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속의 여자
한 사람이 액자 속에 들어갔다. 은빛 억새가 바람에 몸을 흔들고, 그 사이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갈색과 베이지색이 어우러진 옷을 입고 작은 가방을 든 채 웃고 있다. 그 아래에는 ‘길 위의 여자’라는 글이 놓였다. 사진과 글이 한 액자 안에서 마주하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액자 속에 있는 사람도 나이고, 액자 밖에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이도 나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진을 남겼다. 젊은 날의 얼굴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웃던 얼굴도 있고, 여행길에서 낯선 풍경을 바라보던 모습도 있다. 문학 행사에서 글을 읽고, 길을 걷고, 꽃 앞에 서고, 때로는 혼자 먼 곳을 바라보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마다 사진은 한순간을 붙잡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까지 붙잡지는 못했다.
사진 속에서는 웃고 있어도 그날 마음속에 어떤 파도가 지나갔는지는 나만 안다. 환하게 웃던 날에도 외로움이 있었고, 힘겨웠던 날에도 작은 희망 하나는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한 페이지다. 보이는 얼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액자는 순간을 가둔다. 그러나 삶은 액자 밖에서 계속 흐른다. 나는 오래 길을 걸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여행지의 길만은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길, 글을 쓰다가 막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 기쁨과 슬픔을 번갈아 건너는 길이었다. 어떤 길에서는 꽃을 만났고, 어떤 길에서는 비를 맞았다. 잘못 들어선 줄 알았던 길 끝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계획대로 이루어진 날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 경우가 많았다. 우연히 만난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 여행지에서 마주친 노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어와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것들을 글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길은 나의 문학이 되었고, 문학은 다시 나를 길 위에 세웠다.
그래서 ‘길 위의 여자’라는 말이 좋다. 어딘가에 도착한 여자가 아니라 여전히 걷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목적지가 중요했다. 무엇이 되어야 했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했다. 남들보다 늦으면 조급했고, 뒤처지는 것 같으면 마음이 흔들렸다. 인생에도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빨리 찾아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인생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로 풍경을 만나며 걷는 긴 산책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빨리 걸으면 빨리 도착할 수 있지만 천천히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억새도 그렇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 그저 하얀 들판일 뿐이다. 그러나 그 곁에 서 보면 억새마다 표정이 다르다. 햇빛을 받은 것은 은빛으로 반짝이고, 그늘에 선 것은 잿빛으로 깊어진다. 바람이 불면 수천 개의 억새가 한꺼번에 몸을 기울이며 거대한 물결을 만든다.
사람도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계절을 품고 있다. 액자 속 여자의 뒤에도 억새가 가득하다. 나는 그 억새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장미가 좋았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억새가 눈에 들어왔다. 꽃잎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바람이 불면 흔들릴 줄 알고, 흔들린 뒤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좋았다.
세월도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흔들린다.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꿈 때문에 흔들린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이별 앞에서 휘청이고,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 결과 앞에서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은 다시 일어난다. 상처 하나를 가슴에 품고도 밥을 먹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다시 꽃을 보며 웃는다.
예전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니다. 흔들려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억새처럼 말이다. 액자 속 나는 웃고 있다. 그 웃음이 젊은 날의 웃음과 같을 리 없다. 얼굴에는 세월이 지나간 자리가 있고, 마음에도 수많은 계절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웃음이 좋다. 아무것도 몰라서 웃는 것이 아니라 울어 본 뒤에도 웃을 수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잃는 일만은 아니다. 내려놓아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구별하게 되는 일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길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조금 너그러워진다. 나는 한때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세월을 셌다. 어느 날 늘어난 주름 하나, 조금 달라진 얼굴선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을 바꾸었다.
주름은 시간이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시간이 써 놓은 문장인지도 모른다고. 웃어서 생긴 선도 있을 것이고, 걱정하며 깊어진 선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생긴 흔적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굴은 한 사람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자서전이다.
나는 그 자서전을 지우고 싶지 않다. 오히려 앞으로 더 많은 페이지를 쓰고 싶다. 액자 아래의 글을 바라본다. 글은 사진과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붙잡는다. 사진이 한순간의 표정을 남긴다면 글은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평범했던 하루도 글 속에 들어오면 다시 살아난다.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 한 마리,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 비 오는 날의 우산, 시장에서 먹었던 국수 한 그릇도 이야기가 된다. 문학은 거창한 곳에만 있지 않았다. 내가 걸어온 길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여행자가 되었다. 동시에 관찰자가 되었고, 기록자가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모델이 되어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다. 그것 역시 나에게는 또 하나의 표현이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꾸미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어떤 색으로 세상에 보여 줄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젊음만이 아름다움의 조건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인생의 모든 나이에는 저마다의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을이 봄을 흉내 내지 않듯 사람도 지나간 젊음을 흉내 낼 필요가 없다. 가을은 가을이라서 아름답다. 푸른 잎을 내려놓고도 단풍으로 빛나고, 꽃이 진 들판에서도 억새를 피운다. 비워 가면서 오히려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가을이라는 말을 쓸쓸하게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가을은 끝으로 가는 계절이 아니라 한 해가 가장 깊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액자 속 여자를 다시 바라본다. 그녀는 어디까지 걸어왔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디까지 걸어갈까. 나는 답을 모른다. 어쩌면 몰라서 더 좋다. 앞으로 펼쳐질 길을 이미 알고 있다면 삶은 얼마나 심심할까. 모퉁이를 돌아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에 우리는 다시 신발 끈을 묶는다. 내일도 길을 나설 것이다. 어느 날에는 꽃을 만나고, 어느 날에는 낙엽을 밟을 것이다. 어떤 날에는 좋은 문장 하나를 얻고, 어떤 날에는 빈 원고지만 바라보다 하루가 저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걷는다는 것은 늘 무언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는 일이니까.
언젠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이 액자를 바라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오늘의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잘 걸어왔다고. 많이 흔들렸지만 쓰러지지 않았고, 상처받았지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나이를 먹었지만 설렘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내려갔다고.
나는 액자 앞에서 오래 머문다. 액자 속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고, 억새는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정지된 장면인데 이상하게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그제야 알겠다. 액자는 나를 가두는 틀이 아니었다. 지나온 한순간을 잠시 보관해 두는 작은 창이었다. 그 창 너머에는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아직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이 아니다. 오늘도 쓰이고 있는 문장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므로 액자 속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내일을 향해 다시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오는, 여전히 길 위의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