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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녕조씨 울진 평해 종중 원문보기 글쓴이: 曺 洙 一
1. 머리말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현재는 아무 김 씨, 아무 이 씨처럼 성과 본관을 갖고 있으며 거기에 관한 사실을 담은 가보·족보를 오래 전부터 편찬, 사용해 오고 있다. 이러한 성과 본 및 족보 문제는 우리의 전통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그 시대에 살았던 인간에 의해 조직되고 영위되는 것이며, 그 인간은 각기 혈연과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다. 성과 본관 문제는 바로 이러한 두 측면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성과 본관도 그 시대적 소산물로서 일정한 시간적·공간적 차원에서 생성되고 또 사회적 진전에 따라 끊임없이 변천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우리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도시화로 인한 대규모적인 인구 이동과 거기에 따른 행정 구획의 개편으로 전통 사회는 철저히 분해되고 변모하여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로 인한 후대적인 관념에서 우리의 성과 본관 문제를 보려는 데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서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族)붙이의 칭호이다. 성씨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單系 血緣 집단의 한 명칭이며, 곧 씨족적 관념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데서 결국 族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 것이며, 그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밀착되어 있다. 후대의 성씨는 한자식 표기로서 이름 앞에 붙어 족계를 나타내는 동계 혈족 집단의 명칭을 가리킨다. 성과 씨는 역사상 때로는 함께 붙어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본관과 함께 사용하여 혈연 관계가 없는 동성과 구별한다.
성씨는 발생한 이래 계속 분화하여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며, 동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했다. 혹은 父의 성을 따르는가 하면, 母의 성을 따르기도 하며 혹은 혈연적인 관계가 없는 冒姓을 하거나 變姓, 賜姓, 自稱姓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상고시대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했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분별했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고려 초기(10세기)부터 지배층 일반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 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어 전자는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후자는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 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하였다.
중국 고전에 '姓, 人之所生也'(說文解字)라 했듯이,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모계 시대에는 女系의 혈통을, 부계 시대에는 男系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였다. 또 '因生以賜姓'(左傳)이라 한 것처럼 天子가 유덕한 자를 제후로 봉할 때 그 조상의 출신지로써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가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標識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씨였다. ' 之土, 而命之氏'(左傳)라 한 바와 같이 씨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됨을 말하고 있다. 씨는 분화된 혈통(姓)을 각기 표시하는 '표지'인 것이 분명하므로 그 본원적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한다. 그러니 그 씨는 바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된다. 씨는 또한 김 씨·이 씨처럼 氏字에는 존칭적 의미가 있어 조선시대 양반의 妻에 대한 이름 대용의 경칭적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현재 우리는 모두 성과 본관을 갖고 족보에 실리면서 '양반'이 되었는데도 왜 일상의 대인관계나 자녀 결혼에 있어서는 성과 본관을 따지고 또한 조상과 가문이 거론되는가. 산업화·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생활에는 아직도 혈연과 지연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가. 이러한 의문과는 달리 이조 후기 이래 최근까지 각성 족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당대인의 기재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각 성씨의 유래와 分貫·分派 및 祖上世系에 관한 기술은 너무나 역사적인 사실과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필자는 우리 나라 성씨의 유래와 그 변천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하여 이 글을 쓰기로 하였다.
2. 성씨의 기원과 보급
고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씨족 사회에는 아직 성이란 것이 없었다. 가령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이 우리의 토착 사회에서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族內婚'을 하지 않은 풍속을 보고 그 일정한 집단을 동성이라고 표현한데 지나지 않는다. 성은 혈족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 사회가 시작되는 원시 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 사회는 혈연을 기초로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母만 확실히 알고 父는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인류 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했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되었다.
한국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 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우리의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했기 때문에 高 씨라 하고, 백제는 온조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扶餘 씨라 하였다 하며, 신라는 朴·昔·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 때 6부촌장에게 李·崔·鄭·孫·裵· 씨 6성을 주었다고 한다. 가락국의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했다하여 성을 김 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 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 문화를 수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시대(540∼576)에 건립한 4개 순수비, 진지왕 3년(578)과 진평왕 시대(578∼632)에 건립한 '戊戌塢作碑'와 '南山新城碑' 등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중국식 한자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국 역사상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시대(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 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 씨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 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 성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와 '당서' 이전의 중국 정사에 기재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그밖에 고구려는 解·乙·禮·松·穆·于·舟·馬·孫·倉·董·芮·淵·明臨·乙支 등 10 여 종, 백제는 沙·燕·리·解·眞·國·木· 의 8대 성과 王·張·司·馬·首彌·古彌·黑齒 등 10여 종, 신라는 3성과 6성 및 張·姚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고대 중국의 경우, 성은 천자가 내리는 것이며 제후의 경우 그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을 주고 그 封地( 邑)에 연유하여 씨를 주는 것이라 했다. 또 관직자나 治邑者는 세공에 있을 때 그 관직명이나 고을 이름으로 씨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성씨 사여는 우선 황제의 지배를 전제로 그 영역 내의 인민을 출생의 지연에 따라 성별을 나누되, 다시 일족을 이룰 만한 지배 세력에게는 씨를 명함으로써 그 족계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고구려 건국기의 성씨 賜與는 국왕을 전제로 제도화한 감이 있다는 점이나, 그 수성자들에게 정치적 배려가 주어지며, 또 그들 각자가 연고지가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 당시 상황이 아직은 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것은 곧 정치적인 지배 조직과 좀 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잇다. 이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 할 것 없이 고대 국가 체제 정비기의 사성은 部制 개편, 官等 설정 등과 함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정치적 편성의 한 방법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신라 시대 성씨 취득 과정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김·석·박·新金(가락국) 씨와 같이 중고 왕실 지배층의 성씨 취득, 삼국 통일 전후의 6부 사성 및 나당 관계에서 遣唐 사신·遣唐 유학생·宿衛 학생·입당 수도승, 기타 중국에 왕래한 인사(장보고·鄭年 등)들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당시에 성씨를 획득함으로써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주위 여러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집단으로서 정치적·사회적인 특권이 주어진다는 점, 둘째, 성원권의 획득에 있어서 신라 고유의 전통적인 출자 관념이 부계 나 모계 혹은 양계 出自라는 한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부계·모계 중에서 선택할 수 있고 변경할 수도 있는 융통성이 있었음에 대하여, 성씨를 취득함으로써 출자율이 부계로 전환한다는 점, 셋째, 성씨는 취득하는 집단이 족적 관념의 변질 및 혈족 자체 내의 극심한 변동으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사실상 족단 혹은 친족 공동체라는 용어로서의 의미는 사라질 만큼 해체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성을 최초로 갖는 집단은 왕실·귀족과 같이 성이 곧 骨·族과 관련되면서 최상층 지배 집단에서 비롯되었다. 6부성을 비롯한 통일 신라 시대의 성씨 취득이 통일 과정과 그 후 국가 체제의 재정비 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각 족단의 세력 변동을 단계적으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들 집단의 성씨 취득과 등장은 비단 6부성에 그치지 않고 신라 하대에 갈수록 현저히 많은 성이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음은 6성이 일시에 사성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이고 계기적임을 시사한다.
한자성의 수용 과정을 살펴보면, 왕실부터 시작해서 귀족·관료·양민 및 천민 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7세기초부터 신라의 왕실성인 김 씨·박 씨가 '신·구 唐書'에 나온다. 거기에 "왕은 김진평이며, 국민에는 김·박 양 성이 많고 異姓끼리는 서로 결혼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 씨, 귀인의 성은 박 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든지 하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6성의 대두 시기를 보면 설 씨는 삼국 말기, 이 씨는 경적왕 때, 정·손·배 씨는 통일 신라 시대, 최 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런데 3성 또는 6성이 漢姓化한 시기는 비록 7세기 이후라 하더라도 그 씨족의 유래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데서 고구려계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 시대부터 한식 성씨가 보급되어 갔다.
7세기 후반부터 羅唐간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과 6두품 계층은 점차 漢姓을 수용해 갔던 것이며, 또한 신라는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왕경의 귀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결과 이미 한성화한 중앙의 귀족과 관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 귀족·관인 가운데는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한성화 이후에 이주한 자로 나눌 수 있다. 그와 함께 중국의 동성불혼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모 또는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姓字로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 즉 국내의 실제 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 같이 김 씨였지만, 당의 책봉을 위해 보내진 외교문서에는 그 김 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父名을 따서 叔 씨·申 씨·貞 씨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씨 표기 방식은 고려 시대에도 계승되어 왕실은 실제 지나친 근친혼을 하면서 동성의 왕비는 母姓 또는 외조모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며, 그러한 관념이 지배층에 보급되자 성과 본관의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삼국 시대 지방 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 사회 자체 내의 성장과 신라 중앙 문화의 지방에로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 하대 중앙 통제력의 점진적인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일찍부터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앙 귀족의 후예들과 신라 하대 재래의 토착 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이 시대의 정치·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지방 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 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동하여 지방 행정 말단에 참여해 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 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 관제에 방불한 스스로의 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했던 것이다. 통일 신라의 군현 조직 체계와 후삼국 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 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 작업과 함께 각 구획의 土姓을 分定했던 것이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 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 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姓族分定', '氏族志', '姓氏錄'의 편찬 반포 및 '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성씨 체계는 그 토대가 왕건의 토성 분정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중국의 경우 북위 孝文帝의 '姓族分定(495)' 작업과 당태종의 '貞觀氏族志(638)' 편찬 사업에 비교된다. 曹魏의 九品中正法 실시(220)를 계기로 문벌 사회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각 군현별로 '郡望'이 형성되어 갔다. 그 후 普室의 南渡(317)와 五胡의 북중국 지배에서 종전의 성씨 체계가 획기적으로 개편되었다. 그 결과 이른바 郡姓·僑姓·吳姓·虜姓이 지역과 씨족에 따라 구분되었고, 그들은 남북조 역대 왕조의 흥망과 집권 세력의 消長에 따라 姓勢와 家格이 한결같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군현 성씨가 邑格에 따라 주·부·군·현성이 있듯이, 隋唐시대의 郡望도 四海大姓·郡姓·州姓·縣姓이 있었다.
중국 북위의 효문제가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495년에 姓族을 새로 정하자 북방 이민족의 漢姓化가 활발해진 것은, 신라말 고려초에 호족이 고유명에서 한식 성명을 수용한 것과 고려 전기에 귀화한 여진족의 고려성화와 비슷했던 것이다. 천하를 재통일하여 당제국의 새 질서를 강화하려 했던 태종은, 당대의 현실적 힘의 관계에 의해 기존의 '崔·盧·李·鄭'과 같은 특정 大姓名門의 성족을 확대 개편하여 평준화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벌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에 합당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는 데 태종의 의도가 있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그 23년(940)경에 전국의 郡縣 土姓을 分定한 배경도,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 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 신분을 편성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에 의해 분정된 전국의 군현별 토성과 고려 시대에 생성·변화된 성씨 체계는, 후일 '세종실록지리지' 名邑姓氏條에 담겨지게 되었다. 성씨의 역사는 신분사의 발전 과정과 궤도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 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열하여 분관·분파 작용을 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소멸되기도 하였다. 고려 초기에 전국의 州·府·郡·縣과 鄕·所·部曲 主邑과 任內(외란이 없는 구획)별로 분정된 성의 구성 요소는 邑治(邑內)의 지배 姓團인 '人吏姓'과 촌락 지배 성인'百姓姓'이었다. 이들 성의 수장들은 후삼국 시대에 지방 세력을 대표했던 호족으로서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거주지별로 토성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 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관인들을 출신 성별로 분석해 보면, 소수의 중국·발해계 귀화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군형의 토성들이었다.
15세기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姓字를 唐代의 '郡望表'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거기에 없는 것은 朴 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那·芳·價·承·灌·勝 씨)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 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鄭樵의 '通志略' 氏族志에 나타나 있다. 정초는 그의 서문에서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國·邑·鄕 등 地名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名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한국의 姓字는 바로 이렇게 생성된 중국의 것을 모방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성자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박·석·김 씨와 같은 신라의 宗姓은 본디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 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 과정에서 스스로 성을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李重煥도 그의 '택리지'에서 한국 성씨의 보급 시기를 고려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의 씨성 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성의 보급 과정을 설명하면서 첫째, 고려초 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락국의 왕실), 둘째, 중국에서 東來한 성, 셋째, 고려초 사성 등 크게 셋으로 나누면서 첫쨰와 둘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셋째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한 확실한 근거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조 23년(940)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토성이 분정되었던 것이며, 또 다음의 사실이 그것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첫째,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 관료·개국 공신 및 귀순 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하게 실시한 바 있다. 둘째, 신라의 3성과 6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 漢姓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고려사' 太祖世家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그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 성명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성종 이후가 되면 지방 군형의 양민층에까지 성씨가 보급되고 있었다. 고려초에 확립된 성씨 체계는 15세기까지 끊임없이 賜姓·冒姓·自稱姓 및 분관·분파 등 성의 생성과 분화·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 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 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한국 성씨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 15세기에 존재했던 전국 성씨의 종류와 본관 수의 도별 통계 자료를 제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위 표에 의거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姓種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관에 의한 구분 : 州성·府성·郡성·縣성·村성·外村성·部曲성·鄕성·所성·處성·莊 성·驛성·戌(兩界 및 東海岸의 국경 哨所)성
②성의 출자에 의한 구분 : 天降성·土성·次성·人吏성·次吏성·百姓성·立州後성·立縣後성· 加屬성
③ 성의 소멸과 이동에 의한 구분 : 亡성·亡村성·京來성·來성·入성·入鎭성·續성·亡來성· 亡入성
④ 사성 및 귀화성에 의한 구분 : 賜성·唐來성·向國入성·投化성
한편, 성자에 의한 성의 수효를 살펴보며면, 역대의 성씨 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위 '지리지' 각 邑姓氏條에는 전체 250여 성 가운데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종 17년(1486)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외래성과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全姓氏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 때 李宜顯이 편찬한 '陶谷叢說'에는 298성인 데 비하여 한말에 발간한 '增補文獻備考'에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것을 현존 유무에 관계없이 총망라했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漢姓化 이전의 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10세기 이래 한말까지 존속한 성 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 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 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 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姓勢와 본관 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지만 대체로 김·이·박 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 수가 많았다. 상기 이의현은 그의 '도곡총설'에서 한국의 성 298성을 그 유명도와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著姓 : 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12개 성)
② 그 다음 著姓 : 吳·姜·沈·安·許·閔·任·南·徐·具·成·宋·兪·元·黃·張(16개 성)
③ 그 다음 다음 著姓 : 曺·林·呂·梁·禹·羅·孫·盧·漁·睦·蔡·辛·丁·裵·孟·郭· 卞·邊·愼·慶·白·全·康·嚴·高(25개 성)
④ 稀姓 : 田·玄·文·尙·河·蘇·池·奇·陳·庾·琴·吉·延·朱·周·廉·潘·房·方·孔· ·王·劉·秦·卓·咸·楊· ·奉·太·馬·表·殷·余·卜·芮·牟·魯·玉·丘· 宣(41개 성)
⑤ 그 다음 희성 : 都·蔣·陸·魏·車·那·韋·唐·仇·邕·明·莊·葉·皮·甘·鞠·承·公· 石(19개 성)
⑥ 僻姓 : 印·昔· ·杜·智·甄·於·普·伍·拓·夜·賓·門·于·秋·桓·胡·雙·伊·榮· 恩·邵·貢·史·異·陶·龐·溫·陰·龍·諸·夫·景·强·扈·錢·桂·簡(38개 성)
⑦ 貴姓 : 段·彭·千·片·葛·頓·乃·間·路·平·馮·翁·董·宗·馮·鍾·江·家·童·陽· 章·桑· ·程·荊·耿·敬·密·京·筍·井·原·遠·萬·班·員·堅·騫·燕·時· 傳·瞿· ·米·艾·梅·雷·紫· ·包·何·和·賀·花·華·賈·夏·麻·牛·僧· 侯·曲·柏·翟·畢·谷·弓·種·邦·凉·良·芳·卿·刑·永·秉·登·昇·勝·信· 順·俊·藩·端·鮮·芋·牙·水·彌·吾·珠·斧·甫·部·素·附·凡·固·台·才· 對·標·肖·那·瓜·化·壽·祐·價·尋·森·占·汎·克·郁·翌·宅·直·側·澤· 綠·赫·冊·濯·骨·燭·律·物·別·實·弼·合· · ·思·范(136개 성)
⑧ 複姓 : 南宮·鮮于·皇甫·石抹·扶餘·獨孤·令孤·東方·西門·司馬·司空(11개 성)
성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성쇠·소장하게 마련이어서 옛날에 있던 성이 뒤에 소멸되기도 하고 과거에 없던 성이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15세기 이래 현재까지 한국의 성 수는 대략 250성 내외가 되었는데,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 568성(宋代 邵思의 '姓解'에 의거)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中日 양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성 수는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 성 가운데 김·이·박·최·정 씨 등 5대 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전체 250여 성 가운데 5대 성을 비롯한 이른바 著姓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稀姓과 僻姓은 숫자상으로는 98개 성이지만 인구상으로 극소수이며, 더구나 성의 수효로는 전체 성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귀성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전체 인구상에 차지하는 비율은 너무나 낮다는 데서 성의 편재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나라 성씨에 대한 근대적인 전체 조사가 최초로 실시된 시기는 1930년대인데 이때 전국에 250성이 있음이 당시의 국세 조사에서 밝혀졌다. 8·15광복 후 최초의 성씨 조사는 1960년도 인구 센서스의 부대 조사로 실시되었는데 30년대의 조사보다 8종이 많은 258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 졌다. 그러나 북한 지역이 제외된 남한만의 조사라는 데서 1930년대의 조사 결과와는 정확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최근(1985. 11) 경제기획원 조사 통계국이 인구 센서스를 실시하면서 성과 본관을 조사한 결과 1975년도의 247성에 비해 25성이 새로 추가되어 272성에다 본관은 3, 435개로 나타났다. 이러한 본관 수는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본관 수보다는 약 천여 개가 적은 편이다.
3. 성씨 체계의 특징
한국의 성씨 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의 수용·보급 및 분화 과정과 본관의 세분과 통폐합, 족보 체제 등 성씨 체계가 특이하고, 성명의 구성이 복잡하며 고유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字로 구성되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낸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한국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父系위주의 家系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게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경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의 家에서 '을'의 家에 입적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李 성인데도 아내는 김이고, 며느리는 박 성이라는 식이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는 성은 다만 가정을 表徵하는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이라면 아내도 새로 온 며느리도 모두 김 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안다.
더구나 한국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가족·친족 제도와 함께 사회 조직의 기조를 이루어 윤리·도덕·관습의 기본이 되어 왔다. 또한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귀속 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 의식을 감하게 지니고 있다.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기재하여 부계 혈통을 밝힌다든지,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혹은 각 씨족·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지,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든지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또한 '姓不變의 원칙'은 한국 민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의 하나이다. 한 집안에 여러 성이 섞여 있는 한국인 생각으로는 여자가 결혼하더라도 성불변의 원칙이 지켜지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남편과 아내가 같은 성을 갖는 '夫婦同姓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비춰지고 있다.
氏姓 또는 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신지인 본관을 의미한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한국의 성씨 체계 가운데 한 특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 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異族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하여 보면 몇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이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이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등 여덟 가지 경우가 있다.
본관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첫째, 한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와 같은)을 했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말 고려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 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해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의 분화 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혹은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했으나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 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徵稅·調役의 필요상 일반 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 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재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올수록 分貫·分籍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封君地·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 군현제 정비와 土姓 分定策에 의하여 각 구역인 본관마다 일정한 성씨 집단이 있게 되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랍'의 各邑姓氏條에 의거하여 당시 본관으로 있었던 구획을 보기로 한다. 主邑 331, 속현 72, 혜현 141, 합계 544 읍은 신라 시대의 9州 소관 450읍에 후대 북진 정책에 따라 兩界의 新設 州鎭이 가산된 것이며, 일부 군현은 종래의 향·소·부곡에서 승격된 것이다. 군현을 제외한 특수 본관을 살펴보면 당시까지 존속한 것에 부곡이 377, 향이 130, 소가 243, 처가 35, 장이 9개소나 된다. 이들 구역에도 당초에는 각기 토성이 있었으나 고려 후기 이래 '任內'의 소멸과 함께 토착 씨족이 유망되어 15세기 이후에는 거의 없어졌다.
성씨의 우열 문제는 著姓·稀姓이란 성보다는 일차로 본관의 邑格에 따라 정해졌다. 본관인 읍격의 높고 낮음은 그 곳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세의 대소·강약과 대체로 비례하였다. 여기에서 비로소 본관의 우열이 나오게 되었다. 고려 초기 이래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신생 촌락의 계속적인 발생은 主邑 土姓의 任內姓化를 촉진시켜 본관의 세분화와 다양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의해 붙여진 본관은 그 바탕이 된 구역의 성격에 따라 격차가 있게 되고 신분과 職役에 따라 본관이 갖는 의미는 서로 달랐다. 읍격이 높은 토성이나 기성의 명문·대족은 그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했는가 하면, 섬이나 역·津 또는 향·소·부곡을 본관으로 한 사람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그 본관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에 비해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국가에 조세·공부·力役을 지고 있는 일반 양민들은 그 거주지를 각기 본관으로 해서 編戶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확인받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各邑姓氏條는 바로 고려 이래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씨 체계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했던 고려의 성과 본관 체제는 여말 선초의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으로 편제된 신분 구조에 획기적인 변혁을 초래하였다. 임내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향·소·부곡의 승격과 소멸, 행정 구획의 개편과 폐합, 즉 성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획기적으로 가해지면서 15세기말부터는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즉 촌과 향·소·부곡 등이 소속 군현에 폐합되듯이 종래의 촌성·향성·소성·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어 갔고, 향·소·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어 갔듯이 그 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병합되어 갔다. 그 결과 15세기 지리지에 실려 있던 폐현·촌·향·부곡·처·장·역 등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대부분 소속 주읍성에 흡수되거나 주읍을 새 본관으로 개정할 때, 당시까지 존속했던 임내성의 본관은 대부분 死文化되고 일반 양천민들은 각기 현 거주지에서 편호됨으로써 앞 지리지에 없던 새로운 본관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17세기 이후의 울산·山陰·대구·丹城·언양 등의 '호적대장'에서 확인된다.
한편 16세기 이래 당시까지 顯祖·名祖를 확보하지 못했던 성씨들은 본관을 개변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대체로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는 '동성은 同出의 一祖'라는 관념을 가져 성을 바꾸는 것은 죄악시하면서도 본관을 바꾸는 행위는 크게 탓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후기 사회 변동으로 인해 천민층의 신분 해방과 함께 無姓層이 새로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신분 질서의 해이에 따라 위조되고 조작된 족보가 18, 19세기 대량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무명 성씨나 신흥 세력들은 다투어 기성의 대성·명문에 투탁함으로써 기존의 대성·거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稀姓·僻貫이나 현조·관인을 확보하지 못한 무명의 성씨들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러한 추세로 한말을 거치면서 모든 한국인은 비로소 성과 본관을 갖게 되었고 모든 성씨가 양반성화해 갔던 것이다.
성씨 관계 자료인 '가보'·'가첩'·'世系圖'·'族圖'·족보, 세보 등은 성씨 제도의 발전과 성씨 체계 및 성씨에 대한 관념의 변화에 따라 그 양식과 내용이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이러한 보첩류는 그 체제상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세기초 이전의 보첩과 조선 전기 족보 및 조선 후기 족보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족보사상 板刻成冊하여 刊布한 것은 '安東權氏成化譜'(성종 7, 1476)가 최초이다. 현존 舊譜의 서문 중에서 '성화보'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도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후대에 간행된 명문들의 '족보' 소재 구보의 서문에서 나타나는 사실로서, 草橋·족도·세계도 또는 가첩 형식으로 전해 오다가 16세기 후반 또는 17세기 이후에 족보를 정식 간행할 때 비로소 전재되었던 것이다. '성화보'가 간행된 뒤 족보 편찬이 오랫동안 중단 상태에 있다가 16세기 중반 '文化柳氏嘉靖譜'(명종 20, 1565)가 간행되면서부터 족보 편찬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러 성씨의 족보가 이에 힘입어 작성되었다."는 金安國의 말과 같이 15세기를 대표한 권 씨, 16세기의 것을 대표한 유 씨의 족보는 조선 전기 여러 성씨의 족보 편찬에 주요한 典據가 되었다. 이들 족보는 자녀의 기재를 출생순으로 하되 '부→자'로 이어지는 친손계는 물론, '부→녀'로 이어진 외손계까지 대수에 관계없이 모두 등재하였으니 이는 바로 당대 萬姓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전기의 족보 편찬 사업은 18세기 이후처럼 친손들이 주관하지 않고 친손과 외손들이 합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족보는 17세기 이후부터 가족 제도→상속 제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변모해 갔다. 16세기 이래 민중의 성장에 따른 천민층(無姓層)의 양민화(有姓化)와, 왜란과 호란으로 인한 신분 질서의 해이로, 17세기 후반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양반이나 신흥 세력을 막론하고 모두 世系·族系를 새로 정리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이 심했다. 그래서 상민들은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며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여 새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족보의 편찬 체제도 父系親 위주로 하되 女系는 사위와 그 외손에 한하고 그 이하는 생략하며, 자녀의 배역순도 출생순에 관계없이 '先男後女'로 하였다. 또한 등재인의 생몰 연월일, 관직, 妻系, 墓所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기재되었다.
대체로 조선 전기에 족보를 발간했거나 초안해 놓았던 가문들은 일단 중간적인 정리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후기에도 내용이 충실한 족보를 속간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중간의 정리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조선 후기 내지 한말 또는 일제 시대에 와서 비로소 족보를 편찬하려고 했던 각 성 족보의 경우는, 당대인의 수록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그들의 조상 世를 추적하여 계보화하기에는 관계 자료가 없었던 것이다. 중간의 정리 단계를 거치지 못하면서 또 관계 자료까지 이어받지 못한 신흥 양반들에 의해 작성된 家乘이나 족보는 자의적인 조작과 수식이 가해졌던 것이다. 그 결과 18, 19세기 이후에 처음 나온 족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띠고 있다. 즉 첫째, 자기 조상이 신라 내지 고려 시대부터 왕실의 후예나 공신, 또는 고관 요직을 역임했거나 명문 출신이었고, 또 가문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데서 先代의 世系가 상당히 소급되었는가 하면, 족보상에 기재된 先祖들의 관직도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둘째, 조선 시대 사족들은 대개 모화 사상에 젖어 자기 조상의 유래를 중국에서 찾았다는 데서 현존 족보상에는 그 시조가 중국 출신이 많다. 이는 대개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동성이 당초에는 同本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후대에 올수록 大同譜的 성격을 띤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됨에 따라 최근에는 실제 혈연적으로 전혀 다른 성씨가 동성동본으로 오인되는 예가 많았다. 넷째, 현존하는 한국의 족보 가운데는 십중 팔구가 19세기에서 일제 시대에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족보가 개별 가문에 있어서는 일차적인 世系 유래와 조상 관계 자료라 할 때 이러한 족보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성씨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 족보상으로 보면 모든 성씨와 가문이 顯祖·名祖의 후예로서 일찍부터 양반이 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한국의 신분사를 추적해 보면 임란(1592) 이전에 刊布된 족보는 전기 '安東權氏成化譜'·'文化柳氏嘉靖譜' 뿐이며, 조선 전기에는 천민층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으니 무성층이 적어도 40% 안팎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조상과 가문 또는 양반을 거론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 영남대학교 이수건 교수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