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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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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알아듣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이로 거듭나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용기 있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역경,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일 맞이할 더 큰 기쁨을 생각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기쁨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동시에 헌신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처음에는 근심이었지만. 나중에는 기쁨이 되었듯이 우리가 안고 가는 십자가도 수고와 인내의 근원이지만 언젠가는 보람과 기쁨이 될 것”(송봉모).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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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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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에게서, 아버지께로)
http://www.ofmkorea.org/526748
22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근거지와 선교지)
http://www.ofmkorea.org/489353
21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 청하라)
http://www.ofmkorea.org/407495
20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
http://www.ofmkorea.org/353886
19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영적인 비상을 위해)
http://www.ofmkorea.org/223180
18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독점치 않으시는 사랑의 통로)
http://www.ofmkorea.org/122184
17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그날에는)
http://www.ofmkorea.org/104242
16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A Patre, ad Patrem)
15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13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어른스런 청원기도, 아이스런 청원기도)
12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들불처럼 타오르다)
10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그 날엔)
09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청탁)
===위 2021년도 강론글 옮깁니다.===
김레오나르도 2021.05.15 05:39
부활 6주 토요일 - 아버지께 청하라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을 코앞에 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놔두고
내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이제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게 될 것이니
뭐 청할 것이 있으면 이제 아버지께 직접 청하되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이고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당신이 제자들을 위해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시는 점입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이 제자들 대신 청해주지 않으실 거면서
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대신 청해달라는 뜻,
다시 말해서 전구해달라는 뜻인데 주님께는 이런 뜻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잘 이해해야 할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뜻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일종의 격려입니다.
감히 아버지께 청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용기를 내어 직접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입니다.
첫째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니 그 사랑을 믿고 용기 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두렵고 그래서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으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분인데
그 하느님이 실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당신이 있으니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형제요 친구가 되었으니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당신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아버지께 직접 청하라고 오늘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히 부를 수 없는 하느님을
용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격려하면서
그래도 용기가 생기지 않으면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께 청하되 당신을 건너뛰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건너뛰고 아버지께 직접 청하는 것이 아니라,
또 성인들이나 성도들을 제쳐놓고 혼자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이나 성도들과 함께 그리고 당신을 통하여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전구轉求의 뜻도 우리의 기도를 대신 전해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성인들도 우리와 함께 기도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청하면서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가 주님을 건너뛰지 말아야 함은 물론
성인들과 성도들과 같이 기도하고 청해야 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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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만난 할머니를 말씀하시면서, 이 할머니는 신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훌륭하고 경건하고 소박한 할머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할머니께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주셨습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실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성모님은 (할머니는 자기 집게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이렇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교황님은 할머니께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성모님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대답에 교황님께서는 감탄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 가리키신 것이 성모님의 삶이었고, 그래서 십자가의 가장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언제나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보다 세상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가리키며 세상의 논리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즉 세상 안에서 나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더 큰 주님의 뜻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주 흔들리면서 세상의 뜻을 따르려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그 확신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할머니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즉,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유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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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거름 삼아 예쁜 꽃을 피우는 과정임을 배우는 것(하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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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필요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의에 따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리고 품고 있는 관심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욕망의 해석자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간청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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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아드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97세의 어머니는 노환이 심해져서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타주에 있던 아들은 휴가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1달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무입니다. 보름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점차 나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곡기를 끊으신 어머니는 정말 많이 야위었습니다. 아들은 한 번 더 전화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호흡이 가빠진다고 하였습니다. 미사시간이 아직 2시간이 남았기에 기꺼이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시고,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효성이 지극했고, 어머니는 1달 동안 3번의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둘째아들 부부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도 말없이 묵묵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오랜 동안 냉담하다가 다시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매주 점심 준비를 해 주는 구역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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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모습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다른 모습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면 함께 있고자 합니다. 사랑하면 고통까지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즉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바로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나누는 모습이 바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면 믿음이 따라옵니다. 사랑하는데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사랑에서 시작해 믿음으로 번져가 결실들은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인도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고 계십니까?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께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계십니까?
더 깊은 사랑을 청해보면 어떨까요? 더 튼튼한 믿음을 청하면 어떨까요? 이럴 수 있다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더욱더 크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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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업
시간을 돌이켜 보면 등교하는 시간은 늘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이라 힘들고, 졸려서 힘들고, 학교가 멀어서 힘들고….
그래도 등교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학생의 숙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났을 때
더 이상 등교는 제 인생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인생이라는 학교에 등교하고 인생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등교하는 학교의 인생 수업은 헛된 수업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행복이라는 수업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고난이라는 수업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등교해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 말입니다. 기억하세요. 이 수업은 버릴 것 없는 알찬 수업이란 것을 말입니다.
행복도, 고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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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5월은 신록의 계절이자 꽃의 계절입니다. 끊임없이 피고지는 야생화 들꽃들을 보니 흡사 땅이 살아있는 보물밭처럼 느껴집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보물같은 곱고 신비로운 꽃들을 끊임없이 피어내기 때문입니다. 요즘 새롭게 눈에 띄기 시작한 붓꽃도 참 맘이 끌려 사진도 찍어 예전 써놨던 시와 함께 여러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사람이든 꽃이든
화려하여 깊지 못하면
얼마 못가 싫증난다
그늘진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보랏빛 붓꽃
은은하고 그윽하고 신비로워
늘 봐도 좋고 새롭고 정겹다”-1998.5.5.
26년전 시인데 지금도 5월 때되면 한결같이 피어나는 붓꽃들에 감동합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은은하고 그윽하고 신비로워 늘 봐도 좋고 새롭고 정겨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싯귀처럼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주님이요 도반이요 부부관계라면 얼마나 멋지고 바람직하겠는지요!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5월 성모성월은 기도의 달이자 참 행사가 많은 달입니다. 참 많이 기도해야 하는 5월입니다. 기도도 젊고 힘있을 때 많이 해야 하듯 이런 신록의 아름다운 계절에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더 잘 어울립니다. 오늘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한 법정기념일입니다. 정부는 2018년, 1984년 부패정치와 외세에 맞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과정중 황토현전승일인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정했고 올해로 130주년이 됩니다. 한국사람이라면 특히 기억해야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요,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서방 수도생활 개혁의 중심지 역할을 한 클뤼니 수도원의 초대 성인 아빠스들을 기립니다. 성 오도(927-942), 성 마욜로(948-994), 성 오딜로(994-1049), 성 후고(1049-1109), 가경자 베드로(1122-1156) 아빠스들은 무려 200여년동안 탁월한 능력과 지혜로 당시 쇠퇴했던 수도생활을 성공적으로 주관했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 번성했던 클뤼니 수도원이 멸망한 결정적 이유는 기도와 일, 성독의 균형이 무너지고 전례기도가 하루를 가득채웠기 때문이라 합니다.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일상에서 기도와 일, 성독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좋은 교훈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일하라”에서 우선 순위는 중요합니다. 기도가 우선이라는 것이며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가 적용되는 기도생활입니다. 하루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기도입니다. 2014년 안식년중 8월말부터 10월초까지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지 올해 10년째 됩니다. 그동안 참 많이 나눈 순례여정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희망의 여정중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며, 순례여정중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의 네 요소중 특히 결론 부분의 기도였고 그 일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궁극의 희망을 활성화시키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식이자 약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없으면 희망도 시들어 버립니다. 희망의 순례 여정후 주님께 갔을 때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입니다. 기도가 얼굴꼴을 만들어 줍니다. 기도할 때 주님을 닮습니다. 순례 여정이 끝난후 주님은 당신의 얼굴을 닮았는지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기도는 테크닉(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사랑과 생명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매순간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숨쉬듯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기도요, 역시 기도에도 우리는 영원히 초보자 일 수뿐이 없습니다.”
광야인생 여정중 저는 늘 세가지 인간 가능성을 말합니다. 성인, 괴물, 폐인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성인이요, 기도에 소홀하여 세상 것들에 유혹, 중독될 때 괴물이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 훈련, 습관의 영적도식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선택, 기도의 훈련, 기도의 습관입니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자발적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강조하는 바 기도입니다. 역시 한숨에 읽혀지는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날로 사랑하여 예수님을 닮아갈 때,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우리의 기도는 그대로 하느님의 뜻에 따른 기도가 되고 100% 응답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충만한 기쁨이 보너스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기쁨 하면 떠오르는 기쁨과 감사, 기도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사도의 옥중 서간 필립비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립4,4-6)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의 3차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선교 여정에 오른 바오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니 기쁨에서 나오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 어찌보면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기쁨의 선물처럼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사실 기쁨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이런 충만한 기쁨이 없다면 기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산 정약용 요한 어른의 오늘 말씀입니다.
“아이의 눈에는
부모의 품격이 깃든다.
자식은 곧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워 아이의 눈에 부모의 품격이 깃들 듯, 주님을 보고 배울 때, 우리의 눈에는 주님의 품격이 깃들 것이며, 우리에게서는 꽃향기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참 귀하고 고맙습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자존감을, 자부심을 지니십시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게서 나오셨음을 믿기에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된 운명도 예수님을 통해 다시 확인합니다.
허무로 시작하여 허무로 끝나는 덧없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우리들 역시 예수님처럼 아버지에게서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죽음이 아니라 우리는 갈 곳이 있다는 것이며 이래서 우리의 삶을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천상병 교우처럼 귀천을 노래할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이 귀가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휴가 끝나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귀가할 수 있도록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도록 합시다. 귀가 여정에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기도 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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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외길이려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나
외길이려네
온갖
어둠의 갈레길
삼키려 해도
빛에게서 나와
빛과 함께 빛내다
빛에게 돌아가는
빛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슬픔의 갈레길
잡으려 해도
기쁨에게서 나와
기쁨과 함께 기쁘게 하다
기쁨에게 돌아가는
기쁨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탐욕의 갈레길
손 내밀어도
사랑에게서 나와
사랑과 함께 사랑하다
사랑에게 돌아가는
사랑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죽임의 갈레길
벗하려 해도
살림에게서 나와
살림과 함께 살리다
살림에게 돌아가는
살림의 외길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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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황금시대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의 본보기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에 감사드려야 하며, 그분께서 따져서 주신다고해서 마지못해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과 하나 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장 기쁘고 완벽한 선물로 받아들입시다. 그분께서 그 일을 미루신다면,우리는 그 미룸을 인내로 견딥시다. 우리 삶을 결정짓는 것은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총새는 해안에 둥지를 짓고 모래에 알을 낳아, 폭풍이 잦고 파도가 험한 한겨울에 부화하는 바닷새입니다. 그러나 물총새가 알을 품는 이레 동안 - 물총새는 이레 만에 부화합니다 – 은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잠잠합니다. 그때 물총새에게는 새끼에게 먹일 먹이가 필요한데, 더없이 인정 많으신 하느님께서 이 작은 피조물이 새끼에게 먹이를 먹일 수 있도록 또다시 평온한 이레를 주십니다. 뱃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기에, 이 시기를 ‘물총새 절기’라고 합니다.
이성이 없는 피조물을 위해 하느님의 섭리가 이런 일은 정해 놓은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에게서 구하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작은 새를 위해 그 크고 무시무시한 바다를 제지하고 겨울에도파도가 치지 않게 명령하신다면,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신 여러분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마다하시겠습니까? 물총새를 그토록 다정하게 보살펴 주시는 분이신데, 여러분이 마음으로 그분을 부른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거든 그리스도(the etemal Word)께서 취하시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비워 버리십시오. … 인간의 본성이 그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본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이고 같습니다 ...”
우리 자신을 비우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신적 형상과 그 불꽃의 진리 속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죽이고" 그 불꽃 자체를 죽이고, 신적인 불꽃을 꺼 버리고 말 것이다.
”영혼 안에는 아무개가 있는데, 이 아무개를 통해 영혼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대상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영혼은 죽음을 맞을 것이고, 하느님도 그 영혼에 대하여 죽으실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고, 자신 안에서 계속 살아 계십니다.(168)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모세의 야훼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 공동체에서 ‘십일조', 곧 모든 소득의 ‘10분의 1' 은신 앞에 성별해서 드리는 예물이면서 궁핍한 이웃을 돕는 구제금이며, 동시에 모든 종교 기관을 유지하고 사회 복지 사업을 여는 기금이 된다. 그처럼 이슬람교에서도 소득의 2.5퍼센트를 하한선으로 규정하여 자선금으로 내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신앙심의 깊이에 따라 그 이상의 희사금을 자발적으로 헌납하기도 한다.
자선금은 빈민, 심신 장애자, 순례 여행자, 사회 복지, 모스크의 보존 수리 등에 유익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슬람 신앙에서 희사나 자선은 어디끼지나 신앙인의 내면적 경건의 발현이며,, 사람의 깊은 마음을 모두 성찰하시는 알라 앞에서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인간의 경건한 행위의 일부이다. 유일신 신앙 전통에서는 유형 무형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유일신으로부터 나와서 유일신 안에서 지탱되다가 유일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인간은 물질의 궁극적 소유자가 될 수 없고 물질을 통해 경건성을 발현할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신앙 정신은 이슬람 유일신 신앙에서도 동일한 것이다.
마지막 다섯째 기둥은 ‘성지 순례'(Hajj)인데,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 소재한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해서 일련의 성지 메카에서 갖는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메카에 소재한 카바 신전이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의 성소였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아랍인들은 민간 신앙 전통 속에서 그렇게 믿어왔다. 이슬람의 중심 성지가 메디니에서 다시 메카로 복귀된 뒤 메카는 이슬람 아랍 세계의 정신적 성지로서 확고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개별적으로나 가족 단위로 성지를 순례할 수 있다.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꼭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것이 의무도 되어 있다. 해마다 라마단이 되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메카를 순례하는 장엄한 모습은, 갈수록 세속화되는 인류 문명과 대비되어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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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곧 ‘기도’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강조 용법으로 시작되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청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뚝딱 이루어진다는 현혹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모한 약속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뒷부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전제하시며, 당신께서 대변인처럼 우리의 처지를 하느님께 청하여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곧 기도는 청탁이나 거래, 주문을 외우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 만남이 주는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주문이나 주술로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에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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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16,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16,24) 라는 이 말씀은 당신이 오시기 전까지, 당신께서 이 땅을 사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기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아무것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16.27)에 이젠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16,26)하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사람은 자기 생긴 대로 산다, 는 말처럼 우리 기도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의 태도처럼 예수님과 관계, 기도의 관계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를 자주 드리지 못합니다. 물론 저의 성향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가야 할 길을, 살아야 할 삶을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안배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청원의 기도보다는 단지 주님 사랑과 자비하신 손에 저를 내어 맡기는 감사의 기도를, 특히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도록 내어 맡김 기도와 의탁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16,24) 라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사랑이신 당신께 간절히 청하는 그 자체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며 사랑의 의탁입니다. 만일 지금 청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16,28)하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그 길은, 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기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청할 뿐입니다. 제 삶이 마침 하는 그날까지, 그 길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지금처럼 당신의 아들로, 당신의 사제로 제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오늘 복음의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16,28)하고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되돌아가신 그 길은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이 길에서 진리인 예수님과 함께 사노라면 우리는 어제의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참된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때 모든 묶임에서 벗어나 삶의 온전한 자유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체험할수록 우리의 삶은 생명으로 넘치고 넘쳐 마침내 생명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의 사랑 안에서,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온 존재로 청해야 할 기도입니다. 좋은 몫입니다.
이런 기도가 선행될 때 우리 모두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처럼, 아폴로처럼 예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길, 하느님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걷도록 이끌어 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18,26참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의 인도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참된 ‘하느님의 길’로 아폴로를 이끌어 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생각과 출신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중심에 둔 삶이 그들 모두를 끈끈하게 연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폴로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부터 하느님의 길을 정확히 배운 뒤 성령을 힘입어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18,28)을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선포함으로써 유다인을 논박할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것” (18,27)을 본보기 삼아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오늘 당신은 저희에게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의지하여 간절히 청합니다. 이 땅에 참된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세상이 되도록 평화와 기쁨의 성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 아래 글 11:20 추가
240511.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느님 곁에 있다가
하느님께서 세상에 파견하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시작에서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는 말이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공간적으로
함께 계셨음을 의미한다기보다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 같은 하느님으로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그 성자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 파견은
세상을 향한 성부 하느님의 사랑 표현이라고
요한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고
3장은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가는 것은
세상이 싫어서
당신께서 사실 곳이 못 되기에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거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싫어서
당신 사랑을 거두시기 위해
세상을 떠나시는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아드님의 파견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과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을
연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였습니다.
그 성령께서 성부 하느님에 관하여 알려주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제 청원을 들어주시는 것으로
모습이 바뀌어갑니다.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13장은 이야기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었고
끝까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가셔도
바뀌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은 바로 우리 각자입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
우리도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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