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는 1978년에는 시골이었다.
앞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5일장이 열렸다.
종로 2가에서 미도파 백화점을 거치고 청량리를 거쳐서 오는 시내버스 종점이었다.
가끔은 종로 2가 학원에서 시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청량리까지 오곤 했다.
그때 신설동 로타리를 지날 때면, 전파사 전축에서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 했었지’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바로 위의 망우리 언니 에게 나를 맡겼다.
불덩이처럼 발갛게 달아 있던 나를 달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이모에게 나를 맡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코뿔소처럼 아무도 말릴 사람 없었던 나를 위로하고 책임질 사람은 이모밖에 없었다는 판단을 했던, 어머니는 현명했다.
묵호에서 도둑질 말고는 나쁜 짓을 다하던 내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머니는 순식간에, 나를 간단한 짐만 챙겨서 망우리 이모에게 보냈다.
묵호에서 패싸움 끝에 큰 사고가 터져서 도망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모 말 잘 듣고, 이모 울거든 잘 달래거라”
어머니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것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밤 마다 이모는 울었다.
단칸방 밖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는데, 이모는 나를 아랫목에 재우고 당신은 추운 문 앞에서 잠을 잤다.
이모의 울음소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종로 2가 학원에 갔다 오면, 이모는 연탄불에 밥을 해서 내 앞에 대령했다.
내가 숟가락을 뜨면 어김없이 반찬을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
이모는 나와 절대 겸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다 먹고 나서야 이모는 남은 밥과 반찬을 처리했다.
그것이 이모의 미덕이었을까.
625때 갓 결혼한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 동네 미루나무에 묶여 총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렇게도 남자를 받드는 이유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결혼하고 두 달 만에 남편이 죽고,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 이종사촌 누나는 간호사가 되어 독일에 가서 한국 남자 광부와 결혼을 했다.
이모는 항상 나에게 딸이 남편을 닮았다고 했다.
누나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의 방황은 이모의 매일 같은 눈물로 잠재워져 갔다.
나의 불만은 이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나를 도왔던 것은, 묵호에서 나의 첫 순결을 주었던, 그녀의 말.
“남 동생 대학 보내야 해요”
그 말이 비수같이 내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온갖 사내들에게 몸을 파는 이유가 고작 그것이라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서울에 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학원에 가면서 오면서, 그녀가 했던 말이 비처럼 서서히 내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모의 울음은 빗물처럼 내 가슴에 흘러내렸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유는 두 여자, 이모와 그녀 때문이었다.
종로2가 학원을 다녔기 때문인지 나는 간신히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