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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8일(금)
* 시작 기도
(시 107:28-31)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이 평온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주님...
불순종 하는 이들을 주께서 심판하셔서 고통을 주셨습니다.
이 때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 때 주님은 구원자를 보내어 그들이 소원의 항구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행하시는 주님의 기적을 통하여 우리는 찬송합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영원한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기를 그렇게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죽은 흙이었던 우리는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그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시고 오직 주님이 내려가신 그 무덤에 함께 장사되기 원하오니 주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이 하루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하소서.
나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소망의 항구에 오늘도 들어가 연합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1:1-10
제목 : 다른 복음은 없나니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나의 묵상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음이다.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함께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다.
갈라디아 교회라 함은 지금은 김해교회나 부산교회 하이퐁한인연합교회 등과 같이 고유명사로서 붙여 쓰지만 당시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로서 대부분 10명 안팎의 가정교회 형태로 모였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런 교회들에 편지를 쓰면서 먼저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의 문안을 한다.
바울은 제일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한다.
이제 바울이 쓰는 서신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워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 갈라디아 성도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이 이렇게 빨리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다른 복음은 없다.
너희들에게 들어온 것은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혼란스럽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의도로 한 것이다.
이런 것은 설령 바울 자신을 비롯하여 하늘의 천사들조차 너희가 이미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다시 말하는데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결코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하여 거기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에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와서 율법과 할례를 지키도록 가르쳤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던 것이 AD 49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2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를 다시 방문하게 되는데 이 편지 곧 갈라디아서는 처음 방문 후 4-5년이 지난 약 53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은 이 복음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진 복음을 듣고 믿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능력가운데 행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열광적인 상황이 지나가고 그들에게 이 복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바로 그 때 유대 기독교인들이 찾아와서 그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곧 율법과 할례였다.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복음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은 현실의 삶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유대 기독교인들이 와서 율법과 할례를 통하여 완전해 질 수 있다고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 말을 냉큼 받아들이고 만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바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노기에 찬 모습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한다(4절).
그리고 다른 복음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나를 비롯하여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바울이 강조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건이다.
죄의 형벌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건지신 이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외에는 없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무엇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면서 격한 감정을 표한다.
그들에게 참된 복음, 순수한 복음을 폄훼하려는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지고 있다.
사람들의 한계는 복음을 이 땅의 삶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산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이 하루하루 현실적으로 좋아지거나, 잘 안 되던 일이 갑자기 잘 되고 아픈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는다.
고난이 있는 사람은 복음 안에 있어도 여전히 고난이 지속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기가 죽기도 하면서 내가 믿는 이 복음이 가짜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곤고하고 어려울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지 말라고 강권한다(히 10:31-39).
이는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데 있지 않고 영원한 나라요 흔들리지 않는 그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파레시아(담대함)이다.
오늘 본문의 갈라디아 성도들의 한계 역시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와 상황 앞에서 복음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완전한 나라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고통과 수치 그리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치심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나 또 다른 그 무엇(다른 복음)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게 고난과 시련이 왔다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주셨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무덤으로 삼고 그 무덤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 곧 주님과 말씀으로 늘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무덤은 어둡다.
무덤은 고통이다.
무덤의 상황은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주의 말씀으로 그 자리에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가지면 상황과 형편은 그대로일지라도 주께서 나의 마음에 진정한 평강을 허락하신다.
평강은 상황이 편안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함께 관계를 가질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 자리가 바로 기쁨의 자리요 하나님 나라인 영생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했던 유대 기독교인들은 현실적인 그 무엇을 가져다주어 그것으로 문제와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가 힘들고 어려우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럴 때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고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도움이 지금 당장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주기 원하시는 참된 도움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그런 제한적인 도움이 결코 아니다.
바울이 답답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곧 영생을 누리면 그 상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고난의 상황에서 복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 마음이 바울의 마음만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요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바울의 손을 빌어서 쓰신 것이다.
나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 확실한 해결책을 알고 그 방법대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물론 내가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이다.
그러다가 정말 견디기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때 나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외부에서 하는 세미나나 캠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소개하는 캠프인데 이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참 복음을 전하는 곳이란다.
나는 말씀묵상도 그리고 복음도 잘 알지 못하였기에 그럼 한 번 휴식을 취한다 생각하고 참석하기로 하였다.
별 기대없이 참석하였는데 첫 시간 ‘영생’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내 생각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생명이 두 종류인데 아담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
나는 지금까지 아담의 생명으로 살아온 자요 죄인 중에 괴수임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날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나는 이 때 참 복음을 듣고 이 땅에서의 나의 모든 현실적인 기대감을 내려놓았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 나의 의지와 현실적인 목표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기를 마음먹었다.
나의 죽을 것 같은 상황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지만 내 속에 참된 평강이 찾아왔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지금도 순간순간 나를 미혹하는 다른 복음들이 있다.
그것은 내 상황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꿔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치심하다 보면 복음이 무력하게 된다.
내가 무엇이라고 복음을 무력화시킨단 말인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인데 이런 나를 용납하시고 아들 삼아주신 것만 해도 무어라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하루가 주님 안에서 참된 평강의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죄책감에 시달려 고통 속에 헤매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 종은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나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주의 온전한 자녀 삼으셨습니다.
하여 이 시간 날아갈 듯이 기쁘고 깃털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평강의 나래를 펴나이다.
이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요 흔들리지 않는 나라임을 확신합니다.
나의 하루하루가 무료하거나 너무 쫓기는 시간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늘 지속되게 도와주옵소서.
나를 나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믿사오니 십자가 대속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어 오늘도 주님과 함께 죽고 장사되어 살아나는 역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