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劍)과 도(刀)라...
윤석열 대통령 구속영장 심사를 한 서부지방법원에서의 폭력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않되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폭도들일 뿐이다.
검(劍)과 도(刀)는 한자로 칼검(劍) 칼도(刀)자를 쓰므로 모두 "칼"이란 뜻이지만 '양날검'이란 말은 있어도 '양날도'라는 말은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날"에 있다. 검은 날카롭고 날렵한 양날로 이루어진 칼을, 도는 무겁고 둔탁한 한쪽만 날이 선 형태의 칼을 말한다.
검(劍)은 양쪽에 날이 있는 찌르기용으로 만든 칼이므로 청월검, 천무검, 용화검 등 유명한 양쪽 날의 검들이 있으나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베기 위한 칼이라 식탁에서 사용하는 식도(食刀)다.
삼국지의 관우가 휘둘렀던 큰 칼을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라 하는데 아무리 큰 칼이라 할지라도 날이 한쪽밖에 없으므로 도(刀)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검과 도의 차이는 크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칼의 날로 구분하는 것이다. 군에서 총검술을 할때 끼웠던 단검은 아무리 작아도 날이 양쪽으로 있으므로 검(劍)이라 하며 아무리 작은 칼이라도 날이 한쪽으로 있으면 도(刀)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칼이라도 단검(短劍)과 단도(短刀)는 구분된다. 검도를 비롯한 모든 무술을 무도(武道)라 하는데 이는 몸과 마음을 닦는 수양을 통한 자기 성찰이다.
게으름과 나태함, 그리고 태만과 자괴감, 교만, 욕망, 두려움, 거짓과 허망된 것과 자기비하 등이 내안에 있는 적이라서 수많은 세월동안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을 수양이라 한다.
단지 강해지기 위한 무도는 언젠가 더 강한 상대에 의해 패배하기 마련인것은 절대적으로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양이란 단지 강해지기 위한 무도가 아닌 자신을 갈고 닦아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무도가 되어야 한다. 무도에 있어서 승부란 단순히 때리고 맞고 하는 것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칼을 쓰는 사람의 인격의 싸움도 포함된다.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는 칼을 쓸때 우리는 그것을 활인검(活人劍)하고 반대로 오로지 이기기만을 위한 칼, 상대의 인격도, 심지어는 나 자신의 인격도 무시하는 칼을 쓸때 그것을 살인검(殺人劍)이라 한다.
살인검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익히기가 쉽지만 활인검은 인격의 바탕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많은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근대 불교사에 '선(禪)의 달마’로 불리는 경허(鏡虛)스님의 상좌 혜월(慧月) 스님이 부산 선암사에 계실때의 일화가 있다.
혜월스님은 대중법회때 마다 “나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活人劍)과 사람을 죽이는 사인검(死人劍) 두 자루의 명검이 있다”고 말씀 하셨으나 그 스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두 자루의 명검은 그 누구도 본적이 없고 또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적이 없다 보니 베일속에 쌓여 있는 "신비의 검"이 되고 말았다.
혜월스님이 가지고 있다는 천하 명검에 대한 소문은 신도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졌는데 일제시대 어느날 경상남도를 담당하는 새로 부임한 헌병대장도 이 명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궁굼해 하였다. 그는 일본 무사출신이라 검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명검에 대한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궁굼증이 발동한 그는 수하를 대동하고 선암사를 찾아 혜월스님을 직접 만나보니 기대와는 달라서 헌병대장은 적잖이 실망하였다. 명검을 지닌 선사라면 풍모도 우람하고 그럴둣 하리라 상상했었는데 큰스님의 모습은 너무도 온순하고 자애로운 노승에 불과했다.
헌병대장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스님께서 활인검과 사인검을 가지고 계신다기에 그걸 구경하러 왔스무니다” "허허 그런가요? 소승이 가지고 있는것은 보잘것 없는 것인데 먼길을 오셨군요" "어서 그 검을 보고 싶읍므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보여 드릴테니 소승을 따라 오시지요”
혜월스님은 앞장서서 걷다가 대웅전 섬돌위로 성큼 올라섰다. 헌병대장도 위엄스런 몸짓을 하며 스님의 뒤를 따라 섬돌위로 올라섰다. 그 순간, 스님이 몸을돌려 돌아서더니 느닷없이 헌병대장의 뺨을 후려쳤다.
헌병대장은 순식간에 빰을 얻어맞고 섬돌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당황하는 그를 큰 스님이 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방금 전 당신의 뺨을 때린 손이 죽이는 칼이고 지금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손이 살리는 칼이라오”했다.
불교의 선(禪)가에서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본래면목(本來面目)인 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이뭐꼬?"의 화두(話頭)를 잡고 끝없이 정진하고 또 정진 하는데 그 한 물건을 칼로도 비유한다.
칼이란 분별심인 번뇌망상의 싹을 잘라버리거나 경계심인 벽을 허물거나 소통하게 하는 마음으로 비유해서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칼을 가지고 있다. 그 칼이 활인검이 될지 살인검이 될지는 스스로 갈고 닦아서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음수성독 우음수성유(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지학성보리 우학성생사(智學成菩提 愚學成生死) "같은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며 지혜로운 배움은 깨침이 되고 어리석은 배움은 생사를 이룬다"는 뜻인데 이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 나오는 말이다.
즉 같은 법이라도 어떻게 배우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사람 살리는 활인검인 부처가 될수 있는 것이고 똑 같은 법이라도 잘못 쓰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살인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먼저 참인간이 되어야 하고 지성을 갖추어 활인검의 묘약(妙藥)과 살인검의 피폐(疲弊)를 살펴야 한다.
법(法)은 종교에선 진리(다르마)로 통해야 한다. 진리란 진실한 것을 말함이라 진실은 시위나 여론몰이로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다. 진리가 형평성을 잃으면 이미 진리도 법도 아니고 오직 폭력일 뿐이다. 불의가 판을치는 사회 정의가 상실되는 사회 작금의 우리 현실은 활인검은 없고 살인검만 있는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칼이 사람을 죽이고 살릴수 있듯 글도 사람을 살리고 죽일수 있고 말도 사람을 살리고 죽일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칼을 갈고 닦아 쓰고 있는지 탄핵 정국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