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우
2일 ·
대한민국 육군 제 6대 참모총장이자 8대 국방장관이셨던 故 이종찬 장군(1916년 3월 10일 ~ 1983년 2월 10일)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육군 포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포병 소좌로 복무한 이력과 일본군 복무 당시 공5급 금치
훈장과 훈6등 단광욱훈장을 수훈받았다는 점만 놓고 보자면 민족에 대한 반역자임과 동시에 친일부역자인 건 맞다.
하지만 광복 이후 다른 친일변절자 출신 군인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경력을 왜곡하거나 지워가면서 권력자들 앞으로
달려간 것과 달리 이종찬 장군은 반민특위에 스스로 자수하셨고 군 안팍에서의 합류 요청에도 '변절자인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으며 자숙만이 길이다'라고 한동안 거리를 두었다.
을사오적 중에 한 명인 이하영의 손자이지만 조부와 부친의 자작 작위를 습작하지도 않았고,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일본군 복무 당시에도 상관들이 저지르는 불의나 민간인 탄압 및 위안부 탄압에 항명하다가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방군 제18군 참모로 복무하던 시절 현지 여성들을 착취하고 성폭력을 명령한 사령관을 제지하면서
'천황이라면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겠느냐'고 했다가 솔로몬 제도의 오지로 좌천된 에피소드는
일본 내에서도 꽤나 유명하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을 때도 자진 출두하여 모든 혐의를 인정했는데, 반민특위에서조차
'일본군의 복무를 했을지언정 악질적인 친일 행위를 한 흔적이 전혀 없고 자작 작위를 습작하지도, 개인의 영달을
챙기거나 착복하거나 민중을 탄압하지도,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군 복무 중에 조선인 병사들이나
강제징용공들의 처우개선에 노력하다 오지로 좌천되기도 한 점' 등을 참작 받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일제에 부역했던 일본군 출신 중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늦게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에 공병대위 계급으로
합류했다. 1949년 6월의 일이다. 이유는 앞서 서술한 대로 '자신은 친일 경력이 있는 변절자'라는 이유에서였다.
'포병 장교로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가 필요하다'는 친일 부역 경력 선배들의 설득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에도
훌륭한 실전 경험자들이 있는데 왜 그들을 먼저 영입하지 않는가'라 답을 한 것도 유명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고 이승만 정권 및 군의 고위 간부들의 서울 탈출 및 한강 이남에서의
저지 작전에 크게 반대했다. 연합군 참전 이후에는 가장 먼저 38도선을 돌파한 부대를 지휘했고 이게 국군의 날을 제정,
기념하는 계기(1950년 10월 1일 육군 3사단)가 되기도 했다. 국군의 양민학살이나 북한군, 중공군 포로에 대한 탄압에
가장 맹렬히 비판하고 저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보도연맹 사건이나 북한 주민들에 대한 국군의 탄압을 '마적단이나 할 짓'이라고 비판한 건 유명하다. 포로들을
학살하려 하는 휘하 장교들을 뜯어 말려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북한이나 대한민국이나 매한가지 아니겠느냐고 설득,
포로들을 모두 살려 거제 포로수용소로 보낸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던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육군 참모총장 시절에는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 군인들을 많이 영입하려 했다. 9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육사는 그 뿌리를
국방경비사관학교와 그 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두고 있기에 9대 교장이지, 육군사관학교라는 명칭을 단 교육
기관으로서는 최초)으로 독립군 출신의 안춘생 준장을 기용할 때는 구 일본군 출신들을 기용하자는 내각 인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중에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은 건 안다. 하지만,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을 앞으로 양성해낼 사관학교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들이 육사의 교장을 맡으면 안된다. 육군사관학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 장교들이 교장을 맡아야 비로소 육군과 나라의 정통성이 수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에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신 표자영 여사의 집안사정이 비루했던 걸 두고 모친이 '양반집 규수도 아닌데
왜 혼인하려 하느냐'고 역정을 내자 '어머니 우리 집안은 을사오적 집안인데 어느 쪽이 더 비루합니까'라는 한마디로
설득했다는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물의를 빚어가며 대통령 재선을 시도한 이승만을 비판했고 야당 탄압을
목적으로 이승만이 계엄령을 내리자 '군인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켜라'는 내용의 '육군본부 훈령
제 217호'를 발령하여 이 계엄령을 차단한다. 이승만이 야당 탄압 및 재선 시도를 위해 육군에 군의 파병을 명령했으나
이것도 거부했다. 이때 이승만이 이종찬 장군을 경질하고 아예 죽여버려야 한다고 했을 때 친일파 출신 뿐 아니라
독립군, 광복군 출신 장성들 뿐 아니라 이승만을 지지하는 자유당 인사들까지 일제히 나서서 반대한 것도 유명하다.
1960년에 중장으로 예편, 4.19 혁명 발발 이후에는 윤보선 정권 하에서 국방장관이 되었고 정치 군인들을 배제하거나
예편시키는 데 주력했다. 1960년 제헌절에 3군 참모총장들과 해병 사령관을 소환하여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모든 장교들에게 헌법 준수 선서식을 거행하게 한 것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에 일본에 부역한 것, 5.16 이후 박정희의 정치적 압박이 있었다고는 하나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점, 10.26 사태 당시 김재규를 살리지 못한 점, 박정희의 김영삼의 제명 시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점을
말년에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도 김재규 체포 이후에는 '김재규를 살리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의 부하들이
부당한 처벌이나 처우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탄원을 했다)
뭐, 그렇다구.
p.s. 故 이종찬 장군은 광복 이후 추진된 이하영의 재산 압류에 대해서도 '그게 당연한 도리'라 하셨는데 장군의 타계 후
그의 자손들이 '재산 압류는 부당한 행위'라며 국가에 소송을 낸 걸(패소했지만) 생각하면 꽤나 착잡한 느낌도 든다.
p.s.2. 안춘생 준장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육군사관학교"는 광복군 및 독립군을 계승한 교육기관인데
홍범도 장군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건 육사의 존재의미 자체를 지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https://www.youtube.com/live/MNgAYQ6VxwY?si=wkmOeI-_BnBxeD_x
요즘 화가 아주 많이 치민다.
첫댓글 김대업의 선거공작 유죄판결과 김만배의 선거공작은 참 눈을 씻고 봐도 거짓선동임이 밝혀잠에도 아직 눈을 가리고자 하는 세력도 존재하더라 ㅜ
화는
나도 치민다.
아주 미학이었어요. 선정이
다이아님 글주제에서 벗어난 딴소리는 그만두시고 백선엽, 홍범도 이야기 하시죠? 쉴드가 안 되어서 그러시나 딴이야기 끌어들여서 촛점을 흐리시는군요.
이 글을 쓴 이의 정확한 직업은 모르겠다. 페이스북 피드를 보면 가끔 여장을 하고 외출하는 취미도 가진 재미있는... ^^
그런데 한편 군 무기 체계에 해박한 말하자면 밀덕(밀리터리 덕후)이다. 특히 총 포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온라인으로 연결된 세계에서는 정말 별의별 사람들을 보게 되며, 그들을 통해 많이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