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생활 30일의 소회)
1. 동병상련의 마음
모두 4명의 여자 환자가 607호실에 입원해 있다.
그 중 제일 오래된 환자는 57세 인데 남편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가다 길에 돌출된 턱에 걸려 전복되면서 두 다리 뼈가 크게 부서져 4번에 걸친 대수술을 하고 4개월 째 누워있고 앞으로 6개월 후에야 퇴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환자이다. 제일 오래 있다 해서 감방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두번 째로 오래된 환자는 70세의 여자 환자인데 건널목 앞에 있다가 지나가는 승용차에 치어 뇌출혈로 6주, 어깨뼈 골절로 7주, 늑골 골절로 4주 등의 부상으로 3주가 지나도록 거동을 하지 못하다가 4주째가 되면서 조금씩 거동하기 시작하는 상태이다.
세번 째 환자는 나이가 74세 되는 환자인데 그 녀는 지나가는 차에 부딪쳐 대퇴부가 골절되어 2주 전 수술한 후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이다.
끝으로 마지막으로 입원한 환자는 80세인데 그 녀는 요양병원에 있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대퇴부가 골절되는 바람에 수술 후 일주 째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4주에 걸쳐 병실에 있는 동안 두 여인이 이 병실에서 퇴원하여 한 여인은 집으로, 또 다른 한 여인은 요양병원으로 갔다.
이들은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고향도, 나이도, 자란 환경도, 가지고 있는 재산도, 종교도, 이념적 성향도 전혀 다르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다만 한 가지 같은 것은 이들이 본인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 순간 생사의 길목에서 구사일생의 경험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자랑 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은 병상에 있는 옆의 사람도 자기와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본인들의 눈으로 보면서 같은 병실의 침대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한 사람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며 서로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통용과 베품의 자리
옛 예루살렘 또는 로마시대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권세자들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기에 이들은 핍박받는 사람들끼리 함께하면서 그 고통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통용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할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2:44-47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곳 607호의 병실에서도 성경속 사도행전에서만 보아오던 옛 통용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다만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핍박 아래에서의 통용이 아니라 뜻하지 아니한 사고로 인한 동병상련의 아픔에서 오는 통용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은 친인척 또는 친우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가감없이 서로 나누어 먹기를 즐거워하며 결코 재산자랑 자식자랑 하는 것이 없다. 서로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할 뿐이다.
심지어 감방장이라는 환자의 남편되는 사람은 4일은 평택에서 화물 운반일을 하다가 3일은 부인 간병을 위해 병원에 와서 간병을 한다. 그는 교회를 나가본 일이 없으면서도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의 발을 따뜻한 물에 담가 묵은 때를 벗겨주며 주물러주고 씻겨 주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행함으로 자랑해야할 소위 기독교인이라 칭하는 나는 그 간병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자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구해 준 사마리아인을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진정 병실에 같이 있는 환자의 이픔을 보면서 그 환자의 발을 씻어주는 그 사람이야 말로 비록 기독교인은 아닐지라도 "아픈 자의 이웃"임이 분명한 것이다. 나는 그 사마리아인과 함께 언급되었던 무늬뿐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에 불과할 뿐이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들
네명의 환자 중 교회를 다니는 한 환자를 위해 목사님이 오시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해주시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환자의 눈과 귀는 그 기도하시는 모습과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기도가 끝날 때 다른 환자들의 눈망울에는 자기를 위해서도 기도 해주기를 바라는 애절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목사님께서 한 사람씩 아픈 부위를 만져 주시며 기도를 해주실 때 그 기도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함 그대로였다. 그들은 교회를 나가보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그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였고, 어떤 환자는 위로의 말씀에 눈물로 화답하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환자는 그 기도를 받고 아픔이 나았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후 그 교회의 한 권사님이 오시어 그 환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 해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권사님이 오실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곤 하였다.
실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 교만할 틈이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복이 있다 하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