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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시인 다윗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시 27:4).
그것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입니다.
주의 성전은 곧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과 함께 아버지의 품속에 거하며 교제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것이 영생이요 소망가운데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 죽을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인 이 몸도 주께서 대속하여 주시고 새 생명을 주셨으니 그 생명으로 오늘을 살며 그 나라를 바라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내가 구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옵소서.
내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 등 옛 사람으로 행하려는 것들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내가 신이 되려는 자기 의 또한 못 박고 예수로 살기 원합니다.
나를 건져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14:1-9
제목 : 너는 말씀(복음)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4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 나의 묵상
호세아 선지자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비록 이스라엘 자신의 불의함으로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 돌아와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선한 것을 받아 주십시오. 우리가 이제 제물로 드리던 수송아지가 아니라 우리의 입술로 찬양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라고 촉구하고 있다.
또한 “다시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馬)과 같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을 것인즉 이는 고아와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라고 한다.
이 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약속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패역했던 죄를 용서하고 또한 그들을 기쁘게 사랑할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침이슬과 같다.
그래서 식물들이 그 이슬을 먹고 자라듯 이스라엘이 그 아침이슬을 머금고 백합화와 같이 아름답게 필 것이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뿌리가 깊이 박혀 튼튼해 질 것이다.
그들의 가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가지가 무성할 것이며 마치 감람나무같이 아름답게 자라며 백향목의 향기와 같이 향기로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와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풍년을 맞은 곡식처럼 풍성하겠고 포도나무에 꽃이 피어 레바논의 포도주 향기처럼 아름답게 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우리가 다시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며 그 우상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사시사철 푸른 전나무나 소나무와 같아서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너희는 나로 인하여 풍성한 열매를 얻을 것이다.
누가 이런 것을 지혜로 깨달을 수 있겠느냐?
누가 사람의 총명으로 이런 것을 알 수 있겠느냐?
하지만 하나님의 길은 정직하여 의인은 그 길로 다니며 살 수 있지만, 죄인은 오히려 그 길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으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이었다면 진작에 그들을 포기하고 다 쓸어버리며 진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또 참으시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이는 사람은 불의하나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 없으시기에 그 신실하심을 끝까지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단순히 사람보다 나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과 약속하셨던 그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은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그 약속이 그 즉시 깨어지고 만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약속은, 사람이 그 약속을 어길지라도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가 없으시기에 그 약속을 깨트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약속을 어긴 사람과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내산 언약을 깨트린 이스라엘은 패역하여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또 다시 모압에서 언약을 갱신하신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또 깨트리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부르시면서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시금 그 언약마저 깨트리고 만다.
실로 염치도 없고 낯짝도 두껍다.
매번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납하시면서 언약을 새로 체결하실 때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철썩같이 약속을 하면서도 불과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약속을 어기고 깨트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깨질 수도 없고 깨트릴 수도 없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를 일컬어 새 언약이라고 한다.
옛 언약으로 불리는 시내산 언약은 짐승의 피로 맺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었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 편에서 깨트린다고 해도 그것은 깨질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아브라함)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시 105:8-10) 그(하나님)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기에 창세전에 아들과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항상 기억하여 비록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떠나 반역을 일삼을지라도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을 그냥 주시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거저 행해주셨다.
그러나 언약 안에 머물러야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언약이 성립된다.
그렇기에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계명, 즉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대로 쉐마할 때에 언약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 언약 안에 머물며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주신 말씀 안에 거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언약 공식인데, 이스라엘은 이 언약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지 않으신 것이다.
(히 8:9b)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물론 언약 안에 머물지 않은 그들을 돌보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들을 지옥 백성 되게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니다.
그들의 완전한 구원이 잠시 유보되었을 뿐이다.
그만큼 그들은 그 구원이 완성되기까지 고통가운데 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새 언약 백성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버지와 자녀로써 새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 역시 아직 구속받지 못한 육신의 한계로 인하여 얼마든지 넘어지고 죄 가운데 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포자기하거나 좌절하여 낙심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그런데 다시 일어서는 것 역시 우리의 힘이 아니다.
바로 예수를 힘입어 일어서는 것이다.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서 흘리신 보혈을 힘입어 일어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됨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따라서 호세아 선지자가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아뢸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수송아지 제물이 아니라 바로 입술의 열매를 드리겠다는 고백,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선한 것이다.
(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그들이 드리는 입술의 열매, 즉 선한 것은 단순한 립 써비스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참 예배이며, 이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릴 수 있다.
우리의 예배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서 드린다 하더라도 예수의 보혈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선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가 생각하는 선한 일, 선한 열심, 선한 뜻은 아무리 그것이 사람이 보기에 선할지라도 불의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불의하며 죽은 흙이기 때문이다.
(고전 15:22a)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러나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시 산 자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영은 곧 살려주는 영이기 때문이다.
(고전 15:22b)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을 얻으리라.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오늘 호세아서 묵상을 마치면서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패역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을 기쁘게 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침이슬과 같아서 모든 식물들이 아침이슬을 머금고 생명을 이어가듯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머금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말씀을 통한 생명이라 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아들의 생명을 얻음을 일컫는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아왔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온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가 나의 주님이라고 입으로는 고백 하면서도 세상의 물질과 명예 그리고 보란 듯한 삶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왔다.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고 항상 믿음과 신앙 안에서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나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의 품에 안겨 살아온 자와 다름없다.
왜냐하면 겉으로 하는 행동은 그럴 듯 했기 때문이다.
젊은 청년 시절,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찬양대에서 찬양을 하였으며 찬양대 지휘도 했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목사가 되어서는 충성된 일꾼처럼 사역의 열매도 많이 맺었다.
하지만 나의 속마음은 주님께 나아가지 않고 수시로 주님을 떠나 세상의 욕심과 탐욕으로 채워나가는 자였다.
세상이 주는 풍요의 신 바알과 쾌락의 신 아세라가 내 안에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나를 지배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의 종으로 살아왔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는 그런 모습이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매일 주의 보혈로 나를 씻는다.
나를 죄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불구자, 거룩한 불구자로 살기 원한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죄의 본성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달려가 그것을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종노릇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도 성령께서 나를 도우셔서 내가 넉넉히 일어서게 하실 것이며, 또한 주의 말씀이 나를 강권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실 것을 믿는다.
아침 해가 돋는 브니엘이 곧 나의 브니엘이다.
오늘도 주의 영광의 빛이 나를 비추인다.
그 영광이 곧 나의 영광이 되어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연약하여 넘어지기 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보혈을 의지하여 굳건히 서기 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의 은혜와 자비로 도우소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돌아오라 돌아오라 부르시는 주님...
이제 주의 음성이 오늘 내 마음을 치며 나를 향하여 부르시오니 지금 주님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목사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 가지가 되게 하소서.
주의 자녀로써 주의 말씀에 쉐마하는 자로 먼저 서게 하옵소서.
나는 오직 주의 품에 거하는 자로 그 품이 나의 놀이터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안에서만 선한 것을 행하게 하소서.
나의 선함이 아니라 주의 보혈이 바로 나의 선함이 되게 하소서.
사시사철 푸른 전나무와 소나무처럼 주님의 그늘 아래서 참 영생의 복을 누리는 자 되기 원하오니 오직 주님만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나이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