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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9일(토)
* 시작 기도
주님...
가는 세월은 누구도 잡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토록 덥던 날씨가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날씨까지도 우리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줄 믿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날씨나 일기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새벽, 그 주님께 한 발짝 나아가고자 눈을 비비며 일어났사오니 이 종을 주의 품으로 받아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아담 안에 있는 본성인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의 정결한 신부가 되기 원합니다.
온갖 죄의 때로 얼룩져 있으나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한 처녀로 다가가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기 원하오니 성령께서 함께 하여주소서.
이 시간이 온전히 주님과 연합하여 성전을 세우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1:11-24
제목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나의 묵상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인 회심을 체험하자 눈이 멀었다.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성 안에 있는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아나니아는 자기 집으로 온 바울에게 안수하여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벗겨냈다.
바울의 눈은 그동안 유대교가 표방하는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런 옛 사람 곧 자기주장의지의 비늘이 벗겨지는 순간,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통하여 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행 9장).
바울은 그 다음 날부터 밖으로 나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큰 소리로 전하였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온 사울임을 알고 두려움에 쉬쉬 하면서 줄행랑을 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더 크게 외치면서 전하였다.
그런 바울이 이제 AD 53년 경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쓴다.
그것은 복음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이렇게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로부터 처음에 복음을 들었다.
복음을 들었지만 이 땅에서의 문제나 상황이 복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서 적이 당황하였다.
그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혼란하게 하는 말 곧 그리스도만으로는 안 되고 율법과 할례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혼합복음(?) -사실 이것은 복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난무하자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말을 듣고 이것이 그런가, 하면서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로 직접 받은 복음을 다시 한 번 전한다.
(11-12) 형제들이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게 된 경위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욱 설명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었을 때 어떻게 행했는지를 너희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극심하게 박해하였고 내 동족들 중에서 여러 동갑내기들 보다 유대교를 더 열심히 믿었다.
뿐만 아니라 내 조상들이 지켰던 그 전통에 대하여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나를 택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고자 하셨다.
그 때 나는 이 문제를 내 혈육이나 가족과 의논하지 않고 또한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에게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내가 게바인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15일 동안 머물 때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증하기 위함이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갔다.
거기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제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전에 멸하려고 했던 그 믿음(복음)을 전한다 하는 말을 그들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는 AD53년경이었다.
이 때가 기독교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도 하고 죽이려고 다메섹에 왔던 때이다.
그런데 이 때 바울은 극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난다.
빛으로 임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당신이 누구신지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행 9:3-5)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주님께서 그에게 아나니아를 소개하시고 눈이 먼 채로 아나니아에게 보내신다.
한편 아나니아를 불러 바울에게 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라고 하신다.
그 때 아나니아가 화들짝 놀라며 묻기를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친 자가 아닙니까?
그 여세를 몰아 지금 이곳 다메섹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자 왔다고 하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렇게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멀었던 눈이 다시 밝아지는데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
그는 그 즉시 일어나 각 회당에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였더니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적이 당혹해 하였다.
이처럼 오늘 다메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내용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로 직접 받은 복음이었다.
이 복음을 편지로 써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 곧 갈라디아서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AD 55년경에 고린도 교회에 쓰는 편지에서는 그가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이 크게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전 15:1-5, 표준새번역) 형제자매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일깨워드립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드린 말대로 여러분이 복음을 굳게 잡고 있으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그 복음으로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전해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받았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12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던 그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전하였는데 이미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복음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이나 그 누구도 아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은 복음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경우 자기는 분명한 복음인 줄 확신하지만 그러나 한 가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들어보니까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틀리지 않고 똑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받은 계시가 아니라 객관성을 갖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나도 전하노라고 하는 것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4가지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
이처럼 바울은 자기가 받은 것이라고 딱히 그것만을 고수하지 않았다.
그가 전하는 복음이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일치하니까 과감하게 내가 직접 받은 복음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은 것이다.
이를 가리켜 전승복음, 곧 전승된 복음이라고 한다.
(고전 15:3a)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런데 복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울의 마지막 편지로 알려진 디모데후서에서는 그가 전하는 복음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1절에서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인데 그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도됨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된 것이다.
사도란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누군가 보낸 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냄을 받은 자가 할 일은 보내신 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원 사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하셨다.
(요 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영생에 있다.
그래서 그의 사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여 행하신 일이 모두 영생이었다.
그 예수님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복음이 확장되어 결국 그가 창세전에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됨의 본분을 다하여 복음을 통해서 오직 생명 곧 영생을 전하는데 그의 전 생애를 다 바치고 있다.
(딤후 1:9-1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비롯한 우리를 창세전 언약(딛 1:2)에 근거하여 구원하셨다.
그리고 거룩하신 소명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주님과 말씀으로 관계하는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나의 의지나 나의 뜻 그리고 나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주기로 작정하셨던 생명의 뜻대로 하신 것이다.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나셨는데, 여기 첫 번째 나타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미암아 나타났으니’의 두 번째 나타나심은 1절과 9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의 은혜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는데 이것은 오직 복음으로써 행하신 것이다.
여기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 곧 이 두 단어를 합하면 영원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이 된다.
이 영생은 무엇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가?
10절 말씀에 보니까 ‘복음으로써(through the Gospel)’ 생명과 썩지 않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영생이 아니다.
복음은 영생으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영생을 얻을 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고후 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나는 어려서부터 복음이라는 말은 정말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복음을 통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요원하였다.
그러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목사가 되어서도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아주 오래 전에 내 아내에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목사가 되기 전의 일이다.
“여보, 나는 모태신앙임에도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지금까지 한 번도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고 체계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아내가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누구나 부러워할 모태신앙인으로 자랐고 아버지 형제가 모두 장로요 외삼촌들도 모두 장로이며 작은 어머니나 외숙모들도 모두가 권사들인 그야말로 직분이 화려한 믿는 집안이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까지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끄러움 중에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나의 삶이 갈지(之)자를 그리면서 살았음은 자명하다.
그러다가 참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복음을 통해서 내 삶이 변화되었으며 이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며 주님의 덮으심의 은혜가 필요한 자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원색적인 복음, 순수한 복음 듣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추구하게 하며, 만물 안에 속한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아 썩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만물 안의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영원한 나라에 그 소망을 두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오늘도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한국에서의 모든 삶을 내려놓고 이곳 베트남 하이퐁에 와서 자그마한 한인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감사함으로 지낼 수 있음은 내 안에 복음을 통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나 홀로 주님 앞에 앉아 주의 말씀을 얻어먹는 이 시간이 나를 살린다.
나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어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얻어먹는 것이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되었음을 고백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신적으로는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외로움이 결코 외로움으로 그치지 않는 것은 비록 고독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계심이요 주님의 함께하심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얻어먹을 수 있는 풍성한 잔치 자리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하늘의 신령한 양식인 말씀으로 날마다 채우소서.
내 영혼의 만나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사오니 오늘이라는 이 시간이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 종의 입술을 통하여 진보되는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날마다 깨달아지고 새로워지는 복음 앞에서 무릎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고 나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되게 하소서.
나 이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영원한 하늘을 소망하오니 그 나라가 내 안에 임하며 또한 아버지 품속에 거하나이다.
오늘도 나를 인도하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