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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마지막 일요일 저녁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고자
공식 경기장 크기의 인조잔디 구장이 있는 공원으로 나갔다.
1년 전 나는 그 공원의 골대 앞에서 축구팀 주전 골키퍼로 활약을 했었다.
프로 축구 골키퍼를 한때 나마 꿈꾸었었다.
신체적 조건을 직감 포기하게되었지만 나는 그저 골키퍼란 포지션에서 뛸 수 있는
자체가 즐거웠었다.
6-7월 각 팀들에서 러브콜이 들어올만큼..(막말로 학교 팀이었다지만...)
기량이 절정이었다.
그리고 2007년의 8월. 학업 때문에 축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1년을 채우기 몇칠 남지 않은 날.. 나는 다시 한번 골대 앞에 섰다.
공식경기 사이즈의 골대.
작년 나는 그 골대에서 미친듯 축구를 했었고
그 골대 앞에 다시선 오늘 내가 막아냈던 골대가 이렇게나 컸던가 하고
보게됬다.
그리고 그 골대를 묵묵히 지켰던 국가대표 김영광이 생각난다.
아마 그를 아는사람이라면 청소년 대표팀 때의 모습이나 그의 한경기라도 보았다면.
그의 장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것이다.
2006년 월드컵....
예선 탈락.
한국은 4년전의 영광을 되살리지 못했고 초라한 모습을 한체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몇개월 뒤
8년 가까이 한국팀의 코칭스태프를 지키던 베어벡 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했다.[현 호주감독]
그는 한국 축구대표팀의 "에이지-에볼루션"을 시도했다.
즉 세대교체을 시도했다.
많은 올드 보이들은 입지를 잃는듯 했다.
그중에 한명은 현 한국 최고의 커맨더 이운재.
홍명보가 빠진 한국팀을 이끌어준 현 한국 최고의 커맨더 이운재는 월드컵이 끝남과 동시에 주전에서 밀려났다.
김영광은 드디어 선배의 그늘에서 벗어나 화려한 천재의 비상을 하기 시작했다.
2004년 올림픽을 통해 두각을 나타낸 한국의 천재 골키퍼.
청소년 시절 부상중에도 경기참가를 하기위해 방치를 해 변형된 손...
그리고 2004년 그 손의 염증이 도졌다.
그는 연습중 수차례 눈물을 흘렸다.
특수장갑을 끼고 김영광은 경기에 임했고 외국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기도했다.
많은 그리스 국민들은 한국의 골키퍼에게 관심을 가졌고
외국에서는 당시 김영광의 손상태를 잘 몰라 핸드링 능력을 보며
"바르테즈 같지만 슈마이켈을 떠오르게하는 순발력"
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그는 과거부터 2006년까지 아니 나에겐 2001년 부터였을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골대를 굳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베어벡호의 출범.... 그리고 세대교체
불안정한 수비진
그리고 그해 10월이었던가 11월이었던가.
10월중순으로 기억하는데 가나와의 국가대표 평가전이 있었다.
한국은 거의 2군급의 전력이었고 가나 역시 비슷했다.
결과는 3:1 참패.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했던 경기.
그날 김영광은 눈물 범벅이 됐었다.
그는 그날의 눈물을 이렇게 설명했다.
"3실점 가운데 2번째 골까지. 방향을 모두 예측했는데 막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당시 코너킥-헤딩골을 포함한 헤딩골 2골과
페널티 에어리어 내에서의 슛팅으로 실점을 했는데.
경기 내내 한국은 무려 상대에게 유효슛팅이 15(-3)개나 내줬다.
그리고 3실점.
어쩌면 20-30%의 실점율이라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무료 70-80%의 가까운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헤딩골중 하나는 손에 맞고 들어갔었고
마지막 슛팅역시 그 짧은 순간에도 김영광은 골과 거의 1cm 차이로 공을
놓쳤다. 그는 경기 내내 수비에게 외쳤지만 붉은악마의 함성에 파묻혔다.
아마 그에겐 붉은악마의 함성이 무거운 짐이 된 경기였을것이다.
최초의 A매치 3실점.
나는 한국산 카시야스... 한국산 칸이
그 경기 때문에 심하게 위축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경기에서 그가 할수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해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곳에서 나타났었다.
바로 1차 이란전과 2차 시리아전이었다.
기억하는가?
1:0으로 리드하던 경기를 로빙슛으로 어이없게 무승부로 마친 경기를.
많은 언론은 김영광을 비난했다
쓸대없는 전진수비. 과도한 오버래핑 안정감의 결여.
하지만 축구를 아는사람이라면
혹은 자신이 골키퍼인 사람이라면 알것이다.
그것이 김영광의 실수가 아닌 김상식의 실수라고.
분명 김영광은 그 공을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사인까지 보내면서 나갔다.
하지만 김상식은 그 사인을 무시했고 자신이 공을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처리하지 못했고 볼아크 오른편에서 공을 바로 뺐겼다.
그리고 나왔던 김영광은 당황하며 급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로빙슛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축구팬들은 모두 이운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었다.
그리고 한국의천재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2차 시리아전....
역시 앞서던 상황.
단한번의 패스로 역시 한국의 수비진은 무너졌다.
공격수를 놓쳤고 한명의 수비수만이 따라붙고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거의 5m이상 벌어졌었고 공은 날아오고있었다.
공은 공격수의 20m 앞을 향해 날아오고있었고
김영광은 이미 그공을 처리하기위해 판단을 마친 상태였다.
그는 그 공을 중간에서 가슴으로 가로채 수비수에게 떨어뜨렸다.
하지만 한국의 수비진들은 2002년 수비진의 열정이 없었다.
그들은 공이 오길 기다리고있었고
그들은 단한명의 수비수만을 제외하고 모두 뚫린 자리에서 얼마 움직이지도 않은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공을 뺐겼다
김영광은 마지막까지 막아내려고 따라붙었다.
하지만 끝내 실점하고말았다.
아마 이날이 사실상 김영광의 입지를 뒤흔들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였다.
거의 7일가량 언론은 비난을 퍼부었고
출범 2개월도 체 되지 않은 베어벡호에게
색깔을 요구했고 무색무취의 축구 뻥축구 등을 말했다.
베어벡에게 필요했던것은 우수한 선수도 , 엄청난 지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국의 팬들은 허락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클럽팀들까지도
협조를 거부했다.
베어벡은 다급해졌고. 세대교체를 했던 국가대표팀에 당장 구심점이 되어줄 선수들을
상당량 투입했다.
대인마크 4백에서 지역방어 4백으로 전환한 한국팀의 수비진은 늘상 비난을 받았고
경기전 늘 3-4일전에 모인 그들은 맞출수있는 시간이 없었다.
수비에서 흔들리기 시작해 공격이 풀리지 않는 진행은 계속됬고. 무승경기는 많아졌다.
그리고 이 모든걸 골키퍼 김영광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상태로 그는 아시안게임에 참가했다.
그는 훌륭한 선방을 보여줬다.
아시안 게임 내내
그는 뛰어났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라크전...
그는 실점했다.
한국의 수비진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단한번의 패스로
1:1상황을 허락했다.
김영광은 막기위해 골에어리어 가쪽으로 나갔고
여유로운 공격수는 페이크를 시도 김영광을 속이고 슛팅을했다.
물론 이 슛팅은 김진규에 의해 1차적으로 막혔으나 2차 헤딩에 의해
김영광의 방어벽은 무너졌다.
베어벡은 말했다 한국축구의 장애물은 기자들이다 라고.
이말을 여실이 증명하듯 김영광은 또한번 도마위의 고기가 되었다
페이크에 속았단 이유로 침착하지 못하다 1:1 방어능력의 부족.
등 엄청난 악성 기사들이 실렸다.
하지만. 카시야스는 그렇게 여유로운 1:1상황에서 페이크에 속지 않았던가?
세계 탑클래스급 골키퍼들은 페이크에 절대 속지 않았던가.??
이운재는 페이크에 절대 속지 않고 모든 1:1상황을 막아내었던가?
이러한 논란속에서 천재 김영광은 마지막 A매치를 치루게 됬다.
팬들은 베어벡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고.
거의 9개월동안에 걸친 세대 교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베어벡은 끝내 아시안컵에서 "안전빵"을 선택할수 밖에없었다.
훈련기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한국의 팬들은 GRADE : Great 이 적힌 성적표를 원했다.
그리고 아시안컵 엔트리에 김영광은 포함되지않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짧은 비상을 마친 비운의 천재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김영광은 선배 이운재의 행적을 그대로 밟아가는지도 모른다.
94년 독일 월드컵 당대 한국 최고의 골키퍼 최인영은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독일전으로 기억)
최인영은 어처구니없는 실점[총 3실점]을 했다.
그리고 이운재가 투입됬고 화려한 선방능력을 과시했다. 마치 선배에게 가려진 울분을 토해내듯.
하지만 그 역시 운을 겸비한 수재는 아니었다.
그는 체중조절 실패와 간질환으로 인해 장기간 휴식을 취해야했고
서동명골키퍼와 김병지 골키퍼에게 주전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렇게 .... 이운재는 잊혀지는듯 했다.
그리고 2002년...
그는 주전이었다.... 한국의 두번째 야신상 후보...[김병지가 98년에 야신상 후보였다는 소리를 들은터라...]
김병지는 2002년 월드컵 당일까지 주전자리를 보장받은 골키퍼였다.
[어쩌면 평가전 오버래핑을 문제로 주전에서 밀렸다고 할지 모르나 히딩크는 2002년 당일까지 김병지를
내보내려했었다.]
하지만 그날 한국의 또다른 천재 김병지 역시 운이 좋지 못했다.
당일 컨디션이 안좋았던 그는 히딩크에 눈에 들었고.
히딩크는 고심끝에 이운재를 출전시키기로 결정 다음경기 그다음경기까지 수비진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운재를 지속적으로 기용
끝내 이운재의 천하를 열게 된다.
김영광은 어쩌면 한국 최고의 커맨더 이운재의 행적을 그대로 밟고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울산 이적후 0.6xx대 방어율을 선보이며 활약했다. 그러나 국가대표경기에 출전하지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을수도 있다...
그의 올해 성적은 무난한 편이지만.
이제 슬슬 우리의 입방아 아래 망가진 천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때가 아닌가 싶다.
Little Khan Kim Young Kwang.
2006 Back Number 31
A match 11/-9
2006년 후반기
슛팅방어율 70%[30//9)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실점율이 높다고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운재 역시 국가대표 초기엔 실점율이 1점이 넘었고
김영광은 엄청난 혁명의 중심 속 에서 있었다는걸 상기시켜본다.
한국의 비운의 천재 골키퍼.
그렇다.. 정말 우리의 입방아 아래 망가진 천재.. 우린 다시 그를 생각해보아야한다.
2008-07-28 CountSave[Starc Asia MiGht.L]
첫댓글 글쓴님 글을 정말 잘쓰셨네요.. 김영광 뿐만아니라 우리나라골리들은 세계에 내놔도 전혀 밀리지 않는 포스를 가지고 잇는거 같은데 .. 외국에서 잘 못알아 주는거 같아요. 월드컵이라던가 큰 경기후에 "상대편 골키퍼가 너무 잘했다." 꼭 느낌에 "런 골키퍼가 있는줄 몰랐다" 라는 거 같아서 ..
김영광.... 정말 불운의 선수구나...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