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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1년 3월 5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
하고 물었다
[마르 11,27-28]
The chief priests, the scribes, and the elders
approached him and said to him,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Or who gave you this authority to do them?"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멸망과 곤경에서 자신을 건져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그는 지혜를 주신 분께 영광을 드리며, 인생에서 지혜를 추구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제1독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의 정통성과 권한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다. 예수님께서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이들의 질문에, 당신의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질문자가 오히려 성찰하도록 지혜롭게 대답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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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산 장사를 하는 큰아들과 짚신 장사를 하는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우산을 못 팔게 될 큰아들이 걱정이고, 날씨가 궂으면 짚신을 팔기 어려우니 작은아들이 걱정입니다. 날씨가 맑거나 궂거나, 어머니는 그래서 늘 걱정입니다. 이것을 두고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면 전혀 상황이 달라집니다. 날씨가 맑으면 작은아들 때문에 즐겁고, 비가 오면 큰아들 때문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양도 논법’으로 대응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세상에서 온 것인지 대답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믿지 않는 그들 자신이 문제가 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으로 도리어 궁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곤혹스럽게 하시려고 이렇게 응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세례자 요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진리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궁지로 몰리는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맑은 날은 짚신을 팔고, 비가 오면 우산을 팔면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펴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주님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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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명하게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삶이 그러한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시원하게 말해 주는 이도 드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남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타인의 허물에 너그러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이 곧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힘이 함께합니다. 이렇듯 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삶이 두렵게 느껴진다면 누군가에게 너그럽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부족함을 들추는 건 참으로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행동을 지혜로 간주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상처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남의 상처를 감싸 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베풀면 곱절로 되돌아옵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깊은 산중에 할아버지 혼자서 외롭게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어서 삶이 무척이나 외로웠지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곰과 친구가 되어 둘은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그들은 함께 등산을 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곰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는 너무나 힘이 들었지요. 할아버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곰은 점점 멀리 쳐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합시다. 빠다킹신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와 예수님
-박영봉 신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대를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독서> : 지혜를 통해 참된 삶의 길을 걷는 구도자 -김종규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떠들썩하게 하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 일이 쉽게 넘어갈 단순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오늘 예수님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하셨냐며 따집니다. -도희찬신부-
권한 행사 -김귀웅신부- 권한이라고 하면 먼저 공무원들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들이 가진 권한이 무척 무서웠습니다. 하다못해 집을 짓는 건축 허가를 받는 데에도 뒷돈을 집어주어야 했고, 그 허가를 조금 빨리 받게 해달라고 또 돈을 집어주고. 이렇게 권한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권한을 개인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했지요. 무엇인가를 하고, 또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권한은 모름지기 그 일에 대한 이해당사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 즉 공동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앉아서 좀 쉬든지 아니면 나무에 기대서 낮잠 좀 주무세요.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제가 옆에서 지켜 드릴게요.”
이러한 배려에 할아버지는 감동을 했지요. 그리고는 큰 나무에 기댄 채 잠깐 눈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곰은 충직하게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지켰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파리 한 마리가 할아버지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콧잔등에 앉았습니다. 곰은 재빨리 뛰어와서 손을 저어 파리를 쫓았지요. 하지만 파리는 잠시 뒤 또 다시 날아와서 할아버지의 얼굴에 앉은 것입니다. 곰은 할아버지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자신의 큰 손바닥을 들어 숨죽인 채 쭈그리고 앉아 생각했습니다.
‘이 못된 파리, 내 기필코 혼내주고 말 테다.’
곰은 할아버지의 볼에 앉은 파리를 잘 조준해서 있는 힘껏 손바닥을 내리쳤습니다. 그 결과 파리는 죽었지요. 하지만 그 손바닥에 맞은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곰은 할아버지를 위한다고 행한 행동이지만, 이러한 행동이 절대로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 될 수 없겠지요. 따라서 아무리 선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자립심을 길러주기 위해서 풀뽑기나 청소 같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자주 웃지못할 일들이 생기곤 해요. 글쎄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빗자루와 호미를 들고 아이들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이를 위한다고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들이 하겠다는 것이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분명한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이 행동이 꼭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의 실천이 우리들의 삶 안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틀리고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또한 숫자상으로도 자신들이 훨씬 많으니 예수님과의 언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었지요. 바로 자신들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말을 바꿔버리는 그들이 결코 진리 자체이시며, 사랑 가득하신 주님의 진실성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 정말로 그들을 위한 사랑이었는지를 잘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나만을 위한 사랑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이기심을 이제는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히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태도가
하느님의 태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고
말합니다.?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며,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요구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판단하게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 했고, ‘완고한’ 불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 ‘위로부터 새로 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했을 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규봉 신부
참다운 지혜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백방으로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해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참다운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느님께 간구해야한다.
오늘 집회서는 참된 지혜를 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얻기 위하여 지성소 앞에까지 나아가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지혜를 구한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지혜가 꽃 피움으로써 기쁨을 누렸다. 그는 지혜를 통하여 많은 가르침을 얻고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지혜를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지혜를 실천하고 선을 추구하고, 지혜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
‘참 삶의 길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질 때, 인간 스스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라는 대답도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또다시 부딪히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행복은 비례할 것이므로, 굳이 행복을 위해 사는 것도 삶의 의미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 목적 등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는 결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지혜도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답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실 수밖에 없고,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답에도 만족할 수 없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고,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
오늘 독서 집회서의 구도자는 젊어서부터 삶의 지혜를 백방으로 구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심을 알고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지혜를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의 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함으로써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었다.
오늘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인터넷에는 자살동호회까지 생길 정도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목숨을 끊기 위한 모임을 만든다. 삶의 의미와 보람, 삶의 당위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까닭이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고, 인간 이성을 통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하느님을 배제한 결과이다.
하느님을 잃으면 사람도 잃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시키면 삶의 의미나 보람이 없어진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의 숨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삶의 참다운 지혜를 얻고, 삶의 의미와 보람,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참된 구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길을 걷는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얻는다. 그는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선을 행하고 지혜를 실천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그는 인생의 참된 의미와 보람을 찾고, 삶의 힘과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 참된 구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이 되자............◆
그들의 따짐에 예수님은 도리어 반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의 권한으로 하는 것이냐?”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신께서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의 원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권한으로 그와 모든 일을 하는 것임에도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무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대답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지 못함을 아시고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신 것입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은 율법의 규정을 잘 이해하고 따르기에, 다른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고 이끌며 그들의 잘못을 판결하는 모든 권한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에서부터 났고,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기에 모든 권한은 당신 자신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당신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라 늘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 위에 서있고 그리하여 그들의 모습 안에서 윤리적인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와 세상 사람들을 위한 자기 희생일 뿐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말씀과 그 진리의 참 빛이 드러내기 위한 당신의 온전한 희생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한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고귀한 사명을 지닌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한 또한 지닌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고귀한 사명,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란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며, 예수님처럼 세상의 불신과 불의에 맞서서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 믿음 안에서 바로 구원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생각하고, 사람의 고귀함과 진정한 아름다움과 참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끊임없는 말씀과 그 삶 안에서 머무르고자 하며, 또한 거기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찾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바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 그리고 주님의 주시는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여러 자리와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런 자리와 위치에서 자신의 권한을 가지게 되고 그 권한을 사용하면서 권위를 얻고 싶어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직장의 한 책임자로, 어떤 모임이나 단체에서 등등 많은 곳에서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그 속에서 권위를 얻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도 한편으로 자기 위에 있는 어떤 권한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뭔가를 바꾸라는 또 변화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위로부터 영향을 받는 권한 속에 살아가고 또 아래로 행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환경 속에 사랑가는 삶에서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가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위의 권한에 구애를 받을 때 또 자신이 권한을 행사할 때 도덕이나, 윤리, 전통, 관습 등등을 기준으로 삼을 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의 이익, 편리, 이해관계, 기득권 등등 이기적인 면을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먼저 꼭 한 가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게 뭔가 하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성전을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답게 만드신 주님의 행동을 유대인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 이익을 두고 왜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어디서 그런 권한을 얻었느냐고 따집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직접 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들며 신앙의 참된 자세에 대해 일깨움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한에 따라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변화되고,
또 공동체를 하느님께로 이끌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져야 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게십니다.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기준을 삼느냐에 따라 신앙인인가 아닌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앙인 답게 생활해야 겠습니다.
권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이들에 대한 봉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내 고유 권한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했나 생각해봅니다. 신부로서 가장 큰 권한은 성체성사를 이루는 권한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이 엄청난 권한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사용했는지. “이를 행하여라”라고 명하셨기에 당신처럼 몸과 피를 내어놓는 권한을 가졌는데 그 권한을 행사했는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늘나라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한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그 권한을 사용했는가?
아픈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피곤하다고, 다른 일이 있다고 상담을 꺼리며 권한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제2의 그리스도로서 자비로운 예수님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손을 얼마나 따뜻하게 잡아주었는가?
하늘 같은 마음으로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대에게
지금 우리 성당 앞뜰에는 갖가지 장미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향기롭게 피어있고 느티나무는 늠름하고 푸른 자태를 자랑하며 큰 그늘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저는 장미꽃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누구의 권한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꽃을 피우느냐?
누가 너에게 권한을 주어서 그토록 향기로우냐?”
장미는 대답이 없고 그냥 향기로울 뿐입니다.
느티나무에게도 물어 봅니다.
“너는 누구의 권한으로 이렇게 늠름하고 푸르냐?
누구의 권한으로 이토록 큰 그늘을 드리우느냐?”
느티나무도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하늘 향해 푸른 가지를 펼치고 서있을 뿐입니다.
내 가슴이 태양처럼 밝고 따듯하면 태양이 밝게 빛난다고 시비 걸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맑고 푸르면 하늘이 높고 푸르다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은
장미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모습이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늠름한 사람은
느티나무가 푸르고 늠름하다고 투정부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슴을 들여다보십시오.
당신의 눈에 남편과 아내,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보입니까?
찬란하게 빛나는 오월의 태양이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一明)
우리말에 ‘겁 많은 개가 더 크게 짖는다’는 말이 있다.
-정복례 수녀 -
◆대사제 일행이 오늘 예수께 던진 이 질문은 오히려 예수께서 던져야 할 질문이리라.“너희는 무슨 권한으로 내 아버지 집을 이렇게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내 아버지 집을 잘 돌보라고 너희들을 대사제요, 율법학자로 세우고 합법적인 권한을 주었건만, 어찌하여 너희들 잇속만 챙기고 성전을 난장판이 되도록 방치하느냐?” 이렇게 다그칠 만한 사태이다. 대사제 일행이 예수께 던진 질문에서 이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죄게 할 작정 입니까?”(요한 10,24)
우리말에 ‘겁 많은 개가 더 크게 짖는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보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전전긍긍한다. 그들이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가? 정의에 불타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권한을 남용한 것이 드러날까 봐 그러는 것일까?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 들은 성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합법적인 권한도 받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눈에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작업이 불한당의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고작해야 갈릴래아 시골 청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자가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될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듯 당신은 하느님께 권능을 받았다. (요한 6,27)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에는 대사제 일당이야말로 합법적인 권한을 부당하게 남용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 들이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집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집을 사고 파는 장터로, 돈을 거래하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킨 대사제 일당을 묵과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중되는 또 다른 부담은 백성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며 그를 위대한 예언자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예수님과 대사제 일당 사이에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이 그 권한을 남용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에게 돌아간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돌아본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양승국신부-
<좋습니다. 아버지!>
아직도 갈 길이 먼 제 자신의 모습, 제 한계, 제 비참한 실상을 수시로 확인하며 스스로를 용납 못하는 제게 한 위대한 영적스승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군요.
“내가 지체장애인라면 지체장애인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늘이 우중충하면 우중충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늙었다면 늙은 그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그대로, 내 주변 그대로,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내게 제시하시는 신비로운 요구이자,
내게서 응답을 기다리시는 부름이다.
거름더미 위에 주저앉아 날을 보내야 했던 욥의 눈뜨고 못 볼 처지도
하느님께로부터 온 요구였을 것이다.
<우리 아들은 소아마비입니다.>
<우리 마누라는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는 여편네올시다.>
<저는 타고난 돌대가리인걸요.>
<친구들이 도무지 날 몰라준 단 말입니다.>
이 모든 한탄이 실은 영원으로부터 나를 기다리다 드디어 내게 닥쳤고,
그래서 나는 그 처지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요구가 아닐까?
장애인 아들을 수용소에 버릴 수는 없다.
아내를 바꿔칠 수도 없는 일이다.
알콜중독에 걸린 아버지를 저주할 수도 없는 것이고,
윗사람의 멱살을 잡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를 둘러싼 상황을 받아들이며, 현실을 하느님이 제시하신 요구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좋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서 현실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카를로 카레토,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바오로딸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성전정화를 끝낸 예수님께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정답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한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그 모든 일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면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 나오려니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즉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 심사숙고할 시간을 주십니다. 그들 스스로 한번 깨우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종속되었던 예수님, 아버지의 품을 단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예수님이셨기에 가장 자유로운 삶, 거침없던 삶, 올곧은 삶을 끝까지 영위할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모든 일상사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는 일, 우리가 수시로 겪는 시련들 안에서 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 매사를 아버지와 연관시키는 일,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 일은 진정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 삶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비참한 우리 인간조건, 지루한 일상, 끝도 없는 괴로움, 그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현존하시며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결국 구원된다는 것은 그런 갖은 고통으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기보다는 그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유혹 중에 큰 유혹이 내가 뭔가 한번 해보고 싶은 유혹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 능력으로, 내 사람들과 함께 크게 한건 이뤄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내 영역을 확보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보란 듯이 내 이름을 날려보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라도 뭔가 권한이 주어진다면, 역할과 책임이 주어진다면, 영역이 확보된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쓰라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유 다의 지도급 인사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과 논쟁하신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 들은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 런 일을 합니까 ?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을 합니까 ?"(28절)의 '이런 일'이란 성전정화사건이다.
그러나 본 뜻은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그리스도교계의 주장에 대해
유다교의 지도자들이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즉 합법적인 근거의 제 시를 요구하여 그 답변에 따라 예수님을 반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혜 롭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을 당황케 하신다.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하늘에서 권한을 받은 것이냐 ?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냐 ?"(30절).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에게 허점을 찌른 질문 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을 해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무시하였다는 증거이며,
사람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참된 예언자로 생각하는 군중들의 항의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모르겠습니다"(33절)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도 그들의 위선적 태도에 대해 '대화의 단절'을 선언하신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33절).
진정한 신앙보다 자신들의 우월감 과 홀로 잘 살고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예수께서는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 앙의 자세를 확실히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랑 을 실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 을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유다인들처럼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이 명하신 계명과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닮기 위하여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세상을 변 화시키고, 또한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지혜를 가 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지혜롭게 되는 것은 인 간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어 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답하시면서 유다인들을 당황케 하시는 것은 당신 안에
항상 성령과 함께 하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맺으신 '관계'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즉 하 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인 성령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지혜 자체 이신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정 사랑의 관계를 가진다면 우리도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지혜는 하느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사랑의 관계를 통하 여 우리도 드러낼 수 있다.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시비거느라고 행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성바오로 수도회 수사님들의 말씀 묵상
사람에 대해 믿음과 신뢰를 주지않고
시비를 걸때는
그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떻게해서라도 시비를 걸겠다는 악한 마음이 앞서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비록 중요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고싶은 것만 보게되어 있고,
듣고싶은 것만 듣게되어 있다.
사람은 그만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오늘 울법학자와 대사제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러했다.
하도 이들이 왜곡된 비판을 하므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도 예수님을 칭찬하고
본인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끝내 그것을 결정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
자신의 야망과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기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서, 또 교회에서는 쉬임없이
인생은 순례자의 삶이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우리의 참평화와 행복은 우리의 기득권에 있지않다고 말이다.
우리의 삶은 순례하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편히 쉴곳은 이세상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안에 쉴때만이 가장 또 영원토록 평안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자리에 눌러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어떤 성공이나 열매 등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쉬임없이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나는 세상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보고
나는 쉬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았다면
당연히 나의 입에서는 찬미가 나와야 하고,
비참한 현실에 봉착하게되면
당연히 나의 입에서는 구세주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말이 나와야 한다.
시기질투하느라고,
시비를 거느라고,
불평을 하느라고
경직되거나 위축된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시비거느라고 바쁜것을 볼 수 있다.
영원한 행복을 놓치는 순간인 것이다.
나또한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예수님을 못알아보고 영접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박상대 신부-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고,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입니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정화사건을 말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렇듯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이 듭니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