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예각
고태현
K형이 세상을 등졌다.
간암 말기가 되어서야 입원하여 치료는 엄두도 못 내고 통증만 관리하다 떠난 것이다.
그의 아들은 고통 없는 편안한 임종이었다고 나에게 말해줬지만 나는 그 아들과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영정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문병을 미루다 한번은 얼굴을 봐야 할 처지여서 달포 전 병실을 찾아갔었다.
얼굴색은 검게 변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의 그가 나를 반겼다.
나와 오랜 지인이고 젊은 날 술친구이기도 한 사람.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공직생활을 일찍 접었던 그는 새로 시작한 사업이 제법 된다고 처음엔 자랑도 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첫사업에 실패하고 다른 사업을 벌여 조금 회복되는가 싶으면 또 주저앉고, 실패는 반복되었고 그는 서서히 지쳐갔다.
그렇게 힘들 때마다 술 생각이 나면 나를 곧잘 불러냈다.
그는 자주 고주망태가 되었고 그의 육신은 알코올에 의해서만 겨우 유지되는가 싶을 만치 갈급하게 술을 찾곤 했다.
연속된 과음은 간경변증을 불렀고 이어 간암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상 징후를 알면서도 병원에 가는 것을 미루다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자 진찰을 받았는데, 이미 병증은 치료시기를 넘긴 상태였다.
병상의 그는 내게 간단히 안부만 묻고 긴히 할 말이 있다면서 나를 이끌고 복도로 나갔다.
“고형, 술 한 병만 사다주시오.
내가 말기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건 잘 알잖소.
죽기 전에 한 잔 해야겠소.
술을 마시고 싶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담당 의사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아내나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가는 경을 칠노릇인데, 술이 정말 마시고 싶단 말이오.
이런 부탁을 누구에게 하겠소. 고형이라면 이러한 날 이해할 것 같아 여태 기다렸소."
그의 음성은 떨렸고 눈빛은 간절했다.
나는 짐짓 고개를 젖히고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형광등 불빛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쩔까, 잠시 생각하다가 작정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지금 제 정신인가요?
마시던 술도 끊어야 할 중환자 아닙니까.
그런데 나더러 그 환자 빨리 죽으라고 독약을 먹이라는 겁니까? 술은 안 됩니다.
다른 부탁을 하세요. 뭐든 들어드릴게."
그는 물러서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안 되는 줄 왜 내가 모르오?
그러니까 고형한테 부탁한다 하지 않았소.
이제 와서 내가 술을 안 마신다고 죽지 않을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신다고 며칠이나 빨리 죽겠소.
고형마저도 참 야박하구려."
병원을 나서는 걸음이 무거웠다.
한 이틀 울적하게 지냈다.
그의 떨리던 음성과 간절한 눈빛이 꿈속까지 따라다녔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소주 한 병을 사서 생수병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병원 근처 카페에서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그의 병실로 숨어들었다.
소등을 한 병실의 어둑한 조명은 사람의 모습만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병상이 네댓인 병실, 환자들은 모두 잠 속에 빠져 있는데 오직 그만 눈을 뜨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말없이 술이 든 물병을 들어 보였다.
그도 말없이 침대 밑의 물잔용 유리컵을 손에 잡았다. 나는 컵에 소주를 콸콸 부었고, 그는 잔을 들어 꿀꺽꿀꺽 단숨에 마셨다.
안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다시 컵을 내밀고 나는 나머지를 모두 쏟아부었다. 그는 잠깐 잔잔하게 출렁이는 술잔의 표면을 들여다보다가 단번에 털어넣고는, '캬' 하고 숨을 내쉬었다.
나는 물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그의 병상 앞 간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린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병실 창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병원을 빠져나왔다.
큰길까지 왔을 때 내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런데 슬픔도 두려움도 아닌 어떤 고통의 예각이 내 안쪽 어딘가를 서늘하게 긋고 지나갔다.
그의 영정 앞에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다시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동행한 지인이 내 팔을 슬쩍 건드려 주안상이 차려진 객실로 이끌었다.
조문객들 중 아는 몇몇 분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고 앉자, 누군가 내 잔에 술을 그득하게 부었다.
쏟아진 술이 작은 잔 속에서 파르르 떨었다.
나는 차마 그 잔을 들 수가 없었다.
약속이 있었던 것을 깜박 잊었다며, 서둘러 일어나 빈소 쪽으로 가서 꽃 속에 웃고 있는 그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눈을 찡긋했다.
'K형, 잘가시오.
훗날 그곳에서 공범끼리 한 잔 합시다.'
돌아서는 순간, 또 한번 서늘한 고통의 예각이 뒤통수를 그었다.
- "The 수필 2020 빛나는 수필가6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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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밤
최홍윤,
내 묵은 그리움 만큼이나
깊디 깊은 밤이다.
저물녁에 간혹 날리우던 눈발이
목화송이 되어 펄펄 내린다
지금쯤
원초적인 내 그리움의 도가니
고향 산하 가곡천 냇가에
내리는 눈송이만 바쁘겠다.
팥죽 쑤던 우리 할머니
애간장 태우던 가마솥 걸린 뒷뜰
댓닢에 속삭이며 장독대 위
소복이 내리는
눈송이만 외롭겠다.
창 밖에
희미한 가로 등불도
가는 세월에 가물거리고
도심에 내리는 눈송이
아득한 그리움에 허공을 휘졌는데
차디찬 외로운 고요에
눈이슬 맺히는 긴긴 밤이다.
여명에 저작거리에 나가
내 할머니처럼 생긴
팥죽같은 할머니의 손 꼬옥 잡고
팔다 남은 팥죽 다 사오리다
오는 길에는 눈싸움 하는 아이들!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으로
모처럼 우리 동네가
환해지는 아침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