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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며느리 둘을 쫓아내야 했던 까닭은
독수공방 못 참은 세자빈들 엽기 행각
휘빈 김씨 ‘압승술’ 이어 순빈 김씨 동성애 스캔들
단종의 친모 현덕빈 권씨는 출산 다음 날 세상 떠나
▎조선시대 궁궐 내에서는 궁녀들 간 동성애 행각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디지털 코믹을 통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게임 ‘오버워치’ 속 캐릭터들.
세종 23년(1441) 7월 23일 경복궁은 커다란 기쁨에 휩싸였다. 왕세자빈 권씨가 동궁 자선당에서 오매불망 바라던 원손(元孫)을 낳은 것이다.
왕조 국가에서 후계자 문제는 나라의 안녕과 직결되는 중대사다. 세자(훗날의 문종)가 28세에 이르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자 왕실과 조정의 근심이 적지 않았다. 장년이 머지않은 나이였다. 당시 왕실 풍습에 비춰볼 때 상당히 늦어진 것이다. 18세에 세자를 본 세종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원손의 탄생은 그래서 궁궐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걱정을 말끔히 씻어준 큰 경사였다.
적장손(嫡長孫)을 얻은 세종대왕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8남 2녀를 뒀고,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봤다. 어느덧 손자·손녀도 여럿 태어나 재롱을 부렸다. 하지만 세자의 후사가 감감무소식이라 내심 초조했다. 세종은 유교 종법에 따라 적장자-적장손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원했다. 그래야 왕권의 정통성이 바로 서고 나라의 기틀이 잡힌다고 믿었다. 그러니 원손의 탄생이 얼마나 기뻤을까.
영의정 황희가 신하들을 이끌고 축하하러 오자 세종은 조심스레 대사면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 대사면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죄수들을 대거 풀어주는 것이다. 예로부터 종종 시행하기는 했지만 세종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재위 중에 좀처럼 사면해주지 않았다. 일부 가벼운 죄에 한해 감면해줬을 뿐이다. 사면은 “군자에게는 불행이요, 소인에게는 다행”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이날만은 “우리나라에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해 근정전에서 대사면 교서를 반포했다.
“원자의 탄생은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일이다. 이에 대사면을 단행하니 대역 모반한 것, 강상(綱常)을 범한 것, 독약이나 저주로 살인한 것, 강도를 범한 것 외에는 이미 발각됐거나 아니 됐거나, 이미 결정됐거나 아니 됐거나 다 용서해 죄를 없애줄 것이다. 경사를 맞아 너그러운 은전을 베풀어 나라의 원대한 계획을 널리 펼치리라.” 그런데 반포를 미처 끝마치기 전에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근정전을 밝히는 대촉(大燭), 큰 등불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세종실록] 1441년 7월 23일).
대촉을 얼른 철거하기는 했지만 궁궐의 공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내관들은 찜찜한 얼굴을 하고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비보가 전해졌다. 원손을 낳은 세자빈 권씨가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종은 동궁 자선당을 두세 번이나 오가며 병세를 살폈다. 궁인들의 눈물 속에 며느리가 숨지자 왕은 수라마저 물리치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동안 궁궐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세자 이향은 세종의 반듯하고 총명한 맏아들이었다. 한양 사저에서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오르면서 1421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됐다. 그는 부왕을 닮아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학문에 관심이 깊었다. 세종과 마찬가지로 천문·역법·언어·음운 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또 성격은 부드러웠고 기품이 있었으며 언행도 신중했다. 어진 임금이 될 자질을 두루 갖춘 모범생 세자요, 조선의 기대주였다.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세자였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부부 금실이 나빴다는 것이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이향의 결혼 생활은 부왕의 증언으로 역사에 자세히 기록됐다. 세종은 과거 한나라 유학자들이 신봉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 군주였다. 실사구시는 사실에 근거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다. 역사 기록도 될 수 있으면 사실대로 남기게 했다. 세자빈들의 ‘엽기적인 궁중 생활’이 민망하지만 적나라하게 실록에 담겨있는 이유다.
남자 미혹시키는 주술 쓰다 발각돼 폐출
▎SBS 사극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 역을 맡은 한석규.
세자는 1427년 14세에 김오문의 딸을 배필로 맞았다. 첫 번째 아내 휘빈 김씨였다. 그녀는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으로 생몰년은 분명치 않지만 세자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향이 세자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수공방하던 김씨는 외롭고 조급한 마음에 금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압승술(壓勝術)’, 곧 남자를 미혹시키는 주술을 쓰려 한 것이다. 세자빈은 호초라는 시녀에게 정보를 얻었다.
“내 듣자 하니 부인이 남편에게 사랑받는 술법이 있다는데 혹시 아는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걸 술에 타서 남편에게 먹이면 부인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인은 멀어진다고 합니다.”
휘빈 김씨는 시녀 효동과 덕금에게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 둘이 세자의 총애를 받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세자빈은 시녀들의 신을 가져오게 해 자기 손으로 베내었다. 하지만 차마 가루를 만든다거나 세자에게 먹이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호초는 다른 방법을 귀띔했다.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모두 사대부의 버린 첩이나 기생첩으로부터 귀동냥한 압승술이었다.
궁중은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많은 곳이다. 해괴한 소문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가법(家法)을 중시하는 세종은 소문을 듣고 내관을 보내 조사에 나섰다. 엄격한 심문에 호초가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증거도 나왔다. 휘빈 김씨 집안의 여종 출신인 시녀 순덕이 세자빈의 약 주머니에서 신발 조각을 찾아내 감추고 있었다. 주인을 지키고자 그리 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져 순덕마저 심문을 받았고 결국 신발 조각을 바치고 말았다.
이로써 압승술 사건의 자초지종이 드러났다. 조사를 마친 세종과 소헌왕후는 며느리를 불러들였다. 심문 결과를 들이대며 자복하게 한 것이다. 왕은 이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했다. 압승술은 세간의 첩들이 남자를 미혹하기 위해 쓰는 요망하고 사특한 술법이었다. 용납할 수 없는 주술을 궁중에 들인 여인에게 장차 국모의 자리를 맡길 수는 없었다. 1429년 7월 세종은 세자빈 폐출 교서를 내렸다. 휘빈이 시집온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배필이 서로 만나는 것은 백성을 낳는 시초로, 운과 복의 길고 짧음과 나라의 흥성하고 쇠잔함이 이에 달렸다. 부덕한 자가 받드는 제사는 조종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터이니, 세자빈을 폐하고 사가로 쫓아낸다.”([세종실록] 1429년 7월 20일)
3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였던 세종! 그는 원칙주의 자답게 부덕한 며느리를 쫓아냈다. 애매한 의혹이 남지 않도록 그 사실을 교서에 자세히 적어 신하와 백성들에게 공표했다. 젊고 날카로운 의기가 번뜩이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너그럽지 못한 측면도 엿보인다. 알고 보면 말만 무성할 뿐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휘빈 김씨를 외롭게 한 세자도 잘한 게 없다. 오히려 원인 제공자라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세종은 나중에 이 일을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다음 세자빈은 더욱 낯뜨거운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사육신묘, 조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여섯 명의 충신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해 10월 봉여의 딸이 세자의 새 배필이 됐다. 순빈 봉씨 또 한 세자와 금실이 좋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두 사람을 불러 타이른 것을 보면 부부 싸움이 잦았던 모양이다. 순빈은 휘빈과 달리 뒤에서 은밀히 도모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 성격이었다. 오매불망 원손을 바라던 세종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후사가 늦어지면 나라의 안녕을 해칠 수도 있다. 왕은 고심 끝에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1431년 세종은 명문가 출신의 처자들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였다. 권씨·정씨·홍씨가 종4품 승휘(承徽)에 봉해졌다. 몇 해 후 권 승휘가 임신하자 순빈 봉씨는 질투와 원망과 노여움을 쏟아냈다. 후궁이 아들을 낳으면 자기가 쫓겨날 것이라며 밤마다 통곡했다. 한밤중에 꺼이꺼이 우는 소리가 동궁 담벼락을 넘어 궁중에 흘러들었다. 잠을 설친 왕과 왕비는 세자를 불러 아내를 잘 다독이라고 당부했다. 후궁에게서 자식을 보더라도 본부인의 핏줄만큼 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세자빈을 더욱 위하고 가까이하라는 것이었다.
세자도 느낀 바가 있었는지 순빈을 우대하기 시작했다. 춘풍이 불어오자 봉씨는 원손 생산에 매달렸다. 세자빈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순빈 봉씨가 임신 소식을 알렸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크게 기뻐하며 세자빈이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거처를 중궁으로 옮기게 했다. 하지만 순빈은 한 달 만에 낙태를 고백했다. 뱃속에서 나온 단단한 물건이 이불 속에 있다고 해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봉씨의 간절한 열망이 낳은 상상 임신이었을 것이다.
이 일로 순빈 봉씨는 신망을 잃었다. 왕과 왕비마저 속이는 희대의 거짓말쟁이가 됐다. 궁궐에서 그녀는 홀로 떠 있는 섬 같은 존재였다.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심장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으리라. 순빈에게 필요한 것은 한 줄기 따뜻한 관심이었다. 막다른 길목에서 봉씨는 금지된 사랑에 눈을 떴다. 시녀와 여종들 사이에 은밀히 번져있던 동성애였다.
궁궐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곳이다. 구중심처의 여인들은 환관을 제외하곤 남성과 격리돼 있었다. 극도로 고립된 환경에서 외로움을 못 이긴 시녀와 여종들은 서로 좋아해 동침하기도 했다. 세종은 아름답지 못한 풍속이라며 궁궐 내 동성애를 엄격히 금했다. 이를 범하면 곤장 70대를 때리게 했고, 또 걸리면 추가로 100대를 더했다. 왕이 무거운 벌을 내리자 이 풍습은 수그러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런데 세종의 며느리가, 일국의 세자빈이, 이 금단의 과실에 손을 댈 줄이야.
발단은 1435년 동짓날의 일이었다. 길고 긴 겨울밤이 아득했는지 순빈 봉씨가 소쌍이라는 여종을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봉씨가 동침을 요구하니 여종이 어찌 상전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그날 이후 순빈은 소쌍을 몹시 사랑해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얼마나 집착하는지 주인이 무섭다고 여종이 토로할 정도였다. 소쌍은 원래 권 승휘의 몸종 단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이 사실을 안 세자빈은 집안 여종더러 소쌍의 뒤를 밟게 해 단지와 어울리지 못하도록 했다([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
며느리의 일로 궁이 떠들썩해지자 세종과 소헌왕후가 소쌍을 불러 진상을 물었다. 여종은 상전의 집착에 질렸는지 술술 털어놓았다. 누가 세자빈 좀 말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순빈 차례였다. 봉씨는 소쌍과 단지의 애정행각일 뿐 자기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맹세코 여종과 동침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자빈의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조선 명탐정’ 세종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소쌍과 단지가 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
실감 나는 표현이다.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다니,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하지 않으면 묘사할 수 없는 행위가 아닌가. 세종이 엄금한 풍습에 세자빈이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다는 뜻이다. 이에 왕은 1436년 10월 순빈 봉씨를 폐출했다. 며느리를 두 명이나 쫓아낸다는 게 체면 구겨지고 웃음거리가 될 일이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단, 세자빈이 여종과 동침한 일은 추잡하다 해 교서에서 뺐다. 대신 봉씨가 시녀 변소의 벽 틈으로 외간 남자들을 훔쳐보거나 세자궁 물품을 사사로이 바깥으로 빼돌렸다는 등의 이유를 갖다 붙였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여읜 어린 임금의 비운
▎세조의 화상, 해인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종은 서둘러 세 번째 세자빈을 찾았다. 명문가 규수 몇 사람을 뽑아 길흉을 점치고, 덕과 용모를 살폈다. 그러나 임금의 뜻에 맞는 며느릿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세자의 후궁들 가운데 적임자를 뽑자는 의견이 대신들에게서 나왔다. 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실패를 겪다 보니 이번에는 검증된 사람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새로운 세자빈 자리는 1435년 딸을 낳고 종3품 양원(良媛)으로 승진한 권씨에게 돌아갔다. 세자는 홍 승휘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세종이 권 양원을 낙점한 것이다. 후사에 목마른 세종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자식도 낳아본 여인이 잘 낳을 것이라고 왕은 기대했다. 권씨가 원자 생산의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과연 세자빈 권씨는 1441년 7월 23일 원손을 출산하며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나라의 큰 경사를 맞아 임금이 대사면 교서를 반포하는 순간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경복궁 근정전의 큰 등불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이튿날 권씨가 산후병으로 죽었다. 느긋하고 고요한 성품으로 위로는 왕과 왕비를 기쁘게 공경하고, 주위에는 삼가고 화합하는 미풍(美風)을 조성한 예비 국모였다. 세자는 어진 짝을 허망하게 잃었다. 세종은 이 애석한 며느리에게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세종실록] 1441년 9월 7일).
현덕빈 권씨의 죽음은 누구보다 원손에게 큰 불운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불운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1446년 인자한 할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났고, 1450년에는 버팀목인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눈을 감았다. 이어서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며 세자가 된 소년은 2년 만에 부왕마저 잃고 말았다. 문종은 세종 아래서 서무 결재와 섭정을 맡아 정무에 매달리다가 건강이 악화됐다. 등에 난 종기, 등창을 앓던 도중 임금이 된 그는 선왕의 삼년상을 치르면서 무리한 탓에 생을 마감했다.
1452년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는 명석했지만 아직 어렸다. 게다가 기댈 언덕들이 몽땅 사라진 처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년 사이에 죽으면서 후계자로서 힘을 기를 시간도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부재한 터라 수렴청정도 불가능했다. 독자적인 힘도, 왕실 어른도 없으니 숙부 수양대군이 야심을 키우고 고명대신 김종서가 실권을 휘둘러도 어린 왕은 속수무책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권이 부실하면 정변이 난다. 권력이라는 금단의 과실을 힘 있는 자들이 탐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예정돼 있었다. 이듬해 10월 10일 계유정난이 터졌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홍윤성·홍달손·양정 등 측근들과 함께 거사를 일으켰다. 좌의정 김종서의 집에 찾아가 그를 암살하고 왕명으로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불러 척살했다. 고명대신들이 황표정사(黃標政事)로 국정을 농단하고 안평대군을 내세워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였다. 황표정사는 의정부의 관리 인사안에 노란 표식을 붙여 임금이 그대로 임명하게 한 것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 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종대왕께서 당부하신 말씀 잊었는가"
▎세종대왕은 며느리 복이 없는 임금이었다.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 부부가 부왕인 태종에게 문후(問候)하고 있다.
수양대군은 두둑한 배포와 치밀한 계획으로 정적들을 거침 없이 제거하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영의정부사, 겸판이병조사, 중외병마도통사 등 요직이란 요직은 다 틀어쥐고 사실상 나랏일의 전권을 장악했다. 그는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집현전 출신의 유능한 신하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거사에 공을 세운 정난공신에 정인지(일등공신), 최항(일등공신), 신숙주(이등공신), 성삼문(삼등공신)을 책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 또한 고명대신들의 황표정사에 불만이 컸으므로 수양대군에게 동조하거나 중립을 지켰다.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는 조선 개국 이래 가장 정통성 있는 군주였다. 세종의 적장자인 문종의 적장자로 유교 종법에 따르면 누구보다 고귀한 혈통을 갖고 있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도 적장자의 적장자 임금은 숙종 정도가 비견될 뿐이다. 그러나 왕실의 정통성은 세자빈 두 명이 쫓겨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미혹의 주술과 금지된 사랑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고귀한 혈통인 단종의 앞길에 조선 역사상 최대 비극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최고 권력자가 된 수양대군은 노골적으로 왕좌를 노렸다. 한편으론 어르고 한편으론 압박하며 어린 조카를 옥죄었다. 수양을 견제하는 단종의 측근들도 있기는 했다. 궁중에서는 세종의 후궁으로 어미 잃은 원손을 품어서 키운 혜빈 양씨가 임금을 보필했다. 그녀의 소생인 한남군·영풍군도 힘을 보탰다. 종친 가운데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형에게 맞서고자 했다. 단종의 최측근이자 친혈육인 누나 경혜공주와 매형 영양위 정종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다.
수양대군은 오히려 단종의 측근들을 위협하며 왕위를 양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455년 금성대군을 필두로 영양위 정종, 한남군, 영풍군, 혜빈 양씨가 줄줄이 유배를 떠나는 지경에 이르자 어린 왕은 어쩔 수 없이 옥새를 넘기기로 했다. 윤6월 11일 임금의 옥새를 수양에 전한 인물이 바로 예방승지 성삼문이었다. 직분상 왕위 찬탈의 산증인 노릇을 한 그가 옥새를 안고 목놓아 통곡하니, 수양대군이 엎드려 있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봤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 조고사본말’).
세조가 보위에 오르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성삼문은 비밀리에 복위 운동을 개시했다.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이 함께했다. 때마침 절호의 기회가 왔다. 1456년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가 열리는데 동지 유응부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별운검(別雲劍)으로 선정됐다. 별운검은 2품 이상의 무반(武班) 두 사람이 큰 칼을 차고 임금을 좌우에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이었다. 그 자리에서 세조와 세자 등을 처단하고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면 됐다.
하지만 이 거사는 연회 장소가 좁고 덥다 해 별운검을 취소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종류의 일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겁을 집어먹고 밀고하는 자가 나오는 법이다. 이튿날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일러바치면서 관련자들이 잡혀가고 참혹한 국문이 시작됐다. 좌부승지 성삼문은 불에 달군 쇠가 다리를 관통하고 팔을 끊어내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병조판서 신숙주를 꾸짖었다.
“옛날에 너와 내가 집현전에서 숙직할 때 세종대왕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잊었는가? 우리더러 이 아이를 잘 보필하라시던 하교가 내 귓전엔 생생한데 너는 어찌 잊었는가?”(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 본말’)
성삼문과 신숙주는 본래 동료이자 벗으로서 허물없는 사이였다. 집현전에서 함께 일하며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요동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에게 음운에 관한 조언을 구하려고 13차례나 현지를 왕래하기도 했다. 세종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에게 원손을 잘 보필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만큼 신숙주와 성삼문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세조의 편에 섰다. 명나라로부터 왕위 찬탈을 인정받고 좌익 일등공신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세종의 당부는 덧없는 세월에 흩어졌다.
관비로 전락했던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상왕 복위 모의로 사육신 등 단종 지지 세력은 일망타진됐다.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도 극형을 당했다. 세조와 공신들은 화근을 뿌리 뽑으려 했다. 1457년 6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10월 24일 마침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영월에 당도했다. 죄목은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꾸민 역모 사건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죄와 죽음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단종의 죽음으로 세조는 다리 뻗고 잘 수 있었을까? 야사에 따르면 얼마 후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일갈했다고 한다.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세조가 놀라 잠에서 깨었는데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분노한 왕은 현덕왕후가 묻힌 안산의 소릉을 파헤치게 했다. 권씨의 관은 강물에 던져졌다. 현덕왕후가 남편 문종이 잠든 현릉에 묻힌 것은 단종을 복위시킨 숙종 때의 일이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부마의 유배지인 전라도 광주에 따라갔다. 담과 난간을 두르고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우는 구금 생활이었다. 1461년 영양위 정종은 단종의 넋을 위로 하고 세조를 비판하다가 반역죄로 사지가 찢겨 죽었다. 공주에 대한 의리에 목숨 거는 부마의 사랑법이었다. 경혜공주도 순천 관비로 전락했지만 존엄을 잃지 않았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임신한 몸으로 관아에 이른 공주를, 순천부사가 임의로 부리려 하자 거부했다.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 왔지만, 수령이 어찌감히 사역을 명한단 말이냐.”(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경혜공주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배려로 한양에 돌아와 딸을 낳았다. 출산 후에 그녀가 향한 곳은 정업사,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머무는 사찰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서글픈 시누이와 올케의 동거였다. 영양위 정종의 어린 아들과 젖먹이 딸은 공주의 유모 어리니에게 맡겨졌다. 남매는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과 함께 자라났다. 1469년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성종이다. 경혜공주는 절에서 내려와 왕족 신분을 회복하고 아들 미수가 벼슬길로 나아가는 모습까지 본 뒤 1473년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하늘의 보답은 소홀한 듯하지만 잊지 않는 법이니, 흐르는 광채와 남은 경사가 장차 후세를 기다려 더욱 크게 빛날 것이다.” (경혜공주 묘비명)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첫댓글 나는왕도 세자도 싫고 평범한 범부로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