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사, 잊히지 않는 첫사랑의 자리
김성문
천관사天官寺는 김유신 장군의 첫사랑이 깃든 곳이다. 청춘의 한순간을 함께 했던 여인 천관天官을 그리워하며 그의 집터에 지은 절이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아련하다. 경주에 갈 때마다 몇 차례 들러보았다. 절이 아닌 절터가 된 그곳에는, 사람보다 오래 머무는 사랑이 있었다.
천관사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삼국유사』신라 ‘원성대왕’ 조다. 김경신으로 알려진 원성왕이 부재상副宰相으로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 그는 귀인이 쓰는 복두幞頭를 벗고, 하얀 삿갓을 쓴 채 12줄의 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기묘한 꿈은 천관사의 이름과 맞닿아 있다. 그만큼 그 절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었던 셈이다.
또 다른 기록은 고려 후기 문인 이인로의『파한집破閑集』이다. 이공승이라는 관리가 경주의 관기管記로 부임하여 천관사를 보고 지은 시가 전해진다. 시는 이렇다.
천관이란 절 이름에는 예로부터 유래가 있었는데
홀연히 다시 짓는다고 들으니 마음이 처연해지네
다정한 공자는 꽃나무 밑에서 노닐었고
원망 품은 여인은 말머리 앞에서 울었네
갈기 붉은 말도 옛정 있어 돌아오는 길 알았는데
노복은 무슨 허물로 채찍을 맞았는가
오직 남은 한 곡 노랫말 아름다우니
달에 함께 잔다는 말 만고에 전하네
이 시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천관사에 얽힌 사연을 되살려 준다. 시 한 수로도 충분히 사랑이 어떻게 절이 되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천관사는 조선 중기인 1530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편에도 실려 있다. 고려 중기까지는 천관사가 실제 존재했음을 뜻한다. 그 후로는 폐사되었고, 현재 경주 오릉 동쪽 교동 244번지 일대에 사적 제531호로 지정된 ‘천관사지’ 만이 남아 있다.
2019년 3월 14일 처음 천관사지에 갔다. 가까운 곳에 남천南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유신이 서라벌에 들어와 생활했던 재매정택에서도 가까운 거리다. 봄날의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주변의 풍경이 물빛에 비쳐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정작 절터는 조용함을 넘어, 영혼까지 비워내는 듯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 석등터, 우물터, 탑의 터가 확인되었다. 수막새와 암막새, 토제품들이 출토되었다. 무너진 탑의 기단석과 옥개석은 논두렁에 흩어져 있었다. 세월 속에 홀로 남겨진 유물들은, 천관의 사연처럼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다.
처음, 그 절터에 섰을 때 여기가 정말 천관사였을까 싶을 만큼 흔적이 미미했다. 주변은 농지로 바뀌어 오이와 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절의 자취는 작물 사이에 숨겨진 듯했다. 생명의 활기가 넘치는 풍경이지만, 정작 있어야 할 흔적 ‘천관의 향기’ 는 사라진 듯했다.
절터 중앙엔 복원 공사 안내판이 서 있었다. 2019년 4월까지 팔각 삼층 석탑 복원과 농로 이설 공사를 마치기로 되어 있었지만, 당시 진척은 더뎠다. 그 석탑은 2층까지만 올라가 있었고, 3층은 공사 중단 상태였다. 예산 문제였다고 한다.
2021년 10월 22일, 김유신의 가을 대제大祭를 마치고 다시 천관사지로 향했다. 그새 3층까지 완성된 석탑이 반겨주었다. 주변은 한창 복원 중이었다. 포크레인은 농로를 정리하고 있었고, 덤프트럭은 흙을 옮기느라 분주했다. 그런 와중에도 탑은 당당히 서 있었다. 복원을 기다리는 시간마저 그 자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동쪽 하늘에 있는 흰 뭉게구름은 마치 천관의 넋이 타고 있는 듯했다. 천관사가 제 모습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았다. 서쪽 멀리 선도산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북쪽으로 보이는 경주 시내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2023년 7월 6일, 다시 천관사지를 찾았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가슴은 설렜다. 드디어 완성된 듯한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기단은 사각형, 1층부터는 팔각. 층마다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다만 상륜부는 아직 미완성인 듯 아쉬움이 남았다. 절터는 잔디로 단정히 덮여 있었다. 세 곳의 건물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옛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천관이 살던 옛집도, 가야금 선율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탑은 여전히 기억을 품은 채 천관사지에 서 있었다. 말발굽 소리에 실려 떠났던 청춘의 한때가 그 자리에 다시 피어나는 듯했다.
자취를 감추었지만 사랑은 남는다. 시간이 덮고 세월이 지웠어도, 천관과 김유신의 이야기는 기운을 타고 옛 자리를 감싼다. 그들은 이제 말이 아닌 침묵으로 전해진다. 땅의 흐름을 따라 이어지고, 그늘진 탑 자락에 깃들며, 잊힌 사랑이 다시 피어난다.
오늘도 그 자리에 서서, 오래된 첫사랑의 향기를 다시 한번 들이마신다. 시간이 남긴 파편들 사이로, 멎은 가야금의 음률이 들려오는 듯하다. 눈을 감으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떠났던 청춘의 한때가 기억의 틈새로 다시 다가온다.
절터는 비었지만, 마음은 그곳에 머문다. 그리고 나는 안다. 어떤 사랑은 잊혀 지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머물며 끝내 한 편의 전설이 된다는 것을.
첫댓글 천관사 이야기는 많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선생님의 글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