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22
1월1일[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평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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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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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C1JGlRxnZc
[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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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자비가 교차하는 날!>
또다시 새해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또 다시 우리 모두에게 새해 아침을 선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넘치는 은총과 자비에 크게 감사하면서 기쁘게 이 한해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은 눈물겹도록 은혜로운 날입니다. 우리 안에서 낡은 것과 새것이 교대하는 날,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자비가 교차하는 날, 빛나는 얼굴의 내가 죄에 물든 나와 작별하는 날, 분노와 질투의 화신이었던 내가 사랑과 자비의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날, 우리 가톨릭교회는 한 해 동안 본받고 살아갈 모델 한 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분은 나약한 인간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무한한 성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거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영예를 얻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비결은 바로 지극히 겸손한 순명이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군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성모님은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누리게 될 세속적 영예나 특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란 타이틀이 성모님의 신앙 여정에 마이너스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셨기에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오직 메시아를 담아내기 위한 질그릇 같은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았던 성모님의 겸손, 여기에 그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 성모님,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예수님 뒤에서 조용히 서 계시던 성모님,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성모님, 늘 예수님 그늘에 서 계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셨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인류의 어머니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겸손의 덕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덕행이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으뜸가는 덕행입니다. 참된 겸손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을 고백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을 떠나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나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과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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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OCAGZXSq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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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새해 첫날 우리는 구원의 모델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심을 묵상합니다. 사실 누구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이 세상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결합해 태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깃불의 어머니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발전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모든 빛의 원천은 태양입니다. 태양도 빛이라 불리지만, 그 태양이 전깃불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태양의 빛이나 전깃불의 빛은 다 같은 빛이라 우리가 보는 한계 내에서 전깃불의 어머니는 발전소라 해도 됩니다. 빛은 태양이지만, 전깃불의 빛의 어머니는 발전소라 해도 됩니다.
그 발전소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빛을 나으신 일은 없으십니다. 그러나 전기불빛은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그 전기불빛의 한계 내에서는 그 빛의 어머니라 불리실 수 있습니다.
숯불을 생각해봅시다. 내가 숯불을 만들었습니다. 나무와 불을 가져다 한데 모아 숯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나는 숯을 만들지도, 불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둘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둘을 하나로 묶어놓으니 숯불의 어머니는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성모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사람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의 어머니이십니다. 사람과 하느님을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냥 사람이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러면 인성과 신성이 성모님 안에서 결합하였다고 성모님의 공로는 하나도 없을까요? 나무와 불을 다룰 능력을 자녀야 숯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태양을 잘 받아들여 전기로 전환할 줄 알아야 전기불빛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방해하는 것은 실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2021년 12월 30일 「매일미사」 묵상글에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신부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신부님은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 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신부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영성 지도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아니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신부님은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좋은 생각은 그리스도 생각의 반영입니다. 내가 좋은 생각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만큼 내 안에 잉태되십니다. 나쁜 생각을 한다면 지혜이신 그분이 그만큼 내 안에서 자리를 잃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사건을 주님 안에서 묵상하였습니다. 온 정신이 말씀으로 채워져 그분을 낳아 그리스도의 어머니,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목동들의 말을 듣고 “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합니다.
그분의 생각은 온통 좋은 생각들로 가득 차서 우주보다 큰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만큼 큽니다. 다만 우리가 다른 생각들로 우리 생각을 오염시키고 주님께서 들어오실 틈을 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여기 또 하나 순결한 영혼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2015년 11월 13일, 평범한 가장이었던 앙투안 레리스는 파리 바타클랑 극장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으로 아내 헬렌을 잃었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테러범들을 향해 편지를 썼는데, 페이스북에 게재된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 당신들은 특별한 생명을, 내 일생의 사랑을, 내 아들의 엄마를 앗아갔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분노하지 않겠다. 나는 당신들이 누군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당신들은 죽은 영혼일 뿐이다. 나는 내 분노를 당신들에게 선물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분노하고 증오하는 것은 당신들과 똑같이 무지에 굴복하는 것일 테니.
내가 두려워하고, 같은 나라의 국문들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안전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기를 바라겠지만, 당신들은 실패했다.
물론 나는 애통함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이 작은 승리는 당신들에게 양보하겠다. 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아내가 매일 우리와 함께할 것이며, 당신들은 결코 갈 수 없을 자유로운 영혼들이 있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들과 나, 우리는 두 사람뿐이지만 이 세상의 어떤 군대보다도 강하다. 더 이상 당신들에게 쏟을 시간이 없다. 낮잠에서 깨어난 아들 멜빌에게 가봐야 한다. 우리는 평소처럼 함께 놀 것이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는 평생 동안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 당신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이 아이의 분노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든 생각들은 뱀과의 대화입니다. 그 주제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광야에 나와 단식하며 기도하는 게 제일입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도 단식 중이었고 전날부터 머릿속에는 하루 동안 먹을 유일한 것, 곧 새벽 미사 때 모시게 될 성체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이 잉태되고 말씀을 전하며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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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福)’라는 한자의 어원을 생각해 봅니다. 하늘에 의해서 배가 부른 것을 상징합니다. 중국의 고대에는 장수를 누림(壽), 가멸함(富), 건강하고 마음 편안함(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임종을 성취함(考終命)을 다섯 가지 복(五福)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치아가 좋은 것, 자손이 많은 것, 부부 해로하는 것, 손님을 대접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 명당에 묻히는 것을 다섯 가지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당 신부에게도 다섯 가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 사람과 관련된 복입니다. 보좌 신부님 잘 만나고, 본당 수녀님 잘 만나고, 사목회장 잘 만나고, 사무장 잘 만나고, 주방 자매님 잘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생활 5년째인 저도 5복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고민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을 주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신문사 직원을 주셨습니다. ME와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주셨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지난 5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24년에는 제가 받은 복을 기쁘게 나누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을 나누면 더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늘 깨어 지키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면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만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이 세상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은 이 세상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완성되는 복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시련도, 박해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한 이들을 복자(福者)로 공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한 이들을 성인(聖人)으로 공경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더 커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받는 복은 우리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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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6-21: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부터 이날을 세계 평화의날로 제정하셨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 주시면서 새해의 모든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준(루카 2,11) 구세주를 찾아가는 장면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목자들의 관심은 오직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도 아기였고,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그 아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19절) 간직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목자들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기쁨이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에 담겨있는 보다 깊은 의미와 주님의 가르침들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리아의 모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들의 신비에 언제나 보다 철저히 참여하고자 하는 사랑에 불타는 모성이다. 그 모성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까지 동화하는 그런 모성이다. 이런 내용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 계약의 징표였다.(창세 17,11) 남자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예수께는 구원업적인 수난의 전표이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모성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더욱 풍요롭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생겨난 자기의 자녀들(요한 19,26)로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할에 종속되어있는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과 율법을 대립시키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갈라타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극하여 악의 힘에 억눌렸던 우리를 속량하시어(참조: 갈라 4,5), 당신 자신의 신적인 자녀 관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이 자녀는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다시 나게 하는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하셨다는 것이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갈라 4,4-5). 때가 찼을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려는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율법의 속박을 없애기 위해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 여자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갖는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구세사 안에서의 역할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떻게 평화의 주인(이사 9,5)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해의 평화에 대한 표징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평화는 바로 자녀들-형제들의 관계를 생기게 하는 모성이라는 표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형제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평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이며, 그 모성을 통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공격은 모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중에 잉태된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란, 바로 폭력을 쓰는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성적 사랑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것을 헛되이 여기고 누구에게나 반항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평화의 상징이며, 마리아의 모성을 펼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창출자이시다. 이 평화는 나약함이나 겁 많고 비겁한 이들의 무감각과 혼동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1-52)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수기의 대사제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이유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제 이 축복이 마리아의 미소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한 해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해를 봉헌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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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교회는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참하느님과 참사람)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합니다. 만일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신성(참하느님)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교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어떤 선택까지 하실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견고하며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바로 혈연관계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가장 친밀하고 절대로 끊어 놓을 수 없는 관계, 가장 강하고 견고한 관계를 우리 모두와 맺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제2독서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열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하느님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성모님께서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당신께 전하여진 하느님의 모든 말씀에 순명하시는 성모님의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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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평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복’이 다르고, ‘받기를 원하는 것’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신앙인에게 ‘최고의 복’은 ‘주님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평화의 인사’를 하고, 서로 평화를 빌어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은 재물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마음껏 소유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면서 그런 것들을 차지했을 때 큰 만족감을 얻는데, 그 만족감은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즐거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금방 지나가고, 가지고 있는 그것들은 멍에가 되고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평화의 반대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참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멍에와 족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지 못하고, 즉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움켜쥐고 있으려고 하면, 그 인생은 불행하고 허무하게 끝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세속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은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을 희망하고,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일도, 또 ‘복’을 받기를 바라는 일도, 당연히 세속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얻어 누리지 못하면, 세상의 온갖 복은 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평화’를 빌어 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신앙인은 ‘평화를 빌어 주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빌어 주는 것은 주님의 평화를 함께 누리자고 초대하는 일이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화를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이라는 말은, “너희가 전하는 평화를 받아들이면”이라는 뜻이고, ‘마땅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거부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희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마땅하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다시 생각하면, 이 말씀에는 평화를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남에게 평화를 전해 주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없는 평화를 남에게 전해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첫째, 주님을 믿어야 하고, 둘째,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과 ‘회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 8,23-25ㄱ)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온갖 무서운 일에 압도되어서 금방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반대로 믿음이 충만하면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 평화를 잃지 않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감옥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사도 12,1-11)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는데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주 태평스럽게 감옥에서 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믿음’과 ‘평화’가 직결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지었을 때, 또는 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영혼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회개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사람들 경우에, 죄 속에서 살면서도 죄의식 없이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이 평화는 아닙니다.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지난 삶에 대한 후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병자성사 집전할 때 자주 봅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라도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영혼은, 평화 없이 생을 마감하고, 평화가 전혀 없는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늦기 전에, 즉 ‘지금’,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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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베들레헴은 유다의 작은 고을로 다윗 임금의 고향으로 언급되었으며(1사무 17,12 참조), 메시아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예언서 5,1)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바로 이 고을에서 태어나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낸 목자들은 천사가 전한 말씀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탄생의 목격 증인입니다.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유다교의 율법에 따라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과 베들레헴은 모두 다윗 임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던 다윗은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임금의 자리에 오릅니다. 히브리 말로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을 가지는 메시아는 이후에 구원자를 의미하게 되고, 그 말을 그리스 말로 옮기면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구약 성경의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것과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이름을 기억하게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며 새로운 구원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과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음에 품고 줄곧 생각하며 묵상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때부터 마음으로 그분의 길에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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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인구 스테파노 신부님]
어릴 적, 꽤 오랜 시간 엄마가 집을 비울 때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란다 창을 다 닫아걸어도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꽤나 요란한 밤.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형아~ 무섭다~” 동생의 칭얼거림에 애써 담담한 척... “무섭긴 뭐가 무섭노 ~ 형아가 안 무섭게 해 줄게.”라고 허세를 부리고는 텔레비전 소리를 높이고, 온 집에 불이란 불은 다 켜놓으며 무서운 내 마음을 다스리지만, 텔레비전 소리도 온 집에 켜놓은 불빛도 두려움을 없애주진 못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요란한 창문 소리와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를 뚫고 ‘딩동~’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날쌘 동생이 후다닥 뛰어나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묻습니다.“누구세요?” 그러자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응, 엄마~”
“응, 엄마~” 이 가녀린 여성의 한마디는 창문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만듭니다. 이 가녀린 여성의 한마디는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로도, 온 집안을 밝혀둔 불빛으로도 없애지 못했던 두려움을 온전히 사그라들게 만듭니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그런 존재지요.
왜 아이들은 “응, 엄마~” 이 한마디에 모든 두려움을 잊을까요? 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요란한 밤’이라는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왜 엄마가 있으면 괜찮아지는 걸까요?
‘엄마와 아이들 간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 그 존재가 지금 내 곁에 있기에, 상황은 그대로지만,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엄마’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가 거센 바람이 부냐 고요하냐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니, 그것이 채워지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대축일인 오늘, ‘관계성’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생각해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 내가 아버지의 뜻을 살아낸다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가?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도, 언제나 그랬듯 ‘요란한 밤’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르려 애쓴다면, 우리 영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닫힌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딩동~ 응, 엄마~”라고 해주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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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2,21)
이제 작년은 과거라는 시간의 창고로 옮겨졌으며, 금년은 현재라는 시간의 진열대에 올라왔습니다. 교수신문은 2023년 한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 라는 뜻입니다. 견리망의를 추천한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중어중문학과)는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바르게 이끌기보다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 같다”며, 출세와 권력이라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편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경우로 의심되는 사례가 적잖이 거론되고 있다, 고 추천 이유를 말했습니다. 견리망의를 선정한 교수들은 대통령의 친인척과 정치인들이 이익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고위공직자의 개인 투자와 자녀 학교 폭력에 대한 대응, 개인의 이익을 핑계로 가족과 친구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럴수록 정치인, 교회 지도층 그리고 신앙인 우리 모두 자기 이익보다 먼저 의로움을 살아가는 2024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전엔 설날 세배하면 어른들은 덕담을 해주었으며, 그 덕담 내용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삼남의 산간지방에서 어른들은 세배하면, ‘너에게 소 한 마리를 주니 끌고 가거라.’든가, ‘내 자네에게 닭 한 마리를 주니 안고 가게나’는 덕담을 해주었는데 이를 심축心畜을 준다고 했습니다. 물론 소나 닭을 준다고 해서 실제로 소나 닭을 주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짐승의 심성을 준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닭을 주고, 조심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거위를 주고, 제 꾀에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돼지를 주었습니다. 가장 빈도가 높은 심축이 조랑말이었다고 합니다. 조랑말은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한국 고유의 과하마果下馬로, 키가 석자 밖에 되지 않아 과실나무 아래를 지나다닐 수 있다, 하여 과하마라고 했습니다. 이 과하마가 설날 덕담에 빈도 높게 오른 이유는, 첫째 겸허하고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장점 때문이며, 놀라운 것은 비록 소인국의 말 같지만, 그 강인한 내핍성과 인내력, 운송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이라고는 겨우 짚 썬 것이 고작인데 100kg가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 피로한 기색 없이 하루에 50km식이나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수평 이동에는 과하마가 서양 말을 못 따라가지만, 수직 이동에는 서양 말이 과하마를 못 따라갑니다. 높은 산길이며 고갯길도 넘어가는 과하마는 좌절 없는 상승 의지의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이규태 코너에서) 2024년 설날 아침, 한국 고유의 과하마 한 마리씩을 덕담의 심축으로 선물합니다.
우리는 새해 첫날 아침,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는데 이는 곧 하느님의 축복에서 출발한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 민수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사제 직분을 맡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백성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6,24~26) 그렇습니다. 이는 단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한 축복의 기도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세상 사람이 바라는 복과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축복이 다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어둠과 거짓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 인생의 올바른 삶이며 가치인가를 찾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축복을 참으로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빌어주어야 하는 축복은 바로 참 평화인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새해 첫날 평화의 모후인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처럼 그리고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를 찾아 달려 온 목동들처럼 우리 모두 세상의 빛인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찾고, 그 평화를 간직하며 새해를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간직하면서, 이 평화가 세상으로 번져 나가고 퍼져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평화가 세상에 충만할 때 비로소 세상에는 다름으로 말미암은 차별, 곧 성性, 인종, 피부, 종교, 신분, 지역 차별을 받지 않고, 다름으로 인한 갈등과 불목, 억압과 폭력, 불의와 부정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함께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세상을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현존의 표징이며,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가져온 새 삶(=부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올 한 해 세상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천사들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2,14)를 노래하며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힘차게 출발합시다.
이 평화를 우리가 먼저 살고 세상에 빌어주기 위해서, 우리 모두 오늘 복음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본을 보여주신 신앙의 태도를 본받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아기에 관해 들었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자, 이를 들은 이들은 모두 놀라워하였다고 증언합니다. (2,18참조) 왜 그들은 목자들의 말을 듣고서 놀라워하였을까요? 아마도 무식하고 천한 그들의 입에서 천상의 신비가 선포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동시에 그들을 예언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느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분명 아기의 부모이신 요셉과 마리아 또한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는 홀로 마리아만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라고 전하는 의도는 곧 우리 역시도 성모님의 이 마음의 태도를 배우며 실천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마음에 간직한 이 모든 일은 포대기에 싸인 채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장래에 대한 계시입니다. 성모께서 마음에 간직하다, 는 말의 의미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한 번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후에 표현된 되새겼다, 는 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곧 되새겨서(=자꾸 골똘히 생각하다.)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마음속에 간직하다, 는 것은 달리 말하면 기억한다, 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의 기억과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에 힘입어 성경을 기록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공생활 시작하실 때까지의 모든 일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과 진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가장 고유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기억력입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자녀에 관한 기억은 너무도 생생합니다. 이처럼 어머니 마리아는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신이 겪은 일은 간직하였을 것이며 그 힘은 바로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속에 간직했다, 는 표현은 이후 예수님이 성전에서 되찾으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고 대답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는 대목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처럼 성모님께서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일들 앞에서 평안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다리시는 모습은 참 평화를 바라는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님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하느님의 뜻을 살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이를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한 해가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갑시다. 새해 첫날인 오늘 다시금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빕니다. 저 역시도 2024년 올 한 해, 프란치스꼬 교황님께서 언급하셨던 것처럼, 양 냄새가 물씬 나는 목자가 되길 희망하며 다짐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복음환호송:히1,2참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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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아주 오랜 시간 연구했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1938년부터 시작되어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진행하고 있는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입니다. 어렸을 때 겪은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들 삶의 다양한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이 연구는 최초 참가자 724명에, 그들의 후손까지 1,3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3세대에 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진정 행복하고 좋은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완결되지 않은 연구이지만, 지난 85년 동안 사람들을 추적하면서 수천 개의 질문을 던지고 수백 가지를 측정해서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게 뭔지 알아냈습니다.
직업적인 성취가 정답일까요? 아니면 운동? 또는 건강한 식단은 어떠합니까?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광범위한 중요성을 증명한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좋은 관계’였습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좋은 관계’야 말로 이 연구 조사 전체를 인생에 대한 단 하나의 원칙으로 요약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도 이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만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직적인 관계라 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더욱더 ‘좋은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철저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예수님 잉태 소식도 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요셉과 예수님과 함께 성가정을 이루십니다. 서로 불목하고 미워하는 관계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가정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목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찬미했지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곧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관계’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예전의 삶에 머물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의 삶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삶.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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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로서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갈라티아 4,4-7 (종살이에서 자유로)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루카 2,16-21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할례와 작명)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나로서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어둠에 잠긴 벗들을 마주하는
해맑은 나의 얼굴이
나를 늘 비추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보이지 않는 벗들에게 건네는
정겨운 나의 눈길이
나를 늘 바라보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목소리를 빼앗긴 벗들을 대신하는
담대한 나의 부르짖음이
나에게 늘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서러움에 눌린 벗들에게 내미는
부드러운 나의 손길이
나에게 늘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굴레에 얽매인 벗들에게 다가가는
굳건한 나의 발걸음이
나를 늘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터전을 빼앗긴 벗들과 함께하는
든든한 나의 몸짓이
나를 늘 평화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외로움에 지친 벗들을 보듬는
따스한 나의 품이
나를 늘 품어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슬픔에 겨운 벗들을 품는
애틋한 나의 마음이
나를 늘 기쁘게 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한숨에 젖은 벗들과 나누는
자그마한 나의 행복이
나를 늘 축복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스러져가는 벗들을 일으키는
푸르른 나의 살림이
나를 늘 살리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찬미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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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해 첫날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셈을 하지 않고 줍니다.
새해 첫날에 복을 받기에 앞서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가운데 주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가정, 이웃,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렇게 축복하고 빌어주면, 주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에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참석합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형제애를 나누고자 미사참례를 하시는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소중한 연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 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신명 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복입니다. 은총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새기고,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 3,9)
올 한해는 주님 안에서 복을 짓고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천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복(五福)을 보면,
1.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2.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3.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4.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5.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1. 건강한 몸을 가지는 것 2.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얻는 것.
3.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는 것.
4.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것.
5,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가지는 것을 신(新)오복(五福)으로 여긴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입니다. 천상의 복과 연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누리는 복은 천상을 차지하는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1,3)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복, 하느님 나라, 영원생명, 완전한 구원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더 큰 사랑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올해는 ‘더 큰 사랑을 담아’ 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아야 하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 더 큰 복을 받으려니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더 큰 사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지금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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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의 하느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아침성무일도시 찬미가가 너무 깊고 아름답고 풍부하여 두연을 후에 추가합니다.
“빛살을 지어내신 빛의 창조주, 구유도 마다않고 누워계시며
일찍이 성부함께 하늘내신분 아기로 모친품에 안겨있도다.
이제야 빛과구원 탄생하시니 어둔밤 사라지고 죽음없도다.
마리아 낳으신이 하느님일세 오너라 만민들아 그를믿어라.”
어제의 계묘년 토끼해의 끝은 오늘 갑진년 청룡(靑龍)해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용기와 도전을 상징하는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새해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새해 첫날 오늘은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담화도 각별했습니다. 주제는 시의적절하게도 “인공지능과 평화”였고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맺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이 발전하는 유형의 행보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형제애와 평화에 기여하는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몇몇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인류가족 전체의 책임입니다. 저는 새해를 시작하며 인공지능 유형들의 급속한 발전이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불의의 사례들을 늘리지 않고, 전쟁과 갈등을 종식시키며 우리 인류가족을 괴롭히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담화문입니다. 인류가족을 껴안아야 할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맡겨진 사명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성가정의 모범을 살아내야 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어제 성가정 축일의 본기도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가정의 성덕을 본받아 살아가는 여기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 평화의 집, 환대의 집, 사랑의 집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어제 공동체 친교의 날에는 한 해를 마치면서 수도원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들었습니다. 저절로 “아,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구나! 정말 세상 인류가족에 활짝 열려 있는 하느님의 집이구나! 하느님의 집으로서 수도원의 본질적 사명을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예전 써놨던 “사랑”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세상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성가정 수도 공동체를 상징하는 사랑의 큰나무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참 좋아하시는 일이 세상 피조물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일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역시 얼마나 신바람 나는지요! 가사도 곡도 짧고 좋아 하루종일 소리내어 부르고 싶은 노래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축복중의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됨이 축복이요, 여기 이렇게 살아있음이 축복임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나 허무가 아닌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욕망덩어리 사람이 아니라 축복덩어리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제2독서 갈라티아서 말씀이 바로 주님 성탄의 축복을 명쾌하게 밝힙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우리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시어,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의무요 책임인지요! 바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목자들이요 말그대로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가난하고 순수한 깨어있는, 진리의 하느님을 갈망하는 목자들입니다. 마침내 주님 천사의 안내로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고 아기 예수님을 만나니 말그대로 아이콘택트 눈맞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목자들을 바라보는 아기 예수님의 눈빛과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목자들의 눈빛이 만난 것입니다. 우리를 굽어보시는 분을 우리가 바라보는 ‘눈맞춤(아이콘택트)’이야말로 지복(至福)이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눈맞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기도 합니다. 예전 어느 가을날 티없이 푸른하늘이 흡사 나를 내려보는 “하느님의 눈”같다는 충격에 쓴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그리움이 깊어 시리도록 푸른하늘이 되었다
영원한 하늘이 되었다
침묵의 하늘이 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 되었다
하느님의 눈이 되었다
나는”-1997.11.27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눈”이 되고 싶은 것은 관상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목자들은 관상가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에서 감명과 더불어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얻었을 것입니다. 바로 다음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야 할 관상가의 진면목입니다.
목자들이 전해준 모든 일들에 모두 놀라워하는데 우리 마리아 성모님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위대한 영혼의 특징은 깊이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이런 성모님처럼 깊은 영혼의 사람들은 결코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닌 인격적 “응답(respondence)”을 합니다.
이어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마침내 목자들은 주님 관상의 기쁨을 증언하고 나누는 선교사가 된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 관상의 기쁨을, 찬양과 찬미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고 싶은 선교 열정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영적본능입니다. 저는 어제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강론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참 멋진 말씀에 감동했고 참 기뻤습니다.
“1년 전 오늘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사랑스럽게, 지혜롭게 교회를 섬기다가 지상 여정을 끝내셨다. 우리는 그분께 크나큰 애정과 감사, 격려를 느낀다. 그분은 천상으로부터 우리를 축복하시며 동반하신다. 베네딕도 16세에게 박수를 보내자!”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축복중의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됨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비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할 거룩한 의무와 책임, 권리를 지닌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청룡의 해 갑진년 새해 첫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축복하시어 당신 평화의 사도, 축복의 사도, 찬미의 사도, 기쁨의 사도로 세상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1.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2.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3.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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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랜 새로움>
어제 저는 저의 동기 수사님 삼우 미사를 가족과 함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제가 마침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고 올해 2024년을 맞이해야 할 날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연말연시에 우리는 버리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가야 할 것은 챙겨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였고, 마찬가지로 수사님에 관련해서도 안 좋은 기억이나 감정은 버리고, 좋은 기억과 감정과 유산은 간직해야 할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에게만 그렇게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올해 나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선 작년의 무엇을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할까 생각해봤는데 아예 새롭게 시작하고 살아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는 새롭게!
새 술은 새 부대에!
작년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작년이 올해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올해는 새해니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새로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 나이 먹도록 이것저것 살아봤는데 안 살아본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사랑 말고 우리가 살아야 할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 말고 살아야 할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코헬렛서가 얘기하듯 태양 아래 새로울 것이 없고 다 있던 것입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 아닌 다른 것을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새롭게 사는 것인데, 새로운 영혼으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오스딩 성인이 고백록에서 얘기한 바로 그 ‘오랜 새로움’입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까지 살아야 할 사랑, 그 하느님의 오랜 사랑이고 그것을 매일 그리고 매해 새롭게 사는 것인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잉태하면 됩니다.
새로운 영혼, 새로워진 영혼은 성령의 영혼입니다. 성령으로 매일 천주를 잉태하면 새로운 영혼이고 새로워진 영혼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진주조개가 진주를 잉태하듯 성령의 영혼은 사랑을 잉태하여 하느님 사랑을 만들어냅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든 조개가 진주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 안에 들어온 모래와 같은 이물질을 진주 핵으로 품고, 오랫동안 인고의 시간을 거친 다음 생성되는 것만 진주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몇십 년의 고통을 사랑으로 살아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드시 고통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그러나 차츰 성령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통을 진주로 못 만들어내는 삶은 고통스럽기만 하고 슬픕니다. 고통이 진주가 되게 올해도 살아가야 하고 고통을 하느님 사랑으로 만드는 과정을 올해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올해 살아가시라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올 한해 고통이 없게 해달라고 여러분을 축복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무슨 축복이냐고 서운하단 소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러는 중에도 올해 평화 주시기를 모세처럼 빌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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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2,19)
<성탄과 마리아!>
오늘 복음(루카2,16-21)은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는 말씀'과 '아기 예수님께 할례와 작명이 베풀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대림제1주일(첫 번째 새해)에 이어, '두 번째 맞이하는 새해'입니다. 계묘년이 저물고, '청룡의 해라고 불리는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뜻깊은 새해를 맞이하여 매일 이른 아침에 복음 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형제자매님들께 새해 인사 드립니다
"새해에는 영과 육이 함께 더 건강하시고, 이루시고자 하는 소망들이 주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머무는 삶의 자리와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이루카 신부)
그리고 오늘 제1독서(민수6,22-27)에 나오는 '아론의 축복'으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전 세계 모든 가톨릭교회가 새해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그리고 '세계 평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새해 첫날에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면서 또한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셨고, 이후 한 생을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셨으며,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전구자(轉求者)이신 마리아와 함께 새해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에 힘을 더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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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_kMovbmJ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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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 16)
신앙의 여정은
성모님의 삶처럼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슴 뛰는
뜨거움의
진실어린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장 좋은
신앙의
모범이 되십니다.
좋으신 은총은
언제나 좋으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하시며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낳으시고
예수님과
늘 함께하신
성모님의
여정입니다.
가까이
함께 하시면서도
곰곰이
이 모든 것을
마음 깊이
새기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자신의 뜻을 먼저
내려놓으시는
성모님의 삶입니다.
성모님은
바로 우리모두의
어머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매순간 우리를
성모님의 삶으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생명을
성모님께
온전히
맡기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
우리 또한
참 사람이며
참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가
됩니다.
2024년 새해의
시작은
성모님의 삶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한 해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사랑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랑 앞에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기쁘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사랑은
소중한 봉헌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소중한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참 사람이
되어 오신
참 하느님을
성모님과 함께
만나는 행복한
한 해의 시작입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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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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