를 부인하고(즉 자기 속에서 올라오는 욕심을 거부하고) 따라감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결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런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책임감을 가지고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한편, 이 말을 듣고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나는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지 않는 것 같아.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순종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렇지 못한 걸 보니 ... '
물론 이런 고민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는 불행히도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9-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한복음 4:10)
앞의 구절은 물론 뒤의 구절에 나오는 "생수" 역시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앞 구절에 나오는 성령도 일꾼이 먹고 힘내어 일하려고 구하는 성령이 아닙니다. 자녀가 먹고 잘 자라기 위해서 구하는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둘 다 임하시는 성령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성령님이 필요함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11장 9-13절을 생각할 때마다 아이들이 학교 갔다가 와서 "엄마 밥 줘!" 하고 말하는 것이 생각납니다. 실제로 이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어떤 엄마도 배고파서 밥을 달라는 자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 치유를 하는 분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버지에게 상처가 있는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고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이 많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여성해방신학자들처럼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며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경솔한 것을 넘어서서 외람된 것이고 바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대신 여러분에게 성별을 뛰어넘으라고 제안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가 왜 아버지보다 특별합니까? 그것은 어머니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모성애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성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머니를 어머니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있는 모성애 역시 사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가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보다 더 깊고 진실하고 강한 사랑을 무한대로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독생자까지 보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머니 이상입니다. 할렐루야!
이 점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망령되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성령을 구하십시오. 즉 자식이 당연히 줄 것을 믿고 "엄마 밥 줘!" 하는 것처럼 성령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가 되고,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바른 선택을 함으로 거룩하여지고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