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이 맑으면 흐름도 맑고, 근원이 흐리면 흐름도 흐리다.
- 순자 -
순자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의 철학자. 이름은 황(況). 경칭으로는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린다. 15세부터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공부하였고 훗날 그 좨주(祭酒)를 세 차례 역임하였다.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부름을 받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춘신군이 살해당하면서 파직된 이후로는 제자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유가 중에서도 특히 경전주의(經典主義), 예(禮), 정명론(正名論), 인위[僞] 등 현실 규범적, 정치적 요소를 중시했고, <열두 선생을 비판함[非十二子]>으로 대표되는 그 전방위적 비판론은 도가, 묵가, 명가 등은 물론이요, 자사와 맹자의 관념적 유가 계통을 비롯해 자하학파, 자유학파, 자장학파 등에도 미쳐 유가 내부의 자성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논변 탐구가 치밀해져 묵가, 명가와 함께 순자학파는 춘추전국 3대 논리학파를 형성했다.
내외부 비판을 가하며 스스로를 공자의 적통으로 인식했으나, 사실 순자의 예(禮)는 공자보다 법적인 부분이 강하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를 받아서 선진(先秦)사상의 집대성자라 칭하기도 한다.
이후 한-당나라 시대 때 정통 유학자로 인정받으며 일정한 영향을 미쳐 왔으나, 당나라 말 대유학자 한유가 순자의 학설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이후, 남송 이래의 성리학(주자학) 계통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이단시되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뼈대로 하였기에 인(仁)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면서도, '예(禮)'에 따라 사회적 직분을 구분하여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그가 주장한 예치(禮治)에 따르면, 왕(군자)은 어진 마음(仁)으로써 백성들을 살피고 '예(禮)라는 사회질서' 를 통해 귀천을 나누어 능력있는 자를 등용한다면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순자의 왕도정치) 하지만, 그의 제자인 한비자[7]와 이사(전국시대) 등은 왕이 굳이 어진(仁) 행동을 하지 않아도, 능력있는 신하를 등용해 엄격히 법을 집행하면 백성들이 따라와 부국강병해진다는 패도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왕도정치는 가식적이며 여유있는 시대에서나 사용가능한 방법이라고 비판하게 되므로, 따로 법가를 만들게 된다.
순자의 사상
사람의 본성에 이기심이 있기 때문에 환경에 의해서 점점 악해지게 되며,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만 이 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교육에서는 특히 예(禮)를 강조하였는데, 무릇 왕이라면 '예(禮)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된다'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예(禮)란 사람들의 귀천과 직업을 나누는 성인의 방식이다. [출처:나무위키]
첫댓글 성악설을 봅니다.
순자를 봅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의 명언 잘읽었습니다
순자의 성악설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