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은 이 집 주방이 두렵다. 칼이 무섭고
도마도 무섭다. 건드리면 지레 겁먹고
얼른 뭔가를 내놓는다. 한 줄뿐인 내장에
이상한 향을 품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얼른 내장을 쏟아놓는다. 창자만 가져가시고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인데, 인간 세상 협상 대신 내장 빼앗고
해삼 반으로 잘라 양식장에 던져놓는다.
나도 당신이 두렵다. 두려움과 그리움
구별할 수가 없다. 어젯 밤 당신 내게 왜
그런 소포를 부쳐왔는가. 우편물이 왔다고
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기 묶인 꾸러미 위에
희미하게 당신 이름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뭘 보낼 리 없는데, 어떻게 내 주소는 알게
됐을까 풀어보려는 순간, 이름 희미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대개 꿈 아니면
백일몽이다. 두려움과 그리움은 눈 비비며
같은 구덩이에 산다. 그것들 소포 꾸러미처럼
가끔 날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당신들 내게 그렇게 호의적일 리 없지, 내가
내 속을 긁어내 환상의 꾸러미를 만들건 말건,
내장 긁어내 보였다 다시 삼키건 말건.
어쨌거나 해삼, 어느 여름날 새끼줄에 묶어
데려갔다가 흔적 없이 녹아내린 적 있었다.
분하고 원통한 것은 해삼인지 나인지.
그나저나 나는 시 같은 걸 쓴다. 별로다.
나는 시 같은 걸 쓰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다.
한밤중이다. 그건 괜찮다. 바위틈으로
기어들어 부풀리고 굳어져서 아무도 꺼내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러나 다시 내장 빼앗기고
반으로 잘려 던져지는 해삼의 밤이다.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찍는 밤이다. 간이고
창자고 쏟아놓고 기다려주마. 이 내장 삭아
젓갈 되면 그 아득한 맛에 헤어나지 못할까.
헤이, 미식가 여러분,
세상이 한판에 녹아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