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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矗石樓)의 고증
진주 촉석루(矗石樓)는 단순한 경승용 정자가 아니라,
진주성의 군사지휘소이면서 지방 행정·과거시험·연회·풍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지금 우리가 보는 촉석루가 13세기 건물 자체가 아니라,
전란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고 다시 지어진 약 800년 역사의 ‘재건축된 누각’이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1593년 임진왜란과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두 전쟁이 촉석루의 건축사를 크게 갈라놓았습니다.
1. 촉석루는 왜 그 자리에 세웠을까?
촉석루의 위치부터가 건물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진주성 남쪽, 남강을 바로 내려다보는 높은 바위 절벽 위입니다.
‘촉석(矗石)’이라는 이름도 강가에 뾰족하게 솟은 바위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곳은 경치만 좋은 것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탁월합니다.
남강 건너편과 강을 따라 이동하는 병력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 때에는 진주성을 지휘하는 남장대(南將臺) 역할을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향시(鄕試)를 치르기도 해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불렸습니다.
즉 촉석루는 처음부터 군사시설 + 관아의 공공공간 + 경승 누각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지닌 건물이었습니다.
2. 창건 — 일반적으로 1241년 김지대
현재 진주시와 국가유산 관련 안내에서 통용되는 연혁은 고려 고종 28년인 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창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학술적 논쟁이 있습니다.
촉석루 연혁을 고문헌으로 재검토한 연구에서는 1241년 김지대 창건설을 확정적인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문헌으로 명확하게 확인되는 비교적 이른 기록은 1322년 진주 통판 안진(安震)의 중수입니다.
따라서 1241년 이전 또는 그 무렵에 누각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정확한 최초 창건 연대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촉석루 역사를 볼 때 꽤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3. 고려 말~조선 초: 전쟁과 첫 대규모 재건
문헌 연구를 기준으로 주요 변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도 촉석루의 변화
1241 전통적으로 진주목사 김지대 창건으로 알려짐
1322 진주 통판 안진이 중수
1380 왜구 침입으로 소실
1413 진주목사 권충 등이 중건
1491 진주목사 경임 등이 중수
1583 진주목사 신점 등이 중수
1593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완전 소실
1606 경상우병사 김태허가 중건 시작
1618 경상우병사 남이흥이 중건 완공
1693·1724·1810·1886 여러 차례 대규모 중수
1908 진양계에서 중수
1949 국보촉석루중수위원회 중수
1950 한국전쟁으로 소실
1960 진주고적보존회가 현재 건물 중건
이 연혁은 특히 고문헌을 재검토한 「矗石樓 沿革 再考」의 연구 결과와 공식 자료를 대조한 것입니다.
4. 촉석루의 전성기 — 본루 하나가 아니었다
이 부분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촉석루를 보면 큰 누각 한 채가 중심이지만, 조선 전기의 촉석루는 훨씬 거대한 누각 복합체였습니다.
본루 양쪽에 네 채의 익루(翼樓)가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함옥헌(涵玉軒·능허당)**과 청심헌(淸心軒),
서쪽에는 **쌍청당(雙淸堂)**과 **관수헌(觀水軒·임경헌)**이 자리했습니다.
쌍청당은 1481년 이전, 함옥헌과 청심헌은 1498년, 관수헌은 늦어도 1527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연구됩니다.
따라서 약 1527~1593년 촉석루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중앙의 거대한 촉석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네 개의 누각이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연결된
대규모 누각군이 남강 절벽 위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연구자는 당시 규모와 경관이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고 평가합니다.
이 모습을 복원해서 상상하면 현재의 촉석루보다 훨씬 웅장했을 것입니다.
5. 1593년 — 촉석루 역사 최대의 단절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했지만,
이듬해인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됩니다.
이때 촉석루 본루와 네 채의 익루도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논개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진주성이 함락된 뒤 논개가 남강변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촉석루·의암·남강은 하나의 역사적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6. 1606~1618년 — 우리가 아는 촉석루의 원형 탄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촉석루 복구가 추진됩니다.
**1606년 경상우병사 김태허(金太虛)**가 중건을 시작했고,
약 12년 뒤인 **1618년 경상우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완성했습니다.
공식 문화유산 안내에서도 1618년의 중건을 중요한 역사적 기준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단순히 옛 건물을 똑같이 다시 지은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웅장한 누각으로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의 네 익루 전체가 복구된 것은 아닙니다.
동쪽의 청심헌은 1604년 먼저 복구되고 함옥헌도 1618년 촉석루와 함께 중건되었지만,
서쪽의 쌍청당과 관수헌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청심헌도 사라지고 함옥헌 역시 1907년 훼철되어 오늘날에는 본루 중심의 모습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촉석루 주변이 조선 전기의 모습보다 훨씬 단순해 보이는 것입니다.
7. 현재 촉석루의 건축적 특징
현재 건물은 정면 5칸 × 측면 4칸 규모의 대형 목조 누각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입니다.
전체 면적은 국가유산포털 기준 508.6㎡입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지형에 맞춰 기둥의 하부 구조를 다르게 처리했다는 점입니다.
남강 쪽은 높은 절벽이라 누각이 강 위로 떠 있는 듯 보이고,
성 안쪽에서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누마루에 접근하게 됩니다.
따라서 강 건너편에서 보면 촉석루는 실제 규모보다 훨씬 높고 웅장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촉석루 건축의 핵심입니다.
건물 자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절벽 + 성벽 + 누각 + 남강’ 전체가
하나의 건축경관으로 설계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8. 1950년 한국전쟁 — 두 번째 대소실
조선 후기에도 촉석루는 계속 수리되었습니다.
1693년, 1724년, 1810년, 1886년에 중수가 이루어졌고, 근대에 들어서도 1908년 진양계가 중수했습니다.
1949년에는 국보촉석루중수위원회가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당시 촉석루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중요한 고건축이었습니다.
자료에 따라 국보 지정 연도를 1948년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불과 1년여 뒤인 1950년 한국전쟁 중 촉석루가 불타 없어집니다.
이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생깁니다.
현재 촉석루의 목재와 구조물은 1618년 건물이 그대로 남은 것이 아닙니다.
현재 건물은 1960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위와 같은 옛 사진 자료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960년 복원 당시 한국전쟁 이전 촉석루의 모습과 각종 기록을 근거로
조선 후기 형태를 되살리는 방식이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9. 1960년 — 시민의 힘으로 다시 세우다
전쟁 후 촉석루 복원에는 진주시민들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진주고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시민 성금을 모아 1960년 중건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촉석루는 건축사적으로 조금 특이한 지위를 가집니다.
역사적 계보는 고려~조선으로 700년 이상 이어지지만, 현존 목조건축물 자체의 건립연대는 1960년입니다.
이 때문에 현재 촉석루는 국보가 아니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국가유산포털에는 2020년 6월 11일 지정, 1동 508.6㎡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촉석루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세 시점
제가 촉석루의 800년사를 압축한다면 1241 → 1618 → 1960이라는 세 연도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1241년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최초 창건,
1618년은 임진왜란 후 완성된 조선시대 촉석루의 원형,
1960년은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1618년 계통의 건물을 다시 복원한 현재 촉석루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보는 촉석루는 “1960년에 지은 새 건물”인 동시에
“13세기부터 약 800년간 같은 장소와 기능·형태의 전통을 이어온 역사적 누각”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습니다.
그리고 건축사적으로는 평양 부벽루·밀양 영남루 등과 함께 거론되는 명루라는 점보다도,
남강의 자연 절벽을 성곽의 방어시설과 누각 건축으로 결합한 입지가 촉석루의 가장 뛰어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시 역시 촉석루를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누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다음에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① 1950년 소실 직전 촉석루와 1960년 복원 촉석루가 실제로 얼마나 똑같은지,
② 1960년 복원공사 때 설계자·목수·사용 목재와 복원 근거,
③ 조선시대 촉석루의 네 개 익루(함옥헌·청심헌·쌍청당·관수헌)를 포함한 전체 배치를 옛 그림·사진까지 찾아서
‘1593년 이전 촉석루 복원도’처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을 조사하면 지금 보시는 촉석루가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네.
다시 자료를 찾아보니, 앞서 말씀드린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됩니다.
특히 2024~2026년에 새로 확인·공개된 1937년 실측도와 1957년 재건 설계도 덕분에
“1960년 촉석루가 과연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인가?”라는 오랜 논쟁에 상당한 답이 나왔습니다.
1.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현재의 촉석루는 단순히 1960년에 옛 건물을 흉내 내어 새로 지은 누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937년, 즉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13년 전에 작성된 촉석루 실측도와 1957년 재건용 설계도를 비교한 결과,
규모·구조·비례가 사실상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두 도면은 모두 당시 척(尺)을 단위로 1/30 축척으로 작성됐습니다.
따라서 현재 촉석루는 적어도 건축의 형태와 구조 면에서는 1950년 소실 직전의 촉석루를 매우 충실하게
재현한 건물이라는 근거가 상당히 강해졌습니다.
이것이 최근 촉석루를 다시 국가 지정 문화유산인 보물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의 핵심 근거이기도 합니다.
2026년 7월 경상남도 건축문화유산분과위원회 심의를 통과했고, 이제 국가유산청 심의를 거치는 단계입니다.
2. 1950년 이전 촉석루는 어떤 건물이었나
위와 같은 한국전쟁 이전 사진을 보면 현재 촉석루와 매우 비슷합니다.
기본 형식은 [정면 5칸 × 측면 4칸 / 2층 누각 / 팔작지붕]입니다.
현재 국가유산포털의 촉석루 면적은 508.6㎡로 등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흔히 ‘2층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래층을 방이나 실내공간으로 사용하고 그 위에 2층을 올린 일반적인 2층집보다는,
높은 누하주(樓下柱) 위에 넓은 누마루를 얹은 누각입니다.
남강 쪽에서 올려다보면 굉장히 높은 2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성 안쪽에서는 자연스럽게 누마루로 접근합니다.
이것이 촉석루 건축의 묘미입니다.
3. 특히 중요한 ‘누하주’ 문제
최근 촉석루의 보물 지정 문제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이 바로 누하주, 즉 누각 아래를 받치는 기둥입니다.
2014년 촉석루의 국가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했을 때 부결된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1960년 복원 과정에서 원래 목재였던 기둥을 화강석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추가 조사에서는 당시 문교부 승인을 받아 복원이 진행됐으며,
국립박물관 소속 복원 전문가 임천이 설계와 감독에 참여했다는 자료 등이 제시됐습니다.
진주시는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원형 훼손 논란을 적극 해명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쟁 후에도 촉석루의 대석·석문·돌계단 등 일부 석조 기반은 살아남아 있었다는 당시 기록과 조사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학술적 쟁점은 “1960년에 완전히 새로운 촉석루를 창작했다”가 아니라,
“전쟁에서 남은 기초와 1937년 실측자료 등을 이용하여 얼마나 충실하게 복원했느냐”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4. 1937년 실측도와 1957년 복원 설계도
이번 조사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료입니다.
2024년 경남연구원의 조사 과정에서 다음 자료들이 확인됐습니다.
* 1937년 촉석루 실측도 4장
* 1957년 재건공사 설계도 5장
* 진주시교육위원회가 문교부에 보낸 원상복구 승인 요청 공문
* 1957년 당시 촉석루 복원을 보도한 신문자료
1937년 도면은 일제강점기 당시 실제 건물을 측량하여 그린 것이므로,
1618년 중건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20세기까지 남아 있던 촉석루의 실물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57년 재건 설계도와 이를 대조하니 정면도상 구조와 규모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따라서 계보는 사실상 이렇게 이어집니다.
1618년 중건 촉석루
→ 1719세기 여러 차례 중수
→ 1908년 중수
→ 1937년 실측
→ 1949년 중수
→ 1950년 전소
→ 1937년 실측자료 등을 바탕으로 195760년 복원
→ 현재 촉석루
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5. 그러면 1960년 복원공사는 누가 했나?
여기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사라진 촉석루를 복원하기 위해 진주시민들이 움직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 촉석루 복원을 위한 조직과 모금운동이 시작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진주 방문을 계기로 국가 지원도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기사에는 약 5천만 환 규모의 국비 지원이 언급됩니다.
복원 과정에는 당대에 이름난 전통 목수들도 참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도편수 임배근이 확인됩니다.
수원 출신으로 당시 ‘목수계의 정승’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전주의 유명 대목장이었던 고택영도 참여했습니다.
설계·복원과 관련해서는 국립박물관 소속 복원 전문가 임천의 설계 및 감독 참여도 최근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즉, 문화재 전문가가 설계를 고증하고 → 전통 대목수가 실제 목구조를 짜 맞춘 상당히 본격적인 문화재 복원사업이었습니다.
6. 목재까지 전국에서 구했다
촉석루는 일반적인 목조건물보다 규모가 커서 무엇보다 대들보용 목재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적합한 대형 목재를 찾기 위해 약 2년간 전국을 수소문했고, 결
국 강원도 인제에서 대들보용 큰 나무를 구했다고 합니다.
1959년 11월 10일에는 상량식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1960년에 복원이 완성됐습니다.
이 사진은 실제 복원공사 당시 모습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처럼 철제 비계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목재 비계 자체를 엮어
건물을 올리는 당시 전통적인 공사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점도 촉석루 복원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 그런데 1593년 이전 촉석루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여기서부터 촉석루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우리가 현재 보는 것은 사실 촉석루 복합건축의 중앙 부분만 남은 형태에 가깝습니다.
조선 전기의 촉석루에는 본루 좌우에 **네 채의 익루(翼樓)**가 있었습니다.
경상대학교 최석기 교수의 고문헌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치 건물 다른 이름 대략적인 창건
서쪽 쌍청당(雙淸堂) - 1481년 이전
서쪽 관수헌(觀水軒) 임경헌(臨鏡軒) 1527년 이전
중앙 촉석루(矗石樓) 장원루 등 고려시대
동쪽 함옥헌(涵玉軒) 능허당(凌虛堂) 1498
동쪽 청심헌(淸心軒) - 1498
따라서 16세기 초의 촉석루를 위에서 아주 단순화하여 표현하면 대략
[쌍청당 — 관수헌 — [ 촉석루 ] — 함옥헌 — 청심헌]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도식은 정확한 평면복원도라기보다는 상대적 위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도입니다.
8. 왜 ‘익루(翼樓)’라고 불렀나
翼은 ‘날개’라는 뜻입니다.
중앙의 촉석루 양옆으로 작은 누각들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옛 기록에서는
마치 큰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습처럼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최석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약 1527년부터 1593년까지 약 70년 동안 이런 5동의 누각군이 유지됐습니다.
연구자는 당시 촉석루 일대가 규모와 경관 면에서 국내 누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전 진주성 남쪽을 남강 건너에서 바라보았다면 지금처럼 큰 누각 하나가 보이는 게 아니라,
남강 절벽 위로 여러 누정이 수평으로 길게 펼쳐진 거대한 건축군이 보였던 것입니다.
9. 1593년의 파괴
이 장대한 누각군은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촉석루 + 쌍청당 + 관수헌 + 함옥헌 + 청심헌]이 모두 소실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촉석루 건축사의 가장 큰 분기점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복구가 시작됐지만 다섯 동을 모두 재건하지는 못했습니다.
10. 임진왜란 후 무엇이 돌아왔나
1604년 경상우병사 이수일이 진주성을 정비하면서 동쪽의 청심헌을 먼저 재건했습니다.
이어 1606년 경상우병사 김태허가 촉석루 본루의 중건을 시작하고, 1618년 경상우병사 남이흥이 완성합니다.
이때 동쪽의 함옥헌도 다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서쪽에 있던 쌍청당과 관수헌은 다시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17세기부터 촉석루의 모습이 전쟁 전의 좌우대칭에 가까운 복합 누각군에서
[촉석루 + 동쪽 부속누각]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11. 마지막 익루까지 사라지다
청심헌은 1623년 다시 화재로 사라졌지만 이듬해인 1624년 재건됐습니다.
그러나 1757년 이전에 다시 무너진 뒤에는 더 이상 중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함옥헌만 남았습니다.
함옥헌은 1887년에 다시 중수되어 20세기 초까지 살아남았지만,
1907년 일제강점기 초 일본인들에 의해 훼철됐다는 것이 최석기 교수 연구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촉석루 사진에는 지금처럼 본루 한 채만 있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12. 시대별 모습을 그림처럼 정리하면
① 1527~1593년 — 가장 화려했던 시절
진 주 성 안쪽
쌍청당 ─ 관수헌 ── 촉 석 루 ── 함옥헌 ─ 청심헌
│
촉석 절벽
│
의암 · 남강
~~~~~~~~~~~~~~~~~~~~~~~~~~~~~~~~~~~~~~~~
남 강
※ 이것은 위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도입니다.
이때가 촉석루 역사상 가장 장대한 모습입니다.
② 1618년 이후
촉 석 루 ─ 함옥헌 ─ 청심헌
│
남강 절벽
~~~~~~~~~~~~~~~~~~~~~~~~~~~~~~~~~
남 강
서쪽의 관수헌·쌍청당은 사라집니다.
③ 18세기 후반~1907년
촉 석 루 ─ 함옥헌
│
~~~~~~~~~~~~~~~~~~~~~~~~~~~~~~~~~
남 강
④ 1907년 이후
촉 석 루
│
촉석 절벽
│
의암 · 남강
~~~~~~~~~~~~~~~~~~~~~~~~~~~~~~~~~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형태의 출발점입니다.
13. 1950년 촉석루는 정확히 어떻게 사라졌나
이 부분도 과거에는 단순히 “6·25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이라고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자료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정황이 확인됩니다.
당시 진주는 북한군이 점령했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어서 미 공군의 집중 공습 대상이 됐습니다.
촉석루에도 북한군의 군사시설 또는 지휘시설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1950년 9월 초 미군 공습 과정에서 촉석루가 전소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9월 1일 소이탄에 의해 소실된 것인지, 9월 2일 대규모 B-29 공격과 관련된 것인지는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아직 조심스럽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소 후에는 목조건축 부분은 사실상 없어졌고 석조 기단·기초 계통의 일부만 남았습니다.
14. ‘복원’인가 ‘재건’인가
이것은 문화재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건물을 새 재료로 지었으므로 엄밀하게는 1960년의 촉석루는 재건축물입니다.
하지만
* 원래 위치에 지었고
* 남아 있던 석조 기반을 활용했으며
* 소실 전 실측도가 존재했고
* 그 실측도를 토대로 설계했고
* 전통 목조건축 방식으로 지었고
* 당대 최고 수준의 대목수가 참여했으며
* 규모와 구조가 소실 전 건물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자료
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문화재계에서는 촉석루의 가치가 과거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15. 그리고 아주 최근, 2026년에 중요한 변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최신 자료를 확인하면서 발견한 부분입니다.
2026년 9월 현재 ‘진주 남강 촉석루 일원’이 국가 명승 지정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국가유산청은 바로 며칠 전인 2026년 9월 9일, 남강·촉석 절벽·촉석루·진주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경관을
국가지정 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습니다.
평가 내용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단순히 촉석루 건물만 보지 않고 [남강 수면 → 촉석 암벽 → 진주성 성벽 → 촉석루]가 층층이 형성하는
입체적 경관을 하나의 문화경관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촉석루에서 남강을 내려다보는 하향 조망과 남강 쪽에서 촉석루를 올려다보는 상향 조망이
서로 대응한다는 점도 중요한 평가 대상이 됐습니다.
이것은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촉석루의 진정한 건축은 누각 한 채가 아니라 절벽·성벽·누각·남강 전체이다.”라는
설명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16. 촉석루의 800년사를 한 장으로 정리하면
시기 주요 변화
1241~42경 김지대 재임기에 창건 추진 추정
1322 안진 중수
1380 왜구 침입으로 소실
1413 권충 등이 중건
15~16세기 4개의 익루가 차례로 건립
1527~1593 촉석루+4익루의 최대 전성기
1593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전부 소실
1604 청심헌 복원
1606~1618 촉석루 재건
1618 함옥헌 복원
17~19세기 수차례 중수
1757 이전 청심헌 소멸
1907 마지막 익루 함옥헌 훼철
1908 촉석루 중수
1937 촉석루 정밀 실측도 작성
1948 국보 지정
1949 대규모 중수
1950 한국전쟁으로 전소
1957 원형복구 설계 및 공사 추진
1959 상량
1960 현재 촉석루 완공
2020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지정
2026.7 보물 승격 경남도 심의 통과
2026.9 ‘진주 남강 촉석루 일원’ 국가 명승 지정 예고
제가 이번에 조사하면서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
촉석루를 지금 가서 보면 “남강 위에 있는 아름다운 큰 누각”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진주 사람이 보았던 촉석루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중앙에 거대한 촉석루가 있고 양쪽에 네 채의 익루가 날개처럼 뻗어 있으며,
그 아래로 수직의 촉석 절벽과 남강이 펼쳐진 대규모 건축경관이었습니다.
그리고 1593년 임진왜란 → 1907년 마지막 익루 훼철 →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세 차례의
큰 단절을 거치면서 지금의 단독 누각 형태가 된 것입니다.
더욱이 1937년 실측도와 1957년 설계도가 사실상 일치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다시 확인됐기 때문에,
지금의 촉석루를 단순한 ‘1960년 신축물’로 보는 기존 관점은 상당히 수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1937년 촉석루 실측도와 1957년 복원 설계도의 실제 그림을 찾아 서로 나란히 놓고,
기둥 위치·5×4칸 평면·지붕·누하주까지 하나씩 비교해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겠습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이전 함옥헌이 촉석루 옆에 실제로 보이는 가장 오래된 사진이나 회화·고지도까지 찾아보면,
1593년 이전의 ‘5동 촉석루 복합체’를 어느 정도 시각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