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절 100주년을 하루 앞두고 아직 훈장을 전수받지 못한 울산지역 독립유공자가 모두 11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울산보훈지청은 27일 "훈장을 전수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사업이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이 같이 밝혔다.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사업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에게 국가 차원에서 보답하고 훈장 전수를 통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감시 때문에 후손 상당수가 대를 잇지 못했거나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바람에 후손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국가 보훈처는 현재 전국적으로 독립유공자 5천 714명이 후손을 찾지 못했고 울산에서는 11명이 훈장을 전수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이 전수되지 못한 김기준(1871년생ㆍ포상훈격 애국장) 선생은 1908년 울산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 졌다.
김춘길(1879ㆍ애족장) 선생과 김치일(1867ㆍ애국장) 선생은 김기준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 등을 하다 붙잡혀 각각 종신형과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선일(1880ㆍ애국장) 선생은 1906년부터 이듬해까지 경북 영천지역 의병장인 정용기 선생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돼 순국했다.
장치일(1873ㆍ애족장) 선생은 1908년 경북 영일지역 의병장인 장헌문 선생과 함께 활동하며 군수품을 모으다 붙잡혀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영식(1904ㆍ대통령표창) 선생과 송명진 여사(1902ㆍ대통령표창), 이갑술 여사(1906ㆍ미정)는 1919년 학생 신분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일본군에 붙잡혀 각각 징역형에 처해 졌다.
엄 준(1885ㆍ애국장) 선생은 독립만세운동 당시 태극기 500장을 만들고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대형 깃발을 흔들다 일본군에 의해 사살됐다. 선생은 서거 이후 중구 병영 황방산 기슭에 가매장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시신을 찾지 못했다.
신광재(1886ㆍ애국장) 선생은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에서 의용대장으로 활동하다 병사했다.
윤진오(1884ㆍ건국포장) 선생은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 `공립협회`, 1910년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미주 지역 한인들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며 30여년 간 독립자금 1천 338원50전을 지원했다.
울산보훈지청 관계자는 "훈장을 전수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대부분이 제적등본에 누락된 분들"이라며 "향교나 문화원 측에서 제공한 족보를 통해 후손을 찾는 경우도 있으니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정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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