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범은 흉탄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하늘의 벼슬)으로 멀리 갔네/
가련한 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늙은 앉은뱅이)/
여섯 해 동안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이 시는 심산 김창숙 (1879~1962) 선생이 병상에서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며 쓴 시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5)이 단행되자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으로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시작으로
1960년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운동사 중심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 평생을 겨레를 위한 저항정신으로 살다간 심산 김창숙 선생(독립기념관 제공)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 명의 뜻을 모아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해방이 되기까지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독립, 통일, 민주화 운동을 통틀어
심산 김창숙 선생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는 평을 받을 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일관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두 아들을 바치고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앉은뱅이가 되어 누울 집 한 칸도 없이 외롭게 생을 마감합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기승을 부릴 무렵 효창원에 묻힌 김구, 이동녕, 윤봉길, 이봉창 등
일곱 열사 무덤을 파헤치려는 만행을 목전에 둔 선생은 270명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선두에 서서 공병대의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 이들의 만행을 저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불의에 저항하여 수많은 투쟁을 해온 심산 선생은 투쟁에서 얻은 성과는 효창원뿐이라고 했지만,
선생이 아니었으면 불도저의 굉음 소리에 선열들의 무덤도 온전하지 못할뻔했지요.
142년 전인 1879년 오늘(8월 27일)은 김창숙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