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에서 십자가를 보다
나는 수원에 도착하기 전 장모님께 전화드려 곧 도착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아직까지 사위를 백년지객(百年之客)으로 생각하시는 장모님은 저녁식사부터 걱정하신다. 나는 번거롭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어 이미 배부르게 먹었노라고 말씀드리고 수원역에 내리자마자 간단히 요기를 때우고 처남집에 들어갔다. 나에게는 둘째 손위 처남이다. 처남댁과 제주도에 가서 그날은 장모님 혼자 계셨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다. 여행 틈틈이 전화로 안부드렸지만 한국에 도착해 찾아뵙고 한달 반 만에 뵙는 것이다. 올해 90세이신 장모님은 보행이 불편하실 뿐 정신은 맑으시다. 내가 이번 여행 중 어느 스님의 설법을 귀동냥해서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두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암닭형이고 다른 하나는 숫닭형이라고 한다. 스님에 따르면 노인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찾아오는 사람없어 외롭다고 하소연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꼬여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고 즐겁게 산다고 한다. 이런 차이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업자득이란다. 즉 암닭형 사람은 사람을 품안에 모아들여 골고루 사랑을 베풀어주는데 숫닭형은 사람을 차별하고 가리기 때문에 품에 드는 사람을 날개짓으로 쫓아버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모님은 전형적인 암닭형이다. 장모님은 슬하에 7남매를 두고 손자녀에 증손주까지 수십 명에 이르지만 누구 하나 차별하지 않고 잘나가는 자손이나 더러 걱정을 끼치는 자손이나 똑같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다. 그렇기 때문에 자손들이 병아리가 어미닭을 찾듯 다투어 장모님 품안에 파고든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골고루 햇볕을 내려주시고 비를 뿌려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피부색이나 종교, 지역, 재산, 교육, 서열차이에 따라 차별한다. 슬하의 자식까지도 차등을 두어 차별한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나도 암닭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이튿날 오랜만에 진수성찬으로 아침식사했다. 매일 빵 한쪽과 커피 한잔으로 때웠던 나로서는 이런 성찬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남김없이 맛있게 들었다. 인근에 사는 셋째 처남이 수원 화성을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나는 수원에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공군에 입대해 훈련을 마치고 배속된 곳이 수원이다. 1965년 봄부터 67년 12월까지 3년을 이곳에서 복무했다. 헌병이었던 나는 비행장과 시내를 매일 드나들었다. 또 74년부터 여러 해동안 직장생활로 조원동 공장과 서울을 오갔다. 팔달산과 서호유원지, 서울 농대 등 나의 청춘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 수원이다. 그런데 지금의 수원은 전혀 다른 도시다. 아침식사 후 처남과 집을 나섰다. 집을 막 나서는데 TV에서 진도 앞바다에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타고 있던 수학여행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자막이 나타났다. 나는 다행이라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을 나섰다. 처남은 이날 기상대에서 미세주의보가 내렸기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번에 한국에서 미세주의보니 경보니 하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 중국에서 공해물질이 날아 와 마스크하지 않으면 발암물질을 호흡하게 된다는 처남의 강권에 따라 썼는데 불편해서 견디기 어려워 이내 벗어버렸다. 70년 대 서울 상공은 공해로 찌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와이셔츠는 하루만 입으면 새까매졌다. 당시는 집집마다 연탄을 땠고 영등포 공장지대에는 굴뚝마다 시커먼 공해물질을 내뿜던 시절이다. 이제는 한국이 살만해지니까 멀리 중국에서 날아오는 공해물질에 호들갑을 떠는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한국의 공기가 깨끗해졌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국민건강을 위해 좋은 일일 것이다. 우리는 수원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수원천변을 따라 팔달문 방향으로 걸었다. 옛날 구정물이 흐르던 수원천의 물도 깨끗해졌고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걷기에 좋다.
팔달문 부근에 화성행궁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 수시로 팔달산을 오르고 했지만 행궁이 있는 줄 몰랐다. 다만 오래된 건물 하나가 보호막도 없이 방치되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문화재 관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적 478호로 지정된 화성행궁은 정조 13년인 1789년 건립되어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다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융릉)을 찾을 때마다 참배기간 머물렀던 곳이다. 행궁은 수원성(화성) 축성당시 567칸 규모로 건축되어 정궁 형태를 갖추었다. 국내 행궁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나는 이런 곳에 올 때마다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낀다. 일제의 만행이다. 일본은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했다. 우리나라 정궁인 경복궁을 허물어 총독부 청사를 짓고 궁이 내려다 보이는 북악산 기슭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지금 청와대 자리다. 또 창경궁도 원(苑)으로 격하시켜 동물원을 만들고 사방에 벚나무를 심었다. 나는 어릴 때 그것도 모르고 창경원 밤 벚꽃놀이를 기다렸었다.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6백칸 가까운 행궁을 낙남헌만 하나 남기고 모두 헐어 동네를 만들었다. 지금 복원된 화성행궁도 불완전한 것이다. 일제가 행궁에 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한 부분이 남겨져 482칸만 복원할 수 있었다. 참으로 악랄한 자들이다. 우리나라의 맥을 끊어버린다며 명산마다 쇠말뚝을 깊이 박아버리고 중요한 문화재들을 몽땅 일본으로 실어갔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 똑똑히 본다. 하루 속히 남북을 통일하여 일본보다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의 과제이다. 행궁은 전란이나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왕이 지방에 거동하거나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국내의 대표적 행궁으로는 강화, 의주, 남한산성 광주부 행궁이 있고 온양 행궁은 휴양 목적으로 설치되어 역대 왕들이 즐겨 찾았다.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이곳에 행궁을 건설하면서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경유지인 과천, 안양, 사근참, 시흥, 안산에도 규모가 작은 행궁들을 설치했다. 또한 정조는 현륭원 부근인 이곳에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효자인 정조는 1789년 10월 행궁을 완공한 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했다. 이때 다산 정약용이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하여 화성(수원성)의 공기를 크게 단축하고 예산을 대폭 절감하는 등 활약을 펼쳤던 것이다. 정조는 1790년부터 1800년까지 11년 간 12차례에 걸쳐 능을 참배하면서 이곳에 머물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다양한 행사를 거행했다. 정조가 의문스럽게 승하한 후 즉위한 순조는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해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 그뒤 순조, 헌종, 고종 증 역대 왕들도 이곳을 사용했다. 일제가 헐어버린 행궁은 1980년대 말 주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96년 공사를 시작해 2003년 학교부지를 제외한 대지에 482칸 규모로 복원해 일반에 개방했다. 현재는 경기도 최대의 역사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속히 학교가 이전되어 행궁이 완전복원되었으면 좋겠다. 현재 행궁은 사극의 촬영장소로도 이용되며 관광객들을 위해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는 무예 24기 시범공연, 장용영 수위의식 등 전통행사가 재현되고 있다. 장병용 수위의식이란 임금 앞에서 병조판서의 총지휘로 병사들이 벌이는 훈련과 군례의식 등 요즘의 사열식같은 것이다. 이밖에도 행궁에서는 궁중복식, 전통공예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가 열린다. 이날도 신풍루에서는 무예시범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행성내부의 화령전, 득중정, 집사청 그리고 정전인 봉수당과 중앙문, 좌익문을 살펴본 후 내당인 복내당과 장락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단체관람 학생들이 타고 온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행궁 광장을 가로질러 길건너 천주교 수원성지로 향했다. 이 지역에서도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수 많이 순교했다. 신원이 확실히 밝혀진 신자들만 83명에 달하고 무명순교자들은 훨씬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 수원교구는 2000년 이 일대를 성지로 선포했다. 이 분들 가운데 순교행적이 뚜렸한 17분은 시복 전단계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어 현재 한국교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조선왕조 순교자 2차 시복대상자 214위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수원시내 순교지는 성지가 위치한 북수동 성당인 옛날 중영(中營) 자리를 비롯해 이아, 화성행궁, 동남각루, 남암문, 팔달문 밖 장터,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의 사형터, 용주사 포교당 자리, 매향다리 서남쪽, 행궁 앞 간이옥, 동북암문, 형옥 등 19개 장소에 달한다. 하긴 그 당시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신앙을 이유로 처형당했으니 전국 어디인들 순교자의 피에서 자유로운 곳이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분들 가운데 1867년 8월 8일 한날 한시에 순교한 3형제 사연이 가슴을 울린다. 박의서(사바 1808-1867), 박원서(마르코 1817-1867), 박익서(1823-1867) 형제다. 이들 형제가 살던 곳은 충청도 내포지방에 속한 아산만 섬마을 걸매리다. 당시 행정구역상 수원유수부에 속했으나 수원에서 120리 떨어진 곳이다. 박의서는 걸매리에서 천주교 교우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평소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자신의 신앙생활도 철저히 했다. 그러나 관가에 체포될 당시 마음이 흔들려 배교할 뻔했으나 동생 원서의 말을 듣고 마음을 잡아 삼형제가 모두 같은 시간에 순교한 것이다. 형의 마음을 돌린 동생 원서는 신자이지만 평소 술과 놀음에 빠져 형제 중 가장 착실하지 못해 걱정거리였던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진면목이 나타나는 모양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자 원서는 평소와 달리 신앙에 대한 열의가 되살아나 "내가 평생에 천주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며 즐거운 표정으로 포졸들에게 "이번에 나를 데리고 올라가거든 시간 끌지말고 바로 죽여주면 천주와 성모님께로 가서 영원히 살겠다"고 말했다. 곁에서 듣던 형제들이 모두 마음을 다잡았으며 포졸들도 놀라워 했다. 막내 익서도 평소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다. 형제들은 끌려가면서 서로 격려하며 확실하게 신앙을 증거하기로 다짐했다. 이들은 수원 중영에서 영장이 배교할 의향이 없느냐고 묻자 죽어도 변함없노라고 대답하여 함께 순교했다. 이 집안에서는 모두 열 분의 순교자가 나왔다. 원서의 아내 이마리아와 사촌 박인서가 이들과 같은 날 순교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박의서의 형수 이 씨와 사촌형수 조모니카가 수원에서 옥사했으며, 같은 마을 장원심과 장팔보 부자가 수원에서 순교했다. 이들 후손 가운데 많은 사제들이 배출되었는데 대전교구 박성래 신부를 비롯해 박노헌, 박종팔, 박중신 신부이다. 이곳 북수동(옛 수원) 성당 주임이었던 파리 외방선교회 심응영(뽈리데시데라도) 신부는 6.25 때 순교하여 한국 근대 순교자 81위 가운데 한 분으로 시복이 추진 중이다. 그는 1907년 사제가 되어 1931년 수원성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수원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듬 해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했다. 그는 소화학당을 건립해 몰래 한글과 한국 역사를 가르치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었다. 1948년 천안성당으로 이동했는데 전쟁 때 양들을 두고 목자가 피난할 수 없다며 성당을 지키다 인민군에 체포되어 대전에서 총살당했다. 그 자신이 기념하고자했던 순교의 길을 따른 것이다. 우리는 이곳 성지에 마련된 갤러리 등을 둘러보고 기도한 후 수원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조의 명에따라 정약용이 설계하여 시공한 수원 화성은 둘레 5.743킬로, 직경 1.8킬로의 아름다운 성곽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묘 부근 마을을 팔달산 아래인 이곳으로 옮겨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원성을 축성하게 했다. 수원 화성은 아버지 죽음의 원인인 당파정치를 근절하고 강력한 왕권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조의 정치적 포부를 담은 상징물인 동시에 수도 서울의 남쪽을 방위하기 위한 효율적인 국방요새이다. 이러한 왕의 뜻에 따라 정약용은 동양 뿐 아니라 서양 축성술까지 연구하여 1793년 공사지침서인 '성화주략'을 저술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중추부사 채제공 총괄아래 1794년 1월 착공하여 5년 만에 완공했다. 이같이 단시일에 거대 성곽을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이 발명한 기중기 역할을 하는 '거중기'와 도르레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석재를 10미터 이상 들어올릴 수 있는 '녹로'를 현장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명품은 공사기간 뿐 아니라 전체 예산의 상당부분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 정약용은 이러한 기계의 설계도를 성화주략에 그림과 함께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정조는 화성과 더불어 부속시설로 행궁과 사직단, 중포사, 내포사 등을 건립했으나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파괴되고 6.25 전쟁때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일제와 6.25때 많은 부분이 파괴된 성곽을 축성당시 모습대로 대부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 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건축사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허술했던 것만은 아니다.
화성에는 북문이며 정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보물402호), 그리고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보물 403호) 등 4대문과 4개의 암문(暗門), 수문 및 장대, 노대, 포루, 각루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북수문인 화홍문을 통해 흐르는 수원천이 여전히 흘러내려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는 팔달문 옆의 성곽으로 올라 성벽을 타고 일주했는데 나는 팔달문과 장안문 사이에 있는 방화수류정을 살펴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방화수류정 서쪽 벽에 무수한 십자가가 햇볕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에 착각했는지 의심되어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틀림없는 십자문양이 한두개도 아니고 백 개 가까이 흰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방화수류정은 여느 팔각정과 형태가 다르다. 지붕도 십자모양이다. 나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단순한 장식으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당시 서학(천주학)에 물든 사람이 의도적으로 새겨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내 눈에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인지도 몰라 처남에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4월 16일 이날은 무척 따뜻했다. 장안문을 지나려는데 점포에 팥빙수 간판이 보인다. 오랜만에 팥빙수가 먹고 싶어 처남을 재촉해 들어갔다. 팥빙수가 나오는 동안 TV 화면을 보니 아침과 달리 백 몇 십명만 구조되고 3백 명이 넘는 승객이 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원성 관람을 중단하고 돌아가기로 했는데 어차피 걸어가야 하니 결국 수원성을 일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팔달산 정상에서 경기도청 뒤로 내려가는 길을 택해 빠르게 집에 돌아 왔다. 잠시 쉬는데 대전 조병기 신부께서 전화를 걸어 왔다. 조 신부는 다소 흥분된 어조로 나라에 큰일이 생겼는데 순례를 중단하고 빨리 내려와 함께 성삼일이나 지내자고 하신다. 나도 그 방법 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장모님과 처남을 작별하고 수원역으로 향했다.
(2014.9.13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