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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황제 측천무후의 악행과
남성편력
중국 여황제 측천무후의 악행,
남성편력, 초상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
중국에서 3대 악녀로 일컬어지는
여인들이 있는데,
바로 여후와 서태후, 측천무후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 세명의 여인들은
당대 최고의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또한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으며,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권력의 여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권력욕심이
강했던 여인으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측천무후’는
정말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는 여인이다.
이 세상에 자기 친자식까지 죽이면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여인이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 친자식을 죽이면서까지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유일무이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측천무후’가 그 주인공이다.
여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최고의 권력과 전횡을 휘둘렀던
‘측천무후’는
희대의 악녀라는 평가와 함께,
어지러운 시절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던 현군이라는
두가지 이미지를 함께 갖고 있는
아주 특이한 인물이다.
측천무후는 최고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친딸과 아들까지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고,
여황제에 오르고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수천명의 남성들을 궁궐로 끌여들여서,
후안무치한 쾌락을 벌였던
여황제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진나라의 진시황제 못지않은
엄청난 쾌락과 남색을 즐겼던
측천무후는 음탕한 요부라는
불명예스러운 닉네임을 갖고 있는
여황제로 유명하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음탕한 요부이자,
희대의 악녀라는
안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혼란한 시기에
당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던
여걸이라는 평가도 동시에 갖고 있는 등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힘든
이중적인 성향의 인물이다.
그럼 측천무후가
어떻게 당나라 황제의 황후의
자리에 올랐으며,
여황제의 자리에 올랐는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그녀는 14살이었던 636년도의 어느 날
궁궐로 입궁해서 궁녀가 되었다.
무조(측천무후)가 궁녀가 되었을 때는
당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였던
당태종이 황제로 군림했던 시절이었다.
‘무조’는 원래 야심이 매우 큰 여성으로서
자신이 낮은 직책인 궁녀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속에는
항상 권력의 최정상에서 군림하는
황제의 황후가 되고자 하는
원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당태종이 황후의 죽음 이후에,
몹시 외롭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무조’는 한가지 계략을 생각해낸다.
측천무후 초상화
당태종이 외국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명마 한마리가 있었는데,
그 명마가 몹시 사나와서
길들이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무조’는
내시의 추천을 받아서
당태종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그 말은 원래 주변의 조공국으로부터
선사받았던 명마인데,
어찌나 사나운지
아무도 그 말을 길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태종의 앞으로 나아갔던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에게
‘쇠채찍과 쇠망치, 비수의 세가지만 있으면,
능히 그 사나운 말을
길들일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당태종이 무조의 말에 흥미를 느끼고
그 연유를 묻자,
무조는 "먼저 그 사나운 말에게
쇠채찍을 때려서 말을 들게하고,
그레도 말을 안들으면,
쇠망치로 엉덩이를 힘껏 때린다면,
그 말이 엄청난 통증 때문에
말을 듣게될 겁니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자, 당태종이 그러면
비수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이냐 라고 묻자,
무조는 ‘만약 그 사나운 말이
쇠망치로 때려도 끝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말은 쓸모없는 말이기 때문에,
비수로 찔러서 죽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당태종은 무조의 이와같은
당돌하고도 명쾌한 말에
몹시 감탄을 했으며,
이때부터 무조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무조는 당태종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커다란 금성이
며칠동안 밝은 빛을 비추면서
하늘에 계속 나타나자,
당태종은 별자리를 보고
운세를 점치는 태사령을 불러서
그 이유를 물었다.
태사령은 당태종에게
장차 나라에 큰 환란이 일어나게 됨을
미리 알려주는 징조라고 말하면서,
황상의 후궁이 된 무조는
역상을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세력들에 의해서
장차 황제의 후손들을 축출하고,
무씨의 천하를 만드는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간하였다.
이같이 무조 때문에
장차 역모가 일어날 수 있다는
태사령의 말을 들은 당태종은
이때부터 무조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의 미모는
당시 상당히 예뻤다고 하는데,
궁녀시절 무조는
자신의 이름보다도
‘무미랑’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한다.
측천무후의 궁녀시절 별명인 ‘무미랑’은
예쁘게 생긴 무씨여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젊은 시절에 측천무후는
상당히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정도로 빼어난 미모가 있었으니까,
아버지 태종과 아들 고종의 부자를
모두 사로잡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얼마 후 당태종은 병을 얻어서
앓아 눕게 되었는데,
무조는 당태종의 침실에서
병시중을 드는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이때 당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아들 이치(훗날 고종)는
당태종의 병시중을 드는
무조를 보고 한눈에
홀딱 반해버렸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를 보고
그 미모에 홀딱 반했던 이치(고종)는
나중에 태종이 죽은 후에,
무조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원래 황제가 죽으면,
그 황제를 모시던 후궁과 궁녀 중에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후궁들은
모두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는 것이
그 당시의 법도였다.
무조도 당태종이 죽자,
법도에 따라서,
감업사라는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어
태종의 아들 이치가
당의 황제인 고종으로 즉위하였는데,
고종은 무조를 잊지못하고
종종 절 감업사를 찾아가서
무조(측천무후)와 사통하곤 하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 사이에
고종의 총애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과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고종의 황후 왕씨는
고종이 절에 있는 무조와
사통을 즐긴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연적
소숙비를 견제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무조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고종의 후궁이 될 수 있게 도와줬다.
즉, 황후는 고종이 소숙비에 푹 빠져 있자,
소숙비에 대한
고종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무조(측천무후)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무조가 얼마나 교활한 요부인지를
전혀 몰랐던 황후 왕씨는
스스로 무조를 궁궐로 불러들이는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인데,
이것은 나중에 자신의 목을 옥죄는
엄청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여우를 치기 위해서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됐다.
황후 왕씨의 도움으로
고종의 후궁인 ‘소의’로 책봉된 된 무조는
황후 왕씨와 결탁해서
고종과 소숙비 사이를 이간질해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소숙비를 모함해서
그녀를 폐출시켜 버렸다.
그리고 무조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으면서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해 나갔다.
이렇게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된 무조는
그 후 황후 왕씨를 타킷으로 삼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녀를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
무조는 자신이 황후가 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인
황후 왕씨를 축출하기 위해서,
매우 사특한 계략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자신의 친딸을 죽이고
황후 왕씨에게
그 누명을 씌우는 것이었다.
무조는 이때 딸을 낳았는데,
황후가 자신의 딸 출산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를 찾아온다는 전갈을 전해 듣고,
한가지 계략을 세우고는
스스로 자신의 친딸을 목졸라 살해한 후,
이불로 덮어버렸고,
그 방으로 황후를 유인해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소를 찾은 황후가
죽어 있는 자신의 딸을 목격한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무조는
죽어 있는 딸과 함께 있는
황후에게 친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워버렸다.
이때 실제로 죽은 자신의 딸과
황후가 함께 있는 장면을
많은 궁녀와 나인들도 함께 보았기 때문에,
황후 왕씨는
측천무후가 주장하는 친딸 살해의
누명에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무조(측천무후)는
스스로 몰래 자신의 친딸을 죽이고는
황후가 살해의 누명을 쓸만한
상황을 치밀한 계획하에
연출했던 것이다.
결국 죽은 딸과 함께 있는 황후를
수많은 궁녀들과 나인들이 보았고,
또한 무소의(측천무후)는
곧바로 고종을 불러서
이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무소의(측천무후)가
치밀하게 계획한 이와같은 모략에
완전히 걸려든 황후 왕씨는
졸지에 측천무후의 딸 살해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황후 왕씨는
누명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체,
무조(측천무후)의 요구에 따라서
황후에서 폐출되고 말았고,
황후자리는 무조(측천무후)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무조(측천무후) 655년 30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 야망이 엄청나게 컸던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온갖 권모술수를 다 부렸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교활한 간교를 부려서
마침내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켜 나갔다.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이 황후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친딸을 죽이는
천륜을 저버리는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녀의 딸은
단지 그녀가 최고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황후가 된 무조(측천무후)는
여기서 그치지않고,
폐서인 된 황후와 소숙비에게
곤장 백대를 때리게 한 후,
술항아리에 가둬서 죽게 만들었다.
이것은 최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얻고자 하는
측천무후가 얼마나 잔인한 여자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녀는 황후의 자리 즉,
2인자의 자리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
여황제가 되기 위해 행한 만행들
측천무후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조정에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계속 포섭해나갔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신들을
모두 다 차례로 제거해나갔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외숙부이자
최고의 실세인 승상 장손무기를 모함해서,
수많은 반대파들을 숙청해버렸다.
또한 다음 보위를 이을 황테자인
배다른 자식 이충을 모함해서,
폐위시켜버렸고,
자신이 낳은 장남 이홍을
새로운 황태자로 옹립하였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만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자신이 친아들이 갖고 있는
황제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조정에서
자신의 전횡을 고변하거나
반대하는 대신들을
모두 죄를 뒤짚어씌워서
숙청해버렸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장남 이홍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홍을 식사자리에 초대한 후,
그가 먹는 식사에 독약을 넣어서
마침내 장남이자 황태자인
이홍을 독살시켜 버렸다.
이미 권력의 맛에 눈이 먼 측천무후는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인 이홍을
독살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 후 그녀의 둘째아들인
이현(李賢)이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두뇌가 똑똑한 이현에게
위기감을 느낀 측천무후는
여색을 밝힌다는 거짓된 모함을 씌워서
황태자 이현을 폐위한 후,
멀리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 후 측천무후는
유배보낸 자신의 둘째아들 이현에게
자살을 강요해서, 죽게 만들었다.
그 후 측천무후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는데,
683년 고종 이치가 사망하자,
황태자 이현이
황제(중종)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측천무후는
자신의 셋째아들인 중종을
3개월만에 폐위시켜버리는데,
그 이유는 중종의 부인 위씨와
외척세력들이 권력을 농단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마지막 막내아들인
이단을 새로운 황제(예종)로 옹립했고
자신은 황태후가 되었는데,
이때 이미 조정의 모든 실권은
측천무후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예종은 이름뿐인 황제였으며,
측천무후가 국가의 모든 정사를
독점할 수 있었다.
황제로 등극한 측천무후의 정치와
남성편력
그리고 690년
그녀는 이름뿐인 황제 예종으로부터
황위를 넘겨받고,
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딸 한명을
죽였을 뿐만아니라,
또한 아들 두명을 죽이고,
또다른 아들 두명을 폐위시키고서,
자신의 오랜 야망인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67세의 나이였고,
그 후 측천무후는
약 15년간 철권통치를 이어나갔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제가 된 후에,
비교적 정사를 올바르게 펼쳐나갔는데,
인재들을 공평하게 등용해서
국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해갔고,
나라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최고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친자식은 물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정치적 식견과
경륜이 뛰어났던 측천무후는
정사만큼은 잘 수행해서
민생을 안정화시켰고,
국가를 안정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측천무후는
여황제로 등극해 있는 동안,
수많은 젊은 남성들을
궁궐로 끌여 들여서,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등
매우 음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했다.
측천무후는 여황제가 된 후에,
수많은 젊은 남성들을 모아서
궁궐로 불러들여서
끊임없는 환락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후,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궁궐 깊숙한 곳에
공학부를 설치해 놓고,
중국 전역에서 젊고 잘 생긴 남총(男寵,
예쁘게 생긴 남자가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일) 들을
수천명이나 뽑아들여서
밤바다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남총으로 뽑혀서 궁궐로 들어간 남성들은
총 3,000명나 된다고 하며,
이 남총들은 낮에는 측천무후의 곁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시중을 드는 등
비서역할을 하다가,
밤이 되면 측천무후의 침실로 끌려가서
함께 동침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측천무후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밤마다 계속해서
남총들과 향락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남성편력을 추구했던
호색가로 명성이 높으며,
가장 음탕한 여황제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갖게 되었다.
측천무후에 대한 구당서의 기록에도
그녀의 남총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측천무후의 남총은
나이와 외모,
그리고 건강상태를 보고서
뽑아 들였는데,
이들 남총들의 수는
3,000명에 이르렀고,
이들의 대부분이
측천무후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측천무후가
말년에 너무도 남총들과
환락을 즐기느라
정사를 소홀했기 때문에,
그 틈을 틈나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측천무후는 699년 뒤늦게
자신의 후사를 생각해서인지,
자신이 쫒아냈던 세번째왕자
이현(중종)을
다시 황태자에 복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측천무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남총출신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측천무후의 후광을 업고,
권력을 농단하고
온갖 전횡을 다 저질렀다.
이처럼 장역지와 정창종 형제가
국정을 함부로 농락하고
못된 짓들을 일삼자,
대신들이 크게 반발했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렇게 장역지, 정창종 형제의 농간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신들은 두형제의 숙청을
측천무후에게 간언하게 되었고,
측천무후는 이들의 간언을
전혀 듣지 않았다.
그리고 705년
그녀가 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자,
재상 장간지가 친위쿠테타를 일으켜서
그녀의 궁궐로 쳐들어갔고,
측천무후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그녀를 황제에서 퇴위시켜 버렸다.
이로써 측천무후가 세웠던 ‘무주’는
15년 만에 망했고,
다시 당나라로 복위되었으며,
측천무후의 3남이자
황태자인 이현이
황제(중종)로 등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쿠데타세력들은 폐위된 측천무후를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녀가 새로운 황제인
중종의 친모친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일 그녀를 죽였다가는
새로운 황실의 정통성에 관한
시비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쿠데타가 일어난 그해 겨울,
82세의 나이로
장안성의 상양궁 선거전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과 딸을 모아 놓고,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새겨 넣지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며,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도 남겼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페황후 왕씨의 일가를
모두 복원시켜달라는
유언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이제 죽을 때가 되니까,
그때서야 측천무후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일까?
자신이 황후가 되기 위해서,
거짓으로 모함해서
살해누명을 씌워서 죽인
왕씨 황후의 일가의 복권을
아들 중종에게 부탁했다고 하니,
정말 그녀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며,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천륜(天倫)까지 끊은
권력에 중독된 노예인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女皇帝)
측천무후(則天武后)
그녀의 무덤 앞에
글자 없는 비석, 무자비(無字碑)
일반적으로 시부모를 공경하며
편히 모시고,
한 남자의 아내로 내조를 잘 하며,
현명한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인을
현모양처라 말한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세태(世態)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현모양처란 말이
평범한 여성의 표상이 아닌가 싶다.
황제(皇帝)는 다른 말로
천자{천제지자(天帝之子),
하늘의 상제를 대행하는 인간}라 한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잘 살도록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이
황제의 가장 큰 의무이며 권리다.
무조(武조) 측천무후는
수나라의 2대 황제 수양제가
중국 내륙에 대운하를 건설할 당시
부자가 되어
당 태종 이연의 거병에 협력하여
당나라 건국에 건국공신이 된
무서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건국공신의 집안에 딸로
눈에 띄는 용모와 재기를 지녔던 무조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불과 10년 남짓 만에
남편 당 태종이 승하하자
황실의 관례에 따라
비구니로 출가하게 된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이 죽기 전에
벌써 그의 아들이며
당나라 3대 황제가 되는
당 고종 이치와 눈이 맞게 된다.
비구니가 된 무조를
황궁으로 다시 불러들인
당 고종 이치는
비록 후궁이었지만,
아버지 당 태종 이세민의 부인이며
자신에게는 어머니 되는
무조를 후궁으로 들여 살을 섞게 된다.
당 고종의 총애를 받은 무조는
소숙비, 왕황후를
누명을 씌워 차례로 죽이고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몸이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당 고종을 대신해서
정치에 간섭하던 무조는
당나라 건국 초기부터
충성을 다해온 대신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워 나간다.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
구세력을 서슴없이 숙청하며
나름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게 된다.
당고종의 장자인 황태자(이충)를
폐위 시키고,
자기가 낳은 아들로 황태자
(이홍, 첫째 아들)를 세웠으나
죽게 되자
이현을 황태자로 다시 세운다.
그러나 얼마후 이현(李賢, 둘째 아들)을
폐위시킨다.
병이 깊던 고종이 죽자
다른 이현(李顯, 셋째 아들)이
황제가 된다.
당나라 4대 황제 중종이 등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권력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종의 측근들이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중종을 폐위시키고,
당나라 5대 황제 예종
(이단, 넷째 아들)을 세운다.
예종 역시 황실과
전국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책임을 떠안고
어머니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무조는 여러 차례의 정치적 위험과
반란의 모의를 경험하였던 터라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의 생활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당태종의 '정관의 치'와 맞먹는
일명 '무주의 치'라 하는
태평성대를 만들고 있었다.
무조는 결국 당나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주(大周)'라는
나라 이름을 쓰게 된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 최후의 여황제로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
측천무후(則天武后) 여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측전무후가 나이가 더 들어감에
노쇠하고 병이 조금씩 깊어지자,
재상 장간지 등이
여황제를 압박하여
폐위 되었던 중종(이현, 셋째 아들)을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결국 82세가 되어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게 된다.
당나라 중종은
어머니 측천무후의 손에 의해
4대 황제에서 폐위되었다가
다시 황제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측천무후의 손자 당 현종의
'개원의 치'의 토대를 마련하여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로 평가하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치적(治績)이
너무 많아 비석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어떠한 글자도 기록하지 말고
빈 비석만 을 세워 두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乾陵)에는
글자가 하나도 기록되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과
부자 관계인 당태종과 고종,
즉 남편이 죽자
아들과 재혼하여
자식을 낳고,
또 자신이 낳은 자식을 죽이는 등
천륜까지 끊는 행위를 한
여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