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 박보검과 남장내시 김유정 주연의 팩션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세자 이영(박보검)은 홍삼놈(김유정)이 사실은 남장내시이며 라온이라는 여자임을 알게 됩니다. 홍라온 역시 이유도 모른 채 엄마의 말에 따라 어린시절부터 남장을 하고 살아왔던 설움을 벗고 세자 이영 앞에 라온이라는 여성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면서 두 사람의 본격적인 궁중로맨스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고비가 남아 있습니다. 홍라온이 사실은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 홍경래의 딸로 관군에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세자 이영은 농민들의 봉기로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홍경래의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잡아들이라고 지시해 둔 바 있습니다. 조만간 라온이 홍경래의 딸이라는 게 밝혀질 텐데, 그렇게 되면 이제 막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 앞에 어떤 불행이 닥칠지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러면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는 누구일까요? KBS [역사저널 그날]을 바탕으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홍라온의 아버지로 나오는 일으킨 홍경래는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왜 당시 홍경래의 발생했던 것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1811년 음력 12월 18일 평안도 가산에서 수탈과 차별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가산관아에 들이닥쳤다. 성난 백성들의 선봉에 선 것은 바로 홍경래였다.
“지금 나이어린 왕이 왕위에 있어 권세있는 간신배가 날로 국권을 멋대로 하고 있다. 이제 격문을 띄우노니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홍경래의 난 격문 중에서
파죽지세로 진격한 홍경래와 봉기군은 100여 일 만에 평안도 8개 고을을 점령했다. 아래로부터 시작된 조직적이고 치밀한 저항이었다. 조선 후기 백성들의 저항의 시대를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봉기군 조직도
당시 봉기군은 관아의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며 민가에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반면에 고을 수령들은 도망가고 항복하기에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 중 봉기군에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김익순은 조선 후기 아주 유명한 방랑시인 김병연, 즉 김삿갓의 할아버지다. 김병연은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홍경래의 난 때 항복했던 고을 수령 김익순을 고발하라>는 시제가 나와 멋지게 고발을 해서 과거에 급제를 했는데, 나중에 김병연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그 사연을 들려주자 김병연은 “차마 하늘을 보고 살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방랑시인이 됐다는 일화도 있다.
또 다른 일화는 김병연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를 리는 없었을 테고, 당시 김병연을 라이벌로 삼고 있던 노진이라는 시인이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농민 봉기군에 항복한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한 시를 써서 퍼뜨리자 김병연은 우리 할아버지가 이토록 치욕을 당하는구나 싶은 절망감에 두 번 다시는 평안도 땅을 밟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봉기군 지도자 홍경래는 어떤 인물이었나?
19세기 시대의 대변자이자 농민저항운동의 서막을 연 중심인물이었던 홍경래가 이끄는 봉기군이 초반에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10년간 치밀한 준비를 해온 덕분이었다. 홍경래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요인물들을 포섭하고, 상인들과 같은 부유층으로부터는 자금을 모았다. 게다가 봉기 직전에는 심리전까지 펼쳤는데, [정감록]의 예언이 그것이다. 거기에 각 지방관아의 기강이 몹시 해이해져 있었던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다만, 홍경래 자체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홍경래전], [신미록], [홍경래실기] 같은 전기류 고전소설로 남아 있을 뿐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생으로 턱이 짧고 뾰족하며 수염은 길었고 오른쪽 눈 위에 사마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상 자체는 좋은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키도 크지 않아서 4척 5촌 정도, 약 150센티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 출생이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소과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선발)에 응시했으나 실패한 후 풍수지관이 되어 돌아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았고, 무엇보다도 병서, 술서에 능통했으며 특히 정감록을 두루 꿰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회 모순을 직시한 지식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
홍경래의 난에는 왕족 빼고는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는데, 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봉기군 지휘부는 격문을 통해 "평안, 함경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없다. 나라 습속이 문벌을 중시 여겨 서울 사대부는 서북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며 봉기의 명분을 밝힌다. 양반들이 거주를 기피하여 성리학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 관료들이 보기에 평안도는 변방인데다 성리학도 잘 모르는 뒤떨어진 지역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유했던 평안도는 대청무역의 중심지로 상업무역이 발달해 굉장한 부를 축적했던 곳이었다. 무역과 사업이 번성한데다 군사적, 외교적 요충지여서 세금을 중앙에 보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한 탓에 재정이 매우 풍부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부터 중앙 재정이 부족해지자 평안도 재정을 끌어쓰기 시작하고 그것이 그 후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진행되자 결국 평안도에서 필요한 재정이 부족하게 된다. 게다가 부유한 상인들에게 향직을 돈 받고 파는 매향(賣鄕)을 하면서 수령들의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등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있는 사람도 힘들어지고 없는 사람은 더 힘들어지는 구조가 된 것이다.
■ 지역차별 철폐와 세도정치 척결
순조가계도
지역차별 외에 또 다른 원인은 19세기의 세도정치였다. 세도정치는 조선 후기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다. 순조의 정비였던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과정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세도정치로 인해 양반이나 지식인들은 실력이 있어도 관직에 진출할 수가 없었고, 상인들도 세도가와 결탁된 독점상인 때문에 피해가 컸으며, 농민들도 세도가와 수령들의 수탈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다. 그래서 봉기군들이 지역차별 철폐와 함께 내세웠던 중요한 주장이 바로 세도정치의 척결이었다.
■ 관군과 100일간의 대치 끝에 막을 내리다
1811년 12월 29일 봉기군은 송림평야에서 관군과 처음으로 정식 전투를 벌인다. 전투 초반에는 봉기군이 관군보다 우세했지만 곧 관군의 원군이 나타나 봉기군의 배후를 기습공격하자 봉기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수백 명이 죽는 처참한 패배를 맞는다. 결국 봉기군은 정주성으로 철수하고 엄청난 관군에 포위된 채 철저하게 고립되고 만다.
1812년 음력 4월, 일촉즉발의 100일간의 대치상황 속에 은밀한 작전을 펼친 관군은 성벽을 허물기 위해 땅굴을 파고 화약을 설치한다. 그리고 4월 19일 새벽, 마침내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고 1,700근이 넘는 화약의 폭발로 산산이 부서진 성벽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관군에 맞선 봉기군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 인력으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하지만 결국 대원수 홍경래가 총탄에 맞아 숨지면서 100일간의 교전은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정주성 함락과 함께 약 3,000명의 봉기 가담자가 체포되고, 여자와 10세 어린이를 제외하고 참수형에 처해진 사람만 1,917명이나 됐다고 한다.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던 홍경래의 난, 아래로부터 시작된 저항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만다.
그러나 송림전투 후 관군의 초토전술에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에 가담하게 되고, 결국은 항쟁의 중심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관군들이 오히려 농민들의 저항의식에 불을 붙인 셈이 된 것이다.
봉기군이 정주성에서 100일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저항정신과 결사항전의 의지에 있었다. 그런데 조정의 입장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단순한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생각해서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누적된 사회적 모순으로 불만이 쌓여간 농민들을 저항의 주체로 성장하게 만들어 1862년의 임술농민봉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가 된다. 비록 봉기는 실패했지만 홍경래의 난은 저항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