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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묵상글 ( 주님 승천 대축일. -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등 )
** 23:55. 이수철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김혜윤 수녀님, 김명겸 신부님 글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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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 하나 남김없이 쏟으신
아니 당신을 송두리째 내던지신
이 땅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 갈릴래아에서
당신 마지막 모습 보여주시며
어딘가 또 다른 고통의 땅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리라는 희망 주시고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의 빈자리를
우리로 하여금 가득 채우시고
미련 없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걱정 없는 환한 웃음 지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우리조차 믿을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귀한 자리에 앉히시고
이제 또 하나의 당신이 되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살리는
복음의 기쁨을 널리 전하고
탐욕과 경쟁과 폭력을 조장하는
악의 무리를 쫓아내어
더불어 함께 사는 새 세상을 열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드러내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태초에 하나였던 하늘과 땅을
우상 숭배에 젖은 불의한 사람들이
애써 처참하게 갈라놓은 하늘과 땅을
다시 하나로 곱게 아우르시려고
이 땅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오르심으로써 더 깊이 내려오시고자
떨어지심으로써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자
희미해지심으로써 더 뚜렷이 보여주시고자
우리를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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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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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주님 승천 대축일
(사랑하는 이가 있는 그곳이)
http://www.ofmkorea.org/526821
22년 주님 승천 대축일
(땅에서 하늘을 살자!)
http://www.ofmkorea.org/489523
21년 주님 승천 대축일
(희망은 하늘에 사랑은 땅에)
http://www.ofmkorea.org/407587
20년 주님 승천 대축일
(승천은 파견이다.)
http://www.ofmkorea.org/354101
19년 주님 승천 대축일
(우선은 세상으로, 다음에 하늘로)
http://www.ofmkorea.org/223458
18년 주님 승천 대축일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앞서 가신 주님)
http://www.ofmkorea.org/122240
17년 주님 승천 대축일
(희망은 하늘에, 사랑은 땅에!)
http://www.ofmkorea.org/104268
16년 주님 승천 대축일
(하늘을 보았으면 세상으로 나아가라!)
15년 주님 승천 대축일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는 복음으로)
14년 주님 승천 대축일
(기도는 하느님께로, 사랑은 세상에로)
13년 주님 승천 대축일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12년 주님 승천 대축일
(승천, 집착 끊기)
10년 주님 승천 대축일
(승천은 위임.)
09년 주님 승천 대축일
(극단적 가정법)
08년 주님 승천 대축일
===위 2022년도 강론글 옮깁니다.================
김레오나르도 2022.05.29 04:41
주님 승천 대축일 - 땅에서 하늘을 살자!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 본기도는 둘중의 하나 선택해 읽도록 되어 있는데
올해는 이 본기도들을 가지고 묵상을 해봤습니다.
첫 번째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본기도는 첫 마디로 성자의 승천이 우리를 들어 높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장 질문을 자아냅니다.
성자의 승천은 성자를 들어 높인 것 곧 성자의 영광이지 어찌 우리의 영광인지.
그러나 우리는 이내 그 뜻을 알아챌 수 있지요.
성자의 승천은 성자만이 하늘로 오르심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오르심이고 우리와 함께 오르심이라고.
그렇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셔서 우리를 버려두고 혼자 오르신 게 아니라면
우리를 위해 오르신 것이고, 먼저 오르신 것, 곧 우리를 위해 먼저 오르신 것이고,
그러니 우리를 높이신 것이 맞고 우리는 그 기쁨으로 가득 참이 마땅할 것입니다.
-일체적 관계
사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부터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이는 주님과 우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일체의 관계,
마치 하느님의 관계가 삼위의 일체이듯 성자와 우리도 일체의 관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신비체론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이요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했는데 이처럼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희망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머리이신 주님께서 올라가신 그 하늘에
지체인 우리도 희망을 둬야 함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데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고 그러니 참으로 행복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희망이 있어도 거기에 희망을 둬야 그 희망이 유의미하니
이 축일에 우리는 나의 희망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선사하신 희망이 나의 희망인지 돌아볼 기회입니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희망을 둔 나는 아닌지 말입니다.
두 번째 본기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 구세주이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하늘로 오르셨음을 굳게 믿사오니
저희가 하늘에서 아드님과 함께 길이 살게 하소서."
두 번째 본기도는 하늘에 희망을 두고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길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지금 월피정을 위해 한달에 한 번 오는 홍천 <여기 피정의 집>에 와 있는데
이 집에는 제가 좋아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자!"
그렇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땅에서 하늘을 살아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보다 앞서 가신 주님께서 계신 곳,
먼저 가셔서 우리 자리를 마련하신 곳으로 우리는 가야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궁극적 기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 본기도를
우리는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뿐 아니라 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저보다 연세 높으신 분들은 특히 그리고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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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이폰하면 떠로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입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났다가 애플이 망할 즈음 다시 복귀했습니다. 복귀 후 그가 맨 처음 시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제품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제품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개에 달하던 애플 제품을 전문가용, 일반인용, 최고 사양, 적정 사양으로 분류해서 단 4가지 상품으로 압축했습니다. 이 결정이 다 죽어가던 애플을 살렸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필요한 것이 참 많아 보입니다. 쇼핑몰에 들어가면 정말로 다양한 제품이 있고, 이 제품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유를 늘릴수록 나의 삶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불필요한 것, 아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거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우리입니다. 그 순간 갖고 싶은 욕심, 남보다 많은 것을 가져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서 정말로 필요한 것에 오히려 소홀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어떤 것과 대치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다른 세상 것을 제거하지 못해서 주님을 맨 뒷자리에 놓습니다. 점점 주님과 멀어지면서 자기와 아무런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필요를 분명히 알고 열심히 기도하며 각종 신앙생활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서 주님을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남길 정도로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거해야 할 것은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에게 큰 선물을 표징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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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따뜻하고 지속적인 애착은 상처를 치유한다(조지 베일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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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마르 16,19)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답송>은 승리자이신 하느님께서 환호소리 드높은 가운데 성전에 오르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백성 너희는 손뼉을 쳐라. 기쁜 소리 드높이 주님 부르라. ~노래하라, 노래하라, 하느님께 노래하라,
고를 타며 우리 왕께 노래를 불러라.”(시편 46,2-7)
이처럼,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나시지만, 영광을 입으시어 왕으로서 성부 곁에 좌정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이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승천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승천을 암시해줍니다. 이에 관해 레오 교종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를 위한 고양이요, 앞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자리하신 거기에는 그 지체인 우리를 위한 희망이 있다. ~오늘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확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간 것이다.”(예수승천강론)
이에 관해서, <본기도>도 다음과 같이 경탄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우리의 성장이 촉진되며, 또한 머리이시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올라가신 그곳으로 지체인 우리 희망도 따르오니,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에 용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게 하소서.”
또한, 이를 <감사송>에서는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 되신 주 예수, 죄와 죽음의 승리자로 개선하시어~우리의 으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어, 앞서 가시면서 당신 지체들인 우리도 당신이 가신 데로 따라가게 하셨나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광 중에 천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한편, <제1독서>는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이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8-23)
그리고 <복음>의 <첫째 장면>은 “복음전파”의 사명과 그에 따른 표징을, <둘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셋째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의 복음전파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단지 복음 선포의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따르게 될 표징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는 새 창조로서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은 사물들의 질서 전체를 전복시키는 힘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게 되고, 창조의 구조자체를 새로운 관계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심으로써 취하신 왕권과 권능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통치와 권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 1,20-22)
<셋째 장면>에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명령에 순명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특별히 승천과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의 참된 목적이 바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능을 복음 선포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실현시키게 됩니다.
이처럼, 승천은 주님께서 멀리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심임을 말해줍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때와 시간의 제약 없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바로 그분의 동행으로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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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별만은 말아줘요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고 이제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그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 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주님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생명,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와 죽음이 놓여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랐는데 믿는 이들이 대표격인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았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서 악한 영들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으면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을 흉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를 잡고 험담하는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르코복음 8,3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뒷담화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뜬 만큼, 귀가 열리면 열린 만큼 새로운 언어로 듣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혹거리가 많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해를 입히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 다양한 여건들이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아무리 우리를 해치는 말을 들어도, 또 유혹하는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나 독을 마시지 않으려고 외부 환경을 고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독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손으로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새기며 실천하고, 미사 안에서 영성체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영적인 병을 앓는 것입니다.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는 환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명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는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보약 중의 보약입니다. 이 보약은 어떤 중병도 치유합니다. 이 보약을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노력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천상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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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번 성지순례 갈 때입니다. 가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할 체크에 미리 사인을 해 놓았습니다. 사무장님이 30장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사제관에는 보름정도 자리를 비우니 빨래를 미리 해 놓았습니다. 쓰레기도 모두 치웠습니다. 사제관 청소를 하는 날은 부주임 신부님께 문을 열어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도 대충 정리했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출장을 갈 때면 비슷하게 준비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사무실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체크에 사인하고, 서류 결재하고, 원고 교정보고, 냉장고도 정리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도, 출장도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없어도 직원들이 성당과 사무실을 잘 지켜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메일이나 문자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없을 때, 오히려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켜준 직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휴가를 가시면 가능하면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많이 잡지 않았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저를 믿고 휴가를 가셨기 때문입니다. 평일미사 2번과 주일미사 4번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오시면 기뻤습니다. 업무가 줄어서가 아니라, 본당 신부님의 자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절망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고야 믿겠다는 토마 사도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 해 주셨을 때 가슴이 떨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협조자,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고 ‘승천’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보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없을 때, 직원들이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키고, 일을 했던 것처럼, 제가 본당 신부님이 안 계실 때, 자리를 잘 지켰던 것처럼, 제자들은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렇습니다. 직원들에게 제가 성지순례를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출장 가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오늘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많은 벌과 나비는 꽃이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향기를 따라서 꽃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가 된다면, 우리의 발과 손이 주님을 전하는 발과 손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교회를 찾아 올 것입니다. 바다로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것은 바다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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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금은 핸드폰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핸드폰 전에 시티폰이라도 있었는데, 여러분 아시나요? 삐삐는요? 그전에는 유선 전화였습니다.
유선 전화의 단점은 이동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언제나 그 자리에서만 받고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편하지요.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주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느님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세상에 오신 것과 반대로 하늘로 돌아가십니다. 왜 올라가셨을까요? 답은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실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믿고, 기도하고 그분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더 이상 함께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 혼자서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일으켜 믿음을 키우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다 다닐 수 없기에 모든 곳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돌아다닙니다.
꼭, 유선 전화를 쓰다가 핸드폰을 쓰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안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승천이란 말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승천은 예전 주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모든 곳에 계셨던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계신다는 이야기이지요.
우리는 모든 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 어디서나, 그리고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에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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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수록 늘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입니다.
하나를 넣으면 두 개가 되어 나오는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두 개를 넣으면 네 개가 되어 나왔습니다.
착한 사람에게 이 항아리는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물론….
이렇게 끝났다면 동화는 건조하게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화 안에는 이런 항아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의 욕심으로 항아리가 바다 깊숙이 빠졌다는 슬픈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짜다나 어쨌다나….^^
그런데 이렇게 넣으면 두 개가 되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쓸수록 늘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절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사랑은 쓰면 쓸수록 늘어납니다.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며 더욱 커지는 것이 친절이고 사랑입니다.
친절하세요.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사랑하세요. 그 역시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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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하늘만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도 마음은 저 높은 하늘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세상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고 때로는 본인이 심판자인양 비판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반면, 이 세상의 삶만 믿기에 세상의 물질적 가치만을 중요시합니다. 물론 이 두 극단적 견해는 위험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통해 하늘과 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주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 외에 또 다른 세상이 있고, 지금의 삶 외에 또 다른 삶이 있으며, 세상의 가치 외에 또 다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가치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인간이 신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 그 곳은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천국이 있기에 죽음이 숙명인 동물과 다릅니다. 인간은 운명을 극복하고 발전하며 신이 계신 하늘나라까지 올라가기 위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천국은 바로 이 땅에서부터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 말은 곧, 하늘을 보지 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에게 맡겨 진 일을 완수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곧, 이 세상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임무를 완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 사명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 세상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하늘나라 건설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행복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늘만 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하늘나라를 사랑한다면 지금 이 세상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되도록 이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주님, 하늘 나라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늘 나라를 진정 믿고 있습니까?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2. 주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3. 주님 승천주일을 보내며 주님께 무엇을 청하였습니까? 무엇을 실천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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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승천의 충만한 삶
-사랑의 정주와 지혜의 선교-
“알렐루야, 하늘에 오르시는 주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새벽성무일도시 초대송을 부르며, 새삼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늘 본향에로의 하늘길이자 하늘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늘이기에 예전 하늘같지가 않습니다. 승천의 삶이 상징하는바 영원한 삶이요 충만한 삶이요 우리의 미래이자 현재진행형중인 복된 삶입니다.
방금 부른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중 시편 화답송 후렴의 가사와 곡도 참 흥겹고 좋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는 기도로 흥얼흥얼 부르시면 마음도 저절로 하늘 위로 고양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시편 노래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영약은 없습니다.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시편47,6)
또 오늘은 제58차 홍보주일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는 인공지능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지혜를 힘껏 발휘하라 하셨고, 복음선포 사명시 필히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만 나눕니다.
“우리 인류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혜를 구합시다. 지혜는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였고, 깨끗한 마음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듭니다. 지혜는 우리가 인공지능 체계를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봉사하도록 이끄는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우리의 방향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이신,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뿐입니다. 어제 잘 아는 친지로부터 받아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비의 약은 마음에 있다며, 건강 식품보다 훨씬 효능이 좋지만, 팔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신비의 약이랍니다.
1.웃으십시오.
웃으면 나오는 ‘엔도로핀’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줍니다.
2.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나오는 ‘세로토닌’은 우울함을 없애줍니다.
3.운동하십시오.
운동하면 나오는 ‘멜라토닌’은 불면증을 없애줍니다.
4.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나오는 ‘도파민’은 혈액순환에 좋습니다.
5.감동하십시오.
감동하면 나오는 ‘다이돌핀’은 만병통치약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새삼 웃음, 감사, 운동, 사랑, 감동 역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자발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또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녀의 자질을 탓하기 전에 가르침이 온전했는지를 돌아보라. 탐스러운 열매뒤에는 꽃의 만개를 기다려준 어른이 있다.”<다산>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큽니다. 무엇보다 어른의 모범적 삶이, 우리로 하면 하느님 중심에 충실한 수행의 모범이 참으로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늘 보고 배울 삶의 모범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요 바로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제대로 키움을 얻는다면 자라지 못할 것이 없고, 키움을 얻지 못하면 소멸해버리지 않는 것이 없다.”<맹자>
모든 내외적 자원을 최대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합류시켜 영적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함을 배웁니다.
결론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땅에서도 하늘향한 승천의 여정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의 원천이 되고 영적승리의 비결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하늘 향한 승천의 여정에 충실할 때 영원한 삶, 충만한 삶이요, 위의 5가지 신비의 약은 저절로 선물처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때 부른 찬미가 1-2절도 참 좋았습니다. 6절까지 내용도 참 풍부하고 깊어 우리의 내면을 풍부하게 합니다.
“모든이 갈망하던날 거룩히 빛나는 도다
세상의 희망인 예수 하늘에 오르시었네.
싸움에 이기신 주님 개선가 높이읊으며
승리한 거룩한 모습 성부께 나아가시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은 평생 삶의 요약이자 결론입니다. 평생을 하루하루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영적전투의 삶에 승리한 결과가 오늘의 영광스러운 하늘로의 승천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승천의 여정, 승천의 삶에 충실함이 지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늘은 전혀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절대적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하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이 뜻하는 것은 예수님은 전적으로,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 꽃자리가 하느님 계신 하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넋놓고 하늘로 오르시는 당신을 보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파스카 주님은 오늘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니 바로 여기가 하늘입니다. 언젠가 나눴던 ‘민들레꽃’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우리 삶의 자리, 꽃자리가 바로 하늘입니다. 바로 승천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은 그대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제자들이, 교회의 성인성녀들이 바로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살았습니다. 내 삶의 더불어의 정주의 꽃자리는 세상의 중심이자 교회요 선교의 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내 삶의 꽃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동시에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심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에페소서에서 소개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웅장한지요! 한 문장처럼 단숨에 읽혀지는 참 깊고 풍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교회 꽃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주 역사를 총괄하시는 주님께서 겸손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의 스승이자 도반이 되시어 함께 하시는데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두렵고 무서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이런 우주적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몸인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시어 끊임없는 깨달음과 더불어 치유, 그리고 영적승리의 삶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니 참으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존엄한 인간 품위의 승천의 삶을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새삼 승천의 여정중에 이런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와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주심으로 승천의 여정중 사랑의 정주와 지혜의 선교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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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부활시기 마지막 주간이자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날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기 까지 당신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몸소 보여주시며 하늘에 오르는 결과를 보지 말고 오르기 까지 당신과 같은 과정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는 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승천은 하늘을 보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땅을 잊지 않게 하고 밝은 해를 바라보면서도 자신 뒤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도 같이 바라보게 합니다. 위를 바라보기 전에 아래를 바라보고 밝음을 바라보기 전에 어둠을 직시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을 숙고함 없이 자아인식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또 자신의 내면의 어둠과 대면하지 않은 채 오로지 명상과 신비에만 관심을 두고 위로만 오르려 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겸허한 자기 성찰과 진실한 자기인식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하느님 앞에서 더 낫게 보이려고 높은 것, 위에 있는 것을 보기 이전에 나의 현실 속에 내려와 나의 약함과 무능함을 바라볼 때 비로소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하늘 길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넘어진 그곳,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그곳,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체험할 바로 그곳이 하늘에 오르는 발판이 되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진솔한 자기 만남이 곧 참된 하느님 만남의 조건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일상에서 다가오는 괴로움, 근심, 걱정, 불안은 가시밭길이며 고통의 길이지만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반드시 지나가야할 길이며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지 못하듯 우리의 영혼도 고통과 시련으로 단련 받지 않으면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싱싱하고 아름다운 야자나무를 보고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는 그 나무의 성장을 막기 위해 꼭대기에 커다란 돌을 얹어 놓았습니다. 수년 후에 야자나무는 오히려 주위에 있는 다른 어느 나무보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더 높이 치솟으며 자라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돌이 오히려 성장을 촉진시키듯이 일상안에서 만나는 유혹과 시련 그리고 고통이 하느님 안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하고 더욱더 하느님을 향해 영혼을 높이 들어 올리게 합니다.
겸손한 영혼은 하느님께서 친히 들어 높여 올리십니다. 교만은 자기를 자기 이상형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실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교만을 품고 있을 때 사람은 허상의 세계로 높이 솟아 올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겸손은 하느님의 영안에 사는 삶인지를 알아보게하는 기준이며 신앙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기초 입니다. 겸손없이는 하느님을 자신을 위한 하느님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뵙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직감력을 발전시키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겸손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영혼이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 올리질수록 더욱 겸손의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겸허히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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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스테르담(Amsterdam)의 기적
네덜란드 - 1345년
성당이 커다란 불길에 휩싸였을 때, 몇몇의 용감한 남자들이 성광에 보관되어 있는 기적을 일으킨 성체를 구하기 위하여 감실의 문을 부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성냥개비처럼 부쉬졌고 다가오는 불길 때문에 그 용감한 남자들은 피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나무로 지어진 성당과 감실은 격렬한 불길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시련을 겪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다. 그들은 불길이 잡힌 후에 갯더미 속에서 수백 년간 보관되면서 공경을 받아온 그 성체를 찾아냈던 것이다. 또한 성광과 섬지어 성체를 싸고 있었던 성체포도 흠 하나없이 완전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1578년 칼빈주의가 네덜란드로 밀려들어와 국내의 모든 가톨릭 교회의 성명(聲明) 발표가 금지되었을 때까지 이 성지로의 행렬과 순례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성체를 경배하는 것까지 네델란드 국민들의 마음에서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첫 번째 종교박해가 끝났을 때 그 성스러운 성체를 공경하기 위한 축제가 새로이 거행되었다. 하지만 1645년에는 이 기적을 기념하는 300주년 기념 축제가 매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심지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강토가 히틀러에 의해 짓밟혔을 때에도 그 성체 기적의 기념일 밤에는 조용히 기도를 드리며 “그 성지”로 속죄의 행렬을 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오늘날에는 다시 암스테르담의 가톨릭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며 성스러운 기적의 성체께로 순례를 한다.
성체는 우리의 영혼이 모든 유혹과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며, 영생으로 이끌어 주는 영혼의 놀라운 양식이다. 성체는 많은 성인성녀의 몸에서 기적을 일으켜서 성인성녀들은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도 넘치는 육신의 힘을 유지한 채 오랫동안 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스위스의 농부 성인 니콜라우스 폰 플류에와 고인이 된 발트해(海)의 엘리자베드 폰 로이테, 그리고 근래에는 노이만 폰 콘너스로이드와 카푸친 수도회의 신부 피오 폰 피에트랄치나와 같은 사람들처럼 말이다.(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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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과 독서는 각각 마르코 복음서의 마무리와 사도행전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책 전체를 요약하는 결정적 부분들을 배치하여,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복음)이 곧 교회의 시작(독서)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당부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 교회의 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상 생활 동안 갈릴래아나 예루살렘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승천하심으로써 그 어떤 시공간에도 매이지 않고 활동하십니다.
이는 복음에서도 분명히 선언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 당신께서 행하시던 일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독서를 포함한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전하여 주는 동시에, 그 교회가 걸은 여정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현존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부재는 언제나 현존과 연결되고, 떠남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현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결코 떠남이나 멀어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인간과 더 깊은 유대와 공존의 관계를 맺으려는 도약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순간순간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현존과 구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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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주님 승천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시고
하느님 오른쪽으로 승천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은
복음의 시작부분에서 말씀하신
당신의 사명과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제자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간다는 것이며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범위가 늘어나서
더 쉽지 않겠지만
더욱이 스승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아서
두려움에 떨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신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승천으로 제자들 곁을
완전히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 곁에 더 머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복음서의 다른 곳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둘씩 짝지어 파견되었고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적었습니다.
둘씩 짝지어 각각 다른 곳으로 갔지만
그들 모두와 예수님께서는
함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에게
손수 도움이 되셨습니다.
승천을 통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되심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하면서
그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어합니다.
이렇듯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영광스럽게 되신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어디에서나
제자들과 함께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온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계시면서
모든 곳에 함께하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하시는 것은
이제 제자들을 넘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가운데로 다시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 각자의 곁으로 다시 오신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억하면서
언제까지나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어려움에 함께하시면서
손수 도움이 되신 것처럼
우리의 어려움에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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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급하게 지방에 내려가 할 일이 있어
이 시간 현재 모은 묵상글을 올립니다.
2024. 00: 15
평화와 선
감사 합니다.
일찍 올려 주시니 더 좋아요
김혜윤 수녀님 매일 미사묵상글도 올려 주실수 있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날마다 영적 양식 보내 주시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평화와 선.
영육 간에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