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후반부터 죽기 직전까지 쓴 열일곱 편의 단편
실비아 플라스는 1956년에 쓴 일기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상상력의 죽음”이며, “꿈이 없는 삶의 빈곤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적었다. 시인으로 이름난 그지만, 1952년 〈마드모아젤〉 소설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단편 창작에도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낭비 없는 밤들』에는 당시 수상작인 「민턴가家의 일요일」을 포함한 열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실비아 플라스는 풍경은 물론 사소한 사물, 인물들 간의 대화와 감정까지 세심하게 묘사하며,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창성 넘치는 단편을 다수 남겼다. 그의 작품과 생애를 익히 아는 독자라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실제 경험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는지 눈치챌 만큼 고백적인 측면이 강한 작품들이다.
단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존재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들이다. 주인공들은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죽은 자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모든 죽은 소중한 이들에게」), 죽음으로써 오히려 가족에게 평온을 가져온 심술궂었던 노인의 장례식장에 가고(「프레스콧 씨가 죽던 날」), 강인했던 아버지가 초라하고 무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땅벌 사이에서」). 모두 노골적으로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예상을 비틀고 기발한 유머와 재치를 구사하며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곧이어 프레스콧 부인이 내 쪽으로 돌아서서 볼에 입 맞춰주었다. 나는 다시 슬픈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그 표정이 도무지 나오질 않아서 “프레스콧 씨 소식을 듣고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단 한 번의 심장마비로 최후를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야 옳았다. _259쪽, 「프레스콧 씨가 죽던 날」에서
한편으로 어린 시절을 능숙하게 재현하는 작품도 여럿 있다. 친구 여동생과 옥신각신하다 친구 다리를 물어뜯어 동네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거나(「더 섀도」), 친구를 넘어뜨려 새 방한복을 못 쓰게 만들었다는 누명을 쓰고(「슈퍼맨 그리고 폴라 브라운의 새로운 방한복」), 여학생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빅 시스터’의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기도 한다(「입회」). 실비아 플라스는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아이(청소년)들의 미묘한 신경전과 천진한 악마성을 기민하게 그려낸다.
이웃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리로이와 그의 동생 모린이 사과하지 않는 한 사과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빠도 내가 사과하길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이 일로 아빠를 맹비난했다. _154쪽, 「더 섀도」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낭비 없는 밤들』에 실린 단편 곳곳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유일한 장편소설 『벨 자』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벨 자』의 주인공 에스더는 「돌의 혀」에 등장하는 병약한 소녀의 투영이고, 위선적이고 오만한 남자친구 버디는 「산속에서」의 오스틴을 그대로 차용한 캐릭터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정신병원 관련 서술은 「블로섬가街의 딸들」 「조니 패닉과 꿈의 성경」 등과 유사한 부분이 많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하고, 실비아 플라스가 오래도록 몰입했던 문학적 주제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시적인 문장과 뚜렷한 주제 의식이 살아 있는 시인의 산문
『낭비 없는 밤들』에 실린 산문은 1962년부터 1963년 사이에 쓴 다섯 편을 선별한 것이다. 산문은 단편이나 일기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지만, 각 글마다 드러나는 시적인 문장과 분명한 주제 의식은 실비아 플라스 산문의 ‘맛’을 음미하기에 충분하다.
생전 마지막 산문 중 하나로 알려진 「폭설」은 기상관측상 가장 추웠던 영국의 ‘빅 프리즈’ 시기(1962년 12월에서 1963년 2월 사이)에 쓰인 것으로, 폭설로 배수관이 막히고 정전 사태가 일어나고 아이들이 독감에 걸리는 등 엄혹한 상황에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써내고 있다. 「아메리카! 아메리카!」에서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실비아 플라스가 개인의 재능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는 미국의 교육 시스템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풍부한 묘사가 돋보이는 「Ocean 1212-W」는 그 자체로 실비아 플라스라는 시인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그린 한 편이다. 제목인 ‘Ocean 1212-W’는 어린 시절 할머니 집 전화번호로,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대서양 해변을 중심으로 바다에 대한 갖가지 기억, 가족에 대한 회상을 풍경화처럼 담아낸다. 나아가 소설과 시의 차이점을 간결하게 짚어낸 「비교」, 시와 시인에 대한 성찰을 강조한 「‘맥락’」 또한 이 작품집의 백미다.
별에서 보듯 나는 모든 것의 분리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보았다. 나는 내 피부의 벽을 느꼈다. 나는 나다. 저 돌은 돌이다. 이 세상의 사물들과 나의 아름다운 결합은 끝났다. _41쪽, 「Ocean 1212-W」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은 자전적인 성향이 짙은 만큼 그의 삶과 완전히 분리해서 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낭비 없는 밤들』은 한 인간이자 작가로서 실비아 플라스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늘 인정받기를 갈망하며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던 실비아 플라스의 다양한 작가적 면모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