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21
12월31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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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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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EodLRNcwBU
[노비따스 음악 중·고등학교 김남성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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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하루 1m가 아니라 0.01mm씩 성장합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모든 분들,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 성가정(聖家庭)을 꿈꿉니다.
그러나 희망 사항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나다는 것을 매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초단기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절규합니다. 한때 목숨 바쳐 사랑했던 그였는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는 모습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외치며 울부짖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요 전부라고 여겼던 자녀들이 이제 머리가 커졌다고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을 찌릅니다.
성가정(聖家庭)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유가 요구됩니다. 인간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멤버들도 순탄한 길만 걷지 않았습니다. 워낙 특별한 가정,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신비스러운 가정, 영적인 가정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있던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감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특별한 말 한마디를 건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4~35)
성가정의 주요 구성원이셨던 마리아 역시 성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수시로 영혼이 칼에 꿰찔렸습니다.
물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가정 안에서 천국 체험도 앞당겨 맛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상처와 희생, 각고의 노력과 헌신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에 한 가지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상대방은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성장합니다. 하루 0.01 밀리미터씩이나 성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이 하루에 1미터씩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기대치가 크다 보니 당연히 실망도 상처도 커져만 갑니다.
나자렛 성가정 공동체 안에서 예수, 마리아, 요셉 성인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가장 크게 노력한 덕은 인내의 덕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늘 인내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늘 격려하면서, 절대로 들볶지 않고, 모질게 대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나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공동체 안에 부성애가 가득 담긴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기억되고 꾸준히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콜로 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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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PKOldHNB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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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종교 자유를 허락해야 할까?>
모든 사회의 근간은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무너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싶은 물질적, 정신적 사회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오늘 성가정 축일은 우리의 목적이 성가정을 이루어 교회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1. 부모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
2. 부모의 가장 큰 지혜는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기 자녀들을 최고로만 키우려고 했다가 자녀들의 반격에 크게 상처를 입고 깨달아 『엄마 반성문』이란 책을 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이유남 씨가 내린 결론입니다.
엄마의 바람은 자녀가 항상 1등의 성적과 많은 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아이는 항상 전교 1등과 많은 상과 학생회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아이가 전교 1등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면 지난 성적표와 비교해서 수학은 왜 떨어졌느냐고 야단쳤습니다.
둘째 아이인 딸은 영 공부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치부 때부터 잠도 재우지 않고 공부시켰습니다. 기특하게도 100점을 맞으면 오빠는 전 과목 100점을 맞는다며 한 과목 그렇게 맞은 것 두고 법석을 떨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들 마음 안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복수심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엄마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줄 수 있는 때가 바로 고3. 전교 1등을 하던 첫째는 고3 때 돌연 자퇴 선언을 합니다. 아이는 컴퓨터 게임에 파묻혀 폐인이 되어갑니다.
둘째 아이도 그렇게 공부 잘하는 오빠도 자퇴하는데 자신은 왜 못하느냐며 아빠 도장을 훔쳐 자신도 자퇴하고 둘이 방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사실 이유남 씨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공부하고 싶었지만 빨리 불을 끄라고 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자신이 하지 못한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것이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엄마의 만족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라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주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은총과 지혜로 강한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는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야 하는데 인간 부모님은 그 모든 두려움을 책임져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자신보다 큰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성장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 안에 갇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세상에서도 나를 보호해 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4살 때 여성의 교육권을 주장하다 탈레반에게 얼굴에 총을 맞았습니다. 이에 굽히지 않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웠고 16세 때 최연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그녀의 용기로 많은 교육에서 소외된 여자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아버지, 지아우딘 유사프자이입니다. 그는 교육자였고 딸을 학교에서 교육하고 싶었습니다. 탈레반과 싸우는 말랄라를 응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딸이 총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길 때 아버지는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어쩔 수 없이 종교의 힘이 작용합니다. 이슬람교도기는 하였지만, 말랄라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세상에서 은총과 지혜로 충만하여 강한 어른이 되게 하고 싶다면 아이의 보호자가 하느님임을 알도록 주님께 먼저 봉헌해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는 어른이 되었을 때 본인이 선택하면 됩니다. 아이 때 밥을 먹기 싫다고 하면 그것도 자유로 두어야 할까요? 억지로 먹일 것입니다.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게 하도록 먼저 창조자에게 자녀를 봉헌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을 요셉에게 봉헌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고, 요셉은 아드님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끊임없이 하느님의 보호로 더 큰 세상으로 내어줌으로써 자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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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이 무엇이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덕분에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있었고, 매주 부르클린 미사도 다닐 수 있었고, 좋아하는 산보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성지순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과달루페,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한 번도 가기 힘든 성지순례를 6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좋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팬데믹을 함께 했던 사제들이 있습니다. ME와 꾸르실료의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부르클린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행복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가정은 행복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지만 자칫하면 율법에 의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결혼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성사된 가정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했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탄생했습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 아기들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의 가정은 이집트로 피난 갔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 어렵게 성사된 혼인, 이집트로의 피난으로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가정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입니다. 성전을 지키던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아기는 세상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트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 아기의 어머니의 가슴은 예리한 칼로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시메온의 예언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 되던 해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갔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마리아가 ‘얘야! 우리가 너를 찾았단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제가 있어야 할 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삶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와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와 친척들을 만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어머니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이런 가정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 일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었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꿈에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맞습니다. 교회가 오늘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 모두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들 모두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정, 이웃을 돕는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주님의 사랑이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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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8부 내 주일을 성가정축일로 지내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오늘 축일은 사실 성탄축일의 연장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도구 역할을 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에서 나자렛 가정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가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게 해준다. 우리는 나자렛 가정을 통해 자신들을 재발견할 수 있을 때, 올바른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나자렛 가정이 항상 모든 가정의 모델로 제시되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변할 수 없는 사랑이 타오르게 하는 능력(에페 5,25-33 참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가정의 근본이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사랑은 가정을 하나로 만들고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교회가 된다.
제1 독서는 제4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경을 드려야 할 때와 그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숭고한 인간성의 표현이며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부모공경은 바로 자기의 죄를 벗는 길이며, 자기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보증이 된다. 그것은 가정이 주님께서 원하신 제도이며, 그분의 사랑 계획에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2,22-40: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졌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가정축제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생활, 즉 우리와 같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일상의 가정생활을 거쳐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와 그 때문에 은밀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의 마음(마태 1,18-25 참조)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자렛 가정은 가정이 근본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요셉의 행위는 사랑에 근거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느님께 봉헌으로 이해하는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행위’(22-24절)이다. 이 봉헌은 장차 십자가 위의 봉헌을 예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의 태중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그 생명을 사랑과 감사의 ‘봉헌’으로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라고 하더라도 막 피어나려는 생명을 질식시켜버린다면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불경죄까지도 범하게 된다.
셋째는 마리아가 아들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이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교육적인 가르침이 있다. 즉 가정을 이루는 사람 각자가 다른 가족들을 위해 살고 또한 그들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알며,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39-40절). 이제 성가정은 단순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즉 모든 가정의 모범이 되기 위해 다른 가정들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마 그 가정은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한 가정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무한한 사랑을 가졌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에 대해 특별히 쏟으신 사랑이 있다.
그러기에 그 가정은 하느님과 대화할 줄 아는 가정이었고 하느님의 은총과 빛을 향해 모든 것을 개방한 가정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나자렛 가정을 향한 영적 여행을 하여야 한다. 거기서 ‘가정’의 본질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자렛 가정이라고 해서 특별한 가정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고통도 있었던 그런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느님 안에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을 우리도 본받아 닮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앞에 승화시켜 계속적으로 봉헌할 수 있는 삶으로 그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가정을 이루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이러한 가정이 되도록 또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사도 바오로는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의무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의무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 존재의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이다(콜로 3,12-14 참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당시 가족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콜로 3,18)이라 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사랑이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등 각 사람의 품위와 인격을 평등하게 인정케 한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가족들 간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가족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19-21절 참조). 그러면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가정 공동체에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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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이루신 성가정을 기억합니다. 교회는 모든 신앙인 가정의 모범이 되는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이 가정은 처음 꾸려지는 과정부터 그리 순탄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를 잉태하는 난감한 상황에 놓였고, 요셉은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였습니다. 출산한 뒤에도 그들은 천사의 명령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이는 기쁨과 행복이 흘러넘치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우리 가정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실현하시도록, 그분께 가정의 중심 자리를 내드렸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요셉도 당황스러울 법한 그 모든 상황에서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고 늘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정생활에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성가정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 가정이 위기에 놓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가정에 바라시는 하느님 뜻을 찾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족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바치는 기도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내드림으로써 우리 가정은 나날이 거룩하여질 것입니다. 성화된 가정은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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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가정>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9-40)
1) ‘성가정’이라는 용어는,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의 가정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입니다. ‘성가정’은 신앙인들이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을 본받는다.’는, ‘성가정을 이룬다.’가 아니라, 또는 “성가정이 된다.”가 아니라, ‘성가정처럼 살아간다.’입니다.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우리 집이 드디어 성가정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식구들이 모두 신자가 되는 것은 성가정처럼 살아가는 삶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식구들이 함께 신자가 되었다면 신앙인 가정답게 살아야 합니다.
2) 교회 지도자들이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정의 복음화와 가정의 성화 등을 권고하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독거노인들과 1인 가구들을 잊으면 안 됩니다. <혼자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혼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데, 단순히 식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족이 없는 경우도 많고, 가족이 있어도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가정과 가정의 복음화를 강조하면서도, 독거노인들과 1인 가구들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당이나 지구나 교구에서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어떤 행사를 개최할 때,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혼자 사는 이들은 더 외로워지고, 더 슬퍼지고, 더 소외됩니다.
3) 우리나라 교회는 신랑 신부가 모두 신자인 혼인성사보다 한쪽만 신자인 관면혼배가 더 많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부 중에 한쪽만 신자인 경우와 자녀들 가운데 일부만 신자인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가정에서 혼자만 신자인 경우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신심생활도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식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라는 권고가 ‘남의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 때문에 ‘가정의 복음화’를 강조할 수밖에 없지만, ‘복음화’라는 말을, “신자가 아닌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복음화’는 ‘복음적인 삶’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고, 그리고 ‘복음 정신’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가정의 복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화’의 반대쪽에 ‘세속화’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을 복음화하는 속도보다 세속의 영향에 물들어서 세속화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이 말은, 남편이 신자이고, 아내는 신자가 아닐 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4) 성가정은, 하느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애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가정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사실 그런 말은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인(관념적인) 말일 뿐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아주 쉽게 말하지만,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뜻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하느님의 뜻’은 식구들을 통해서, 또 식구들에 대한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순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하느님에 대한 순종은 식구들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순종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의 뜻에 순종하는 것도 순종입니다. 배우자 사이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한쪽만의 일방적인 일로 그치면 안 됩니다.
5)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는 말씀을 해설할 때에는,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 또 가정보다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다가, 성가정 축일만 되면 가정과 가족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뒤가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정 공동체는 ‘작은 교회’이고, 신앙으로 맺어진 교회 공동체는 ‘큰 가정’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하면, 인류 전체가 하나의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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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소진 안드레아 신부님]
시작은 마지막을 향하는 여정이며, 그 마지막은 종착점,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새 도달해버린 그 마지막을 붙잡고 신앙의 삶에 미련과 아쉬움, 부족함과 미안함에 대한 자책으로, 나누지 못함에, 베풀지 못함에, 이해해주지 못함에, 포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함에 대하여, 후회하고, 실망하고, 낙담하는 나를(우리를)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삶이 아닙니다.
내가(우리가) 도달한 그 마지막은 기쁨과 희망,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더 베풀기를, 더 포용하기를, 더 함께하기를, 더 이해하기를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시작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도록 합시다. 그 시작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첫 출발점(시작)이 되도록 합시다.
이 새로운 여정은 가정공동체가 더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느님의 총애”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는 은총의 성가정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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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병찬 베드로 신부님]
<성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우리 가정도 성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나름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다. 아마도 그 이면에는 자녀들의 냉담, 배우자의 냉담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아직 세례받지 못한 가족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을 것이다.
공감은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가족 모두가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성가정일까?’ 물론 그 모습이 그렇지 못한 가정과 비교하면 이상적인 성가정의 모습에 가깝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겉모습에 불과하다.
오늘 축일을 보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보자. 겉으로 보면 최고의 구성원이 모여 가장 이상적인 가정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과연 성가정의 모범으로 손색이 없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당시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처녀 잉태’를 시작으로, 몸도 풀지 못한 채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 갓난아이를 안고 이집트로 도망가야 했고, 성인이 된 아이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
어쩌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본받고 싶은 가정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가정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비록 겉모습은 불완전해 보이지만, 그 가정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신 성모님,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바로 이 모습을 기억하고 본받으라는 것이고, 우리 역시 이런 가정을 꿈꿔야 한다.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껍데기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성가정을 이룰 수 있고, ‘가정은 본연의 것이 되어라’(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가정 공동체」, p.27)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대로 이상적인 성가정으로 거듭나게 된다.
언제나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기도하는 가정, 서로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가정, 생명을 존중하는 가정, 복음을 전하는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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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부모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기 자랑거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 “부모의 가장 큰 지혜는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사는 것이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춰 자기 자녀들을 ‘최고’로 키우려고 닥달했다가, 그 자녀들이 자신에게 심하게 반항하며 모든 걸 내려놓아버리자 뒤늦게 자기 실수와 잘못을 깨닫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엄마 반성문>이라는 책을 낸 “이유남” 씨가 한 말입니다. 가족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감싸주는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내 이익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들 때, 그 관계는 오해와 상처, 갈등과 원망으로 무너져버리고 말지요. 생각할수록 ‘가족’이라는 관계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누구나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꾸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 겁니다. 가장 굳건해야할 사랑이 오해와 실망 속에서 쉽사리 허물어지는 모습에 마음이 쓰라립니다. 한때는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어느 순간에 태세를 바꾸어 자기 편안함과 이익을 먼저 챙기는 모습에 배신감이 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녀석들이 이제 좀 컸다고 자기 생각을 툭툭 내뱉는데,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내 가슴에 박혀 피가 철철 흐릅니다. 내 입장 내 마음은 생각 안하시고 당신 기준에 따라 나를 판단하시고 비난하시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실 땐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족들 사이의 화목도, 행복도 그저 드라마에나 나오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요.
가톨릭 교회는 성탄 대축일이 지난 후 처음 맞는 주일인 오늘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예루살렘 성가정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과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가족 문제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우리에게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 첫 번째 비결은 ‘봉헌’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인간적인 시선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에게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바라는게 생깁니다. 그리고 그 기대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하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가족을 바라보면 그럴 일이 없습니다. 합리와 효율을 내세우지도, 이해타산을 따지지도, 상대가 먼저 주어야 나도 받는 만큼 주겠다고 버티지도 않는 겁니다.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그분 품 안에서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받은 게 없어도 기쁘게 줄 수 있고, 사랑의 힘으로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까지 감싸안을 수 있게 되지요.
두 번째 비결은 ‘동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이 성모님께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이들의 반대 때문에 큰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시리라고 예언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이신 성모님 또한 아드님의 고통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완전하게 일치된 ‘운명공동체’이니, 가족이 겪는 어려움, 슬픔, 아픔에 ‘함께’ 하는게 당연하지요. 그렇게 고된 삶의 길을 동반자, 협조자, 반려자로 함께 걸으면서 손 잡아 일으켜주고 등을 토닥여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겁니다. 그런 동참과 동행을 통해 가족이라는 유대는 더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세 번째 비결은 ‘배려’입니다. 오늘의 복음 환호송에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되지요. 그분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그 마음가짐을 우리도 본받고 닮아가는 겁니다. 그분의 마음가짐이란 배려와 공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슬픔과 아픔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약점과 부족함을 이해해주시고 배려해주셨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주님의 그런 모습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지요. 우리도 그 마음으로 가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다름’을 통해 상대방의 부족함과 약함을 채워줌으로써 성숙되고 완성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을 닮은 고유한 모습으로 창조하셨기에,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가족 사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나를 100% 이해하고 100%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그런 무리한 요구는 상대방을 숨막히게 만들고 관계를 망가뜨릴 뿐이니, 상대방과 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용납해야 합니다. 사랑은 공감과 배려를 통해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참아주고, 그것을 바로잡을 때까지 인내해주며, 열심히 노력해도 안되는 부분은 인정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또한 내 능력만으로는 그러기에 힘이 부친다면 부족한 부분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라고, 그리고 우리 가족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가정의 구성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서로를 먼저 배려하고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아픔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먼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 섭리 속에서 살았습니다. 성가정은 단지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톨릭 신앙을 지닌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 뜻에 대한 순명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용서와 사랑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성가정이 되기 위해 세속적인 재물이나 조건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가운데에 함께 사시는 주님을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모실 수 있다면,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통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나와 우리 가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그런 우리 가족이야말로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거룩하고 행복한 ‘성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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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가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는 기타입니다. 지금도 강의 중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기타를 치면서 함께 성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 기타는 모두 6개의 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기타 줄을 잘 맞춰야 합니다. ‘E(미)-A(라)-D(레)-G(솔)-B(시)-E(미)’의 순서대로 음을 맞춰야 연주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만약 음 맞추는 것이 귀찮다고 또 음을 잘 모르겠다면서 아무렇게나 줄을 맞추면 어떨까요?
음이 잘 맞지 않는 기타, 또는 기타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의 기타에서는 좋은 소리가 날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불협화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리만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타’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타를 잡고 기타 줄을 튕기고 있는 사람 탓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미워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왜 자기에만 나쁜 것을 주시느냐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 나쁜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은 우리의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행동하지 않고 잘못된 생각만 하는 ‘나’의 잘못이 더 크지 않을까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이 자리에 시메온 예언자, 또 한나라는 예언자의 모습을 봅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든 분은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 또 오랜 기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 모두 이 기다림의 끝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다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고, 그래서 영적 일치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다림 안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도 이 성가정에 함께할 수 있었음을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를 통해 꺠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탓하느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만을 바라보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고유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성가정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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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여 성가정>
루카 2,22.39-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예수님의 유년 시절)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성가정>
하느님 품듯
너를 품는 나와
하느님 품듯
나를 품는 네가
하느님 품에서
나와 너 너머
우리로
그리하여 성가정
나는 나이기에
네가 되고
너는 너이기에
내가 되어
너와 나 서로
따로 또 같이
우리로
그리하여 성가정
나는 나임에도
네가 되고
너는 너임에도
내가 되어
너와 나 사이
서로 허물어
우리로
그리하여 성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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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간직하시고, 나누며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우리 성당 주보는 성가정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 평화, 구원을 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면, 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충실히 하였고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 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의로운 아버지가 요셉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었으나,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으로 복되신 분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 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렇게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고,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상대를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좌지우지하려고 참견하면서 불화를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입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3-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콜로3,18-21)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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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의 참 좋은 치유와 구원의 선물-
오늘은 2023년12월31일 마지막 날이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2023년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시작하여 2023년12월31일 성가정 축일로 한해를 마감하니 감개무량합니다. 마치 불암산(佛巖山) 정상에 오른 듯,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만세!”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참 아름답고 고마운 성가정 축일입니다. 바로 제대앞에 아름답게 설치된 소박한 성탄구유 장식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물론 성가정 교회 공동체를, 더 나아가 하나의 인류 가정 성 가정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 싶습니다.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노래한 찬미가와 너무 잘 어울리는 제대앞 성가정 모습입니다.
“나자렛 오막살이 순박한 예배, 얼마나 감미로운 기억일런가.
나자렛 예수님의 고요한 생활, 그생활 기억하며 노래들하세.”
강론준비중 이어지는 5절까지 내용을 읽어보니 정말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성가정 공동체의 진수를 만난 듯 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야 말로 모든 교회 공동체의 원형임을 깨닫습니다. 흡사 혼돈에 빠진 세상 바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노아의 방주”같은 성가정 교회 공동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오늘 끊임없는 노래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그러니 주님의 집, 성전에서 드리는 미사공동전례는 얼마나 행복된지요! 삭막한 인생 광야에 오아시스같은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주는 미사전례은총입니다. 공동체의 보금자리 품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공동체의 기초가 가정공동체요, 사람들이 날로 거칠어지고 사악해 지는 근본적 이유는 보금자리 가정 공동체의 파괴에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많이 가난했지만 가정집이 있었고 집에는 어김없이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이, 품이 있었습니다. 가정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작금의 시대에 하느님께서 교회는 물론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온 인류를 품에 안아야할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 가정 공동체만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고 있는지요! 얼마전 스크랩한 두 기사내용을 소개합니다.
“가난의 늪에 빠진 한국 노인들. 한국 노인 빈곤율이 여전히 경제협력 개발기구 오이시디 회원국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기준 66살 노인 10명중 4명이 빈곤 상태였고, 나이가 많을수록 빈곤율도 더 높았다.”
“국민 10명중 3명이 ‘나는 고독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설문 조사에서 답했다. ‘가족-친척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채 홀로 살다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시간이 흐른뒤에 발견되는 죽음’으로 정의되는 고독사가 남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사회가, 나라가 성가정 역할을 해야 할 시대가 도래한 것이요, 우리 가톨릭 교회가 성가정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줘야할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제가 개탄하고 혐오하는 우리의 병든 사회의 단면은 반려견들보다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성가정교회공동체에 반려견들도 속하지 않는가 하는 참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귀여운 아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려견들이 있다는 현실이 몹시 불쾌합니다. 얼마전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읽은 두 말마디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인데 이제 교회는 명실공히 온 인류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할 시대에 돌입한 듯 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수 없다.” 성 치프리아누스의 말씀인데 이젠 모든 인류가 교회를 어머니로 삼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고 살아야할 시대에 돌입한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모두 한 성가정교회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어머니 성가정 교회 공동체인지요! 그렇다면 참 좋은 성가정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성향이 같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몇날은 살 수 있어도 평생 하느님 중심없이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모범인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공동체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도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 아드님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성전을 찾았으니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 자리에서 만난 시메온과 안나입니다. 시메온이 마리아 성모님에 대한 예언이 섬찍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에 칼에 꿰질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인지요! 아 결코 온실속의 안락하고 편안한 온실같은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자 환상입니다. 문제없는 이상적 유토피아 공동체가 아니요 속된말로 참 팔자사나운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치유와 구원이 되는지요! 고통과 시련중인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바로 그중심 자리에 성모님이, 예수님이 계시고 바로 거기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향한 공동전례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비로소 성가정교회 공동체를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니 하느님의 총애 덕분입니다.
둘째, 사랑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의 아름다운 말씀에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 성립을 위한 대헌장같습니다. 말그대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리나오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를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입니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그리고 평화와 감사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평화, 감사 등 참 좋은 모든 덕목이 사랑안에 다 수렴됨을 봅니다.
새삼 사랑도 선택이자 부단한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사랑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값싼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은총과 더불어 주님 “사랑의 전사”로서 분투의 노력을 다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훈련에 결코 좌절함이 없도록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끝까지 온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서로의 구체적 관계에 충실한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최고의 그러나 미완의 예술작품이 공동체요, 공동체는 관계의 예술입니다. 부부간, 부모와 자녀간, 노부모와의 관계에 깨어 섬세하게 응답해야 함을 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혜로운 조언을 통해 일방적인 권위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쌍방향의 보완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부모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들의 기를 꺾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이며,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배려하는 사랑, 순종하는 사랑입니다. 새삼 순종의 사랑 역시 부단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은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영성훈련의 열매가 자유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죽을때까지 계속될 사랑의 훈련에 지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노부모를 대하는 집회서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가난의 늪에 빠진, 가난과 병마와 싸우는 불쌍한 한국 노인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지며,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한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어라.”
비단 노부모뿐 아니라 사회 일반 노인들에 대한 자세도 이렇게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어린 자녀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노부모한테 잘한 분들치고 잘못된 자녀들을 제가 본적이 없습니다.
정말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가슴의 품은 날로 넓어져 모든 인류를 품에 안아야 할 것입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이니 말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충격도 잊지 못합니다. 2월에 피정왔다가 다시 12월에 피정온 개신교 목사님입니다. 면담이지만 고백성사처럼 해달라기에 경청한 후 말씀처방전에 강복을 드렸고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복사본 책도 선물했습니다.
신자가 아니면서 미사신청을 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온세상, 온인류, 온피조물에 열려있는 위로와 구원, 치유의 “힐링(healing)센터”와 같은 성가정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미사 참여보다 더 좋은 힐링도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전인적 치유의 구원과 더불어 이런 성가정 교회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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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자유>
우리 시대는 혼밥, 혼술의 혼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도 아니 혼족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혼자 사는 족속 또는 혼자 사는 가족이라는 뜻이지요.
제가 한심해하는 것은 신생아 수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는 인구 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 걱정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세태이니 아무 가정이라도 많아지면 좋겠다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성가정 운운하는 것이, 과연 통하는 얘기일지 의문이 들면서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패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성가정의 의미를 제대로 또 적극적으로 살아, 다시 말해 우리 가정을 먼저 복음화하여 온 가정을 복음화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가정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널리 풍기는 것이지요. 가능하다면 성가정 TV도 만들고 그럴 수 없다면 ‘나 혼자 산다’는 프로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기존 평화방송에 마련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금을 모으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받아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고 홍보도 하는 사업도 벌이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많은 신자 가정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성가정을 모범 사례와 희망 공동체로 매체를 통해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가정이 모범이 될 성가정입니까? 그것은 삼위일체 공동체와 요셉, 마리아, 예수의 성가정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성령의 사랑이 가정의 중심이 되는 가정입니다.
방금 저는 성령의 사랑을 언급했는데 성령의 사랑을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다양한 가운데서 일치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일치가 조화를 이루고, 한마디로 사랑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유는 최고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인데
그러나 우리는 조화를 이루는 데 보통 실패하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보통은 자유를 선택하고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데 혼족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자유롭고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자유롭기를 자기가 바라는 만큼 상대에게도 자유를 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바라는 사랑을 하기에 실패합니다.
나는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너는 내가 바라는 너이길 바라는 겁니다. 꼭 대가를 바라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면 너도 나를 사랑하기를,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면 너도 그만큼은 사랑하기를, 내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너도 그런 사랑을 하기를, 내 사랑을 받은 만큼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어떤 때는 그 이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고약한 바람도 있습니다. 나만 사랑하기를, 내 곁에만 있기를 바라며 사랑의 구속을 하고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슬플 때는 위로가 되어주고, 내가 힘들 때는 힘이 되어주고, 만사 귀찮을 때는 적당히 거리를 떨어져 있어 주고, 내가 말할 때는 언제나 맞장구쳐 주고 수시로 사랑을 표현해주기를 바랍니다.
상대방도 슬프고 힘들 때가 있는데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라는 것이 모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성령의 사랑을 가족 서로 실천하는 성가정이 많아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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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다."(루카 2,40)
<성탄과 성가정!>
오늘 복음(루카 2,22-40)은 오늘날 유아세례의 성격을 지닌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는 말씀과 이를 직접 목격한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의 예언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의 의미는 '우리도 성가정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곧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하시는 성령님께서 머무시는 가정, 중심에 계시는 가정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선과 악의 모습들은 가정 안에서 시작된 것들입니다. 인간의 인격 형성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 안에서 큰 영향을 받아 인격이 형성되고, 이 안에서 모든 움직임들이 흘러나옵니다.
상처 입은 가정들이 많고, 흔들리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교회와 나라와 세상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의 문제는 대물려 계속됩니다. 그만큼 가정이 중요하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집회 3,2-6.12-14)와 제2독서(콜로 3,12-21)는 가정의 구성원인 부모와 자녀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지녀야 할 모습을 전합니다. 요지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순종하고,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6.17)
이것이 사랑의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며, 성가정을 이루게 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쁘게 새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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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vjgn5Ors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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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다."(루카 2, 40)
하느님의
인격이
모여사는 곳
그곳은 바로
성가정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성가정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가정의
인격(人格)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과
가족을 만나며
우리와
한 몸이 되십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힘, 그것은 바로
가족입니다.
기도가
울려퍼지는 곳
그곳 또한
가족입니다.
성가정을
지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가정을
만나십니다.
사랑의 빵과
사랑의 물결은
성가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성가정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성가정은
우리가
하느님을
껴안아주며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룩한
곳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십니다.
살아가는
모든
삶의 시작은
가정입니다.
성가정 안에서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하느님
사랑의 방식은
성가정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성가정을 통해
예의와 품위
소통과 배려를
배웁니다.
배우면서
더 깊어지고
실행하면서
한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성가정의 꿈을
이루십니다.
성가정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
자녀들입니다.
소중한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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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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